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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왜 ‘호남선’을 타는가

등록 2004-05-21 00:00 수정 2020-05-03 04:23

“호남 껴안지 못하면 집권 불가” 한나라당의 절박감… 총선 이후 인적구성 변화로 공감대 확산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호남을 향한 한나라당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지난 3월 대표 취임 이후 첫 방문지로 광주를 택했던 박근혜 대표는 당내 소장파 모임인 수요조찬공부모임 소속 의원·당선자 10여명과 함께 5월18일 망월동 묘역에서 열리는 5·18 기념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물론 이전에도 이회창 전 총재 등 지도부나 광주와 인연이 깊은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참석한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체성 논란을 겪고 있는 한나라당의 ‘호남 다가서기’는 이전과는 궤를 달리한다. 호남 유권자들을 배제하고서는 집권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깔려 있다.

“호남 홀대 진심으로 사과하자”

지난 4·15 총선 당시 광주에서 유일하게 한나라당 간판을 걸고 출마(서구을)했던 이정현 전 전략기획팀장은 “한나라당이 호남 포기 전략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집권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과거엔 아예 호남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남에 다른 지역의 표를 보태 집권하겠다는 구상이었으나, 그런 전략이 이번 총선에서 나타났듯이 결과적으로 영남 고립화를 자초했다는 것이 이 팀장의 진단이다. 그는 요새 호남에서의 초라한 한나라당 성적표(정당득표율 △광주 1.8%, △전남 2.9%, △전북 3.4%)와 ‘향후 호남대책’ 자료를 들고 의원과 당선자들을 설득하러 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최근 당선자 연찬회 등 한나라당의 공식석상에서 “영남당을 탈피해야 한다” “호남과 충청을 껴안지 못하면 지지율이 30%대를 넘지 못하고 결국 집권은 불가능하다”는 등의 발언이 공공연히 나오는 것도, 그의 ‘펌프질’과 무관하지는 않다.

이 전 팀장의 논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과거 집권세력이었던 한나라당의 전신과 현재의 한나라당이 펴왔던 호남 홀대와 고립화 전략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새로운 관계맺기를 시도하는 것이 명분과 실리에 맞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은 좀더 직설적이다. “개발시대 때의 호남 소외와 그 이후 5·18 만행, 예산과 인사 차별,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무조건 반대 등 한나라당 전신과 한나라당의 구성인자·지지자들이 행해왔던 일방적인 가해 행위를 진심으로 사과하고 재발 방지 노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출발점이다. 16대 대선 때 호남에서 이회창 후보는 14만표를, 노무현 대통령은 274만표를 얻었다. 출향 인사까지 치면 대략 500:30 정도된다. 15대 대선과 16대 대선의 표 차이는 각각 38만표와 50만표에 불과했다. 이런데도 호남 포기 전략을 유지한다면 집권 의사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영남 출신 의원들이 ‘집권은 못해도 좋으니 의원직만 유지하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광주 출신으로 민정당 시절부터 당료 생활을 시작한 이 전 팀장은 주로 정책과 전략 분야에 종사하면서 수차례 이같은 내용을 담아 보고서를 올렸지만 그동안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표 체제 등장과 총선 이후 인적 구성의 변화로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쪽이 이전에 비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의원·당선자 설득작업과 함께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는, ‘3김’ 퇴장과 함께 지역주의가 균열 조짐을 보이고 한나라당의 민정당 색채가 옅어지는 지금이 적기라는 계산도 깔려 있는 듯하다.

문제는 진정성이다

문제는 진정성이다. 이 전 팀장도 “일회성 이벤트에 그쳐서는 굳게 닫힌 문을 열 수 없다”며 “영남에 대한 애정 이상으로 호남을 자주 찾고 지방자치단체장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예산을 포함한 현안에 관심을 갖고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1야당이면서도 호남에서의 한 자릿수 지지율은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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