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의 작가 바실리코스가 털어놓는 그리스 내전의 기억… “모두 재건에 몰두할 때 우리는 싸웠다”
20세기를 통틀어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선박주 오나시스,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 의 작가 카잔차키스, 의 여배우 멜리나 메리쿠리, 대중가수 나나 무스쿠리, 그리고 〈Z〉의 작가 바실리스 바실리코스를 들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나나 무스쿠리와 바실리코스만이 생존해 있다. 바실리코스는 지금 그리스작가협회장과 그리스를 대표해 유네스코 대사로 일하고 있다.
그와 인터뷰하기 위해 갔던 장소는 그리스 문인들이 즐겨 찾는 아테네 중심가의 한 카페였다. 카페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다른 동료 작가들과 한창 열띤 토론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바실리코스 대사는 지금 파리에서 32년째 살고 있지만 파리와 아테네 사이를 꾸준히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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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독재 집권 몇달 전 탈출
바실리코스 대사는 매우 운이 좋은 사람에 속한다. 소설 〈Z〉를 출간한 뒤 군부독재가 들어서기 넉달 전에 그는 그리스를 떠났다. 옆자리의 한 동료 그리스 작가는 “만약 바실리코스가 67년 당시 유럽으로 떠나지 않고 그냥 아테네에서 군인들에 체포됐더라면 생사가 위태로웠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소설 〈Z〉는 당시 나오자마자 금방 베스트셀러가 됐고, 작가 바실리코스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 반열에 합류했다. 책이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이름이 나기 시작하면 작가로서는 당연히 성공의 길로 들어섰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바실리코스는 〈Z〉와 함께 자신의 이름이 유명해지자 되레 불안해졌다. 바실리코스는 당시 “왠지 좋지 않은 무엇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의 직관은 빗나가지 않았다. 출판을 핑계로 스웨덴으로 탈출하다시피 떠나고 넉달 뒤 그리스에서 군부독재의 철권통치가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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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가 아테네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군부독재가 노리는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반체제 인사로 가장 먼저 체포됐을 것이다. 그 뒤 유럽에서 방랑객의 삶이 시작됐다. 아무리 이름 있는 작가였지만 자신을 체포하려는 군사정부로 인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계속 행운이 뒤따랐다. 군부독재가 들어서자마자 그의 소설 〈Z〉는 대히트를 쳤다. 더 많은 책이 팔려나갔고, 35개 나라의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서 출간됐다. 그리고 영화 〈Z〉도 만들어졌다. 프랑스 배우 이브 몽탕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성공한 정치영화의 모범을 남겼다. 물론 영화 〈Z〉는 원작자인 그를 세계적으로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1966년에 나온 소설 〈Z〉는 1963년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 교수의 암살을 다룬 정치소설이다. 영국의 철학자인 버트런트 러셀의 평화운동이 유럽을 휩쓸 무렵, 그리스에서는 같은 궤도에서 람브라키스 운동이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의과대학 교수로 국회의원이었고, 한편으로는 튼튼한 체육인으로 1963년 5월 반핵의 기치를 내걸고 수백km를 혼자 행진하기도 했다. 그의 운동은 대대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그리스 국민들 사이에 희망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그의 운동은 극우파 눈에는 좌익운동으로 비쳤다. 결국 람브라키스는 공공장소에서 극우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당한다. 현실적으로 그리스에서는 평화의 상징이었던 그가 암살당한 뒤 군부독재가 뒤를 잇는다. 〈Z〉는 작가 바실리코스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주었다. 군부독재의 미움을 사게 되는 것도, 그에게 영광을 부여한 것도 〈Z〉였다.
그러나 그는 〈Z〉에 대해 불만이 있는 듯했다. 자신이 출판한 책만 해도 무려 102권이나 되는데 오직 〈Z〉만 기억한다는 것이다. 102권 가운데 이미 스무권이 넘는 책이 영어나 불어, 독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도서가 됐다. 하지만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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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 개입한 미국은 자신감 얻었다
인터뷰 도중에 그는 자신이 “좌익이었고 지금도 좌익”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좌익이라는 딱지 때문에 그렇게 힘든 수난의 세월을 거쳐왔지만 아무런 숨김이 없다. 그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리스와 한반도 현대사로 주제가 넘어갔다. 공교롭게도 한반도의 분단선인 38도선까지도 아테네를 통과하고 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그리스와 한국은 아주 비슷한 역사를 경험했다. 모두 내전을 겪었고, 나중에는 군부독재까지 같이 경험했다. 두 나라는 반세기 이상 미국이라는 같은 나라의 개입 속에서 비슷한 역사를 체험했다. 이제 그리스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으나 한반도는 분단이 지속되고 있고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남북을 실제로 분단시켰던 한국전쟁의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바실리코스 대사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리스 내전’을 그리스 민족에게 엄청난 재앙으로 정의했다. “2차대전이 종결된 뒤 유럽국가들이 파괴된 자기 나라를 재건한다고 정신없이 일할 때, 우리는 서로 싸우느라고 정신없었다. 지금도 30대 이후 세대의 속을 파고들면 부모 세대나 조부모 세대의 가족들이 모두 내전으로 목숨을 잃거나 감옥살이 때 얻은 상처로 속이 곪은 사람들이 태반”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골이 깊었던 그리스 내전의 후유증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치료되어야 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시작된 그리스 내전은 공식적으로 1949년에 종결되지만 좌우 분열과 대립은 1994년 그리스 사회당의 안정적인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지속됐다”는 그의 진단을 따르면 그리스 사회에서 내적 갈등을 치유하는 데만 5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리스 내전에서 좌파가 패배한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그리스 게릴라를 지원했던 소비에트와 유고슬로비아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티토가 국경을 봉쇄하는 바람에 군수물자의 지원이 끊어졌다. 그 밖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미국의 개입이었다.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스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트루먼선언’을 내놓았다. 그 이전에 미국은 다른 나라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몬로선언’의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바실리코스 대사는 “트루먼선언의 최초 실험 대상은 그리스였다. 그 뒤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 미국이 소비에트로부터 지원을 차단당한 좌파 게릴라 세력을 성공적으로 제압하게 되자 자신감을 얻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전쟁에 미국이 대대적으로 개입한 것은 트루먼선언의 한반도에 대한 적용이다. 그는 한반도 분단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했다. “당시 그리스도 분단될 상황이었으나 보급로를 차단당한 좌파 세력의 항복으로 분단은 피해갔다.
그러나 한반도의 경우 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했지만 중국과 소련이 맞붙은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좌파를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에 분단으로 이어졌다”고 해석했다. 그의 견해에 근거한다면 미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해 한반도를 완전히 점령할 계획이었다가 중국이 참전하고 미군의 피해가 커지자 38선 이남 방어라는 소극적 전략으로 수정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NGO가 세계의 미래
그와의 대화는 이제 과거를 마무리하고 현재와 미래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수년을 유네스코 대사로 일해오면서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해왔다. 물론 현재의 고민은 이라크전이다. “부시가 도를 지나쳤다”는 비판도 덧붙였다. 이라크 전쟁은 많은 이들에게 인류의 미래를 고민케 하고 있다. 그의 인류사에 대한 고민은 인간의 본능에서 시작한다. “인류는 원래부터 강력한 생존본능을 갖고 있다. 현재 세계가 아주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이유는 ‘생존의 방정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수천만명의 젊은이들이 ‘반전과 반세계화’를 부르짖고 있으므로 지금의 투쟁이 서서히 결실을 맺으면서 새로운 이론과 시스템을 창출해낼 것이다.”
그는 또 “사회주의는 문자 시대의 산물이지만 지금은 이미지 시대, 디지털 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시스템과 가치가 생산되고 있다”며 “비정부기구(NGO)가 세계의 미래를 이끌어갈 힘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금은 아무것도 조직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20~30년 뒤에는 이것들이 조직되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한국 시민사회의 성장에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는 말을 빠뜨리지 말 것을 부탁했다.
아테네=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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