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월동대원들과 보급품·연구장비 싣고 킹조지섬의 세종기지를 가다
▣ 푼타아레나스(칠레)·킹조지섬(남극)=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글 남종영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 fandg@hani.co.kr
12월2일 칠레 푼타아레나스. 남아메리카의 출구이자 남극의 입구인 소도시에 입항한 유주모게올로기야(유주모)호가 분주해졌다. 유주모호는 한국 극지연구소가 20여 일을 빌린 러시아 연구선이다. 남극 킹조지섬 세종과학기지가 한 해를 날 보급품을 실어나르고 박민규 박사팀의 해양조사를 수행하는 임무를 띤 배다.
지난 8월 한국을 출발해 넉 달 동안 태평양을 건너온 보급품 컨테이너 네 박스와 연구장비들이 하나둘 실리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 남극을 바라보고 있는 푼타아레나스의 바람은 셌다. 선적 작업 막바지에 이를 무렵, 세종기지의 한 해 식량이 담긴 냉동 컨테이너가 크레인에 매달린 채 바람에 흔들렸다. 바람과 씨름하길 몇 시간, 밤 9시 유주모호는 뱃고동을 울렸다.
2008년 세종기지가 20돌을 맞는다. 30~40대라면 아련한 추억이 떠오를 것이다. 매년 1월1일이면 방송사들이 ‘생중계’로 세종기지를 연결해 “지금 남극은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아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가. 아이로니컬하게도 세종기지는 군사정권의 수장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엄명’에 따라 세워졌다.
“남북한이 거의 동시에 남극조약에 가입했어요. 한국은 1986년 11월에, 북한은 이듬해 1월에 들었지요. 이때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가능한 한 빨리 기지 건설을 추진하라고 지시한 것이지요. 북한에 져서는 안 되는 시대였거든요.”(장순근 세종기지 제1차 월동대장·극지연구소 박사)
결과적으론 북한이 남극기지를 세우지 않았지만, 어쨌든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중요한 시대라 남극기지 건립은 일사천리로 추진됐다. 1987년 4월23일 답사단이 남셔틀랜드제도 킹조지섬을 답사했고, 내처 여덟 달 뒤인 12월16일엔 기공식이 열렸다. 건설인력 198명은 ‘백야’를 이용해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13시간 일했다. 공사 시작 두 달 만인 이듬해 2월17일, 서울에서 1만7240km, 남극점에서 3100km 떨어진 킹조지섬 바톤반도 해안에 세종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은 남극에 상주기지를 설치한 18번째 나라가 됐다.
“남극으로 이사가는 거죠.”
유주모호가 푼타아레나스를 출발한 지 나흘째, 최영수(34·중장비 담당)씨는 갑판에 서서 다가오는 빙산을 보며 말했다. 최씨는 2008년을 남극에서 보낼 신임 월동대원이다. 제1차 월동대가 1988년을 남극에서 보냈으니, 그는 제21번째인 셈이다.
여운백(37)씨는 이번이 두 번째 남극행이다. 그는 2001년 14차 월동대로 겨울을 난 적이 있다. “중장비를 취급하다가 손가락뼈가 골절됐어요.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8월에 조기 귀국했지요.”
아쉬움이 남은 그는 제21차 월동대 공개모집에 다시 지원했고,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세종기지 발전 장비를 관리하게 됐다. 이들 외에도 김종훈(36·조리장), 유태관(29·해상안전), 박교식(34·중장비)씨도 유주모호에 올랐다. 제21차 월동대 선발대로서 한 해를 날 식량과 기자재를 남극에 무사히 인도하는 게 이들의 첫 임무다. 이들을 이어 12명의 월동대 본진이 1월 중순 합류한다.
△ 2003년 고 전재규 대원의 죽음은 1988년 세종기지가 설치된 뒤 처음 발생한 인명 사고였다. 짙은 안개로 고무보트가 조난당했고, 일행과 떨어진 고 전 대원은 숨진 채로 발견됐다. 제20차 월동대원과 새로 부임한 제21차 월동대원이 고 전 대원의 흉상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이들처럼 세종기지에서 겨울을 나는 대원들을 월동대라고 한다. 1년 동안 세종기지에 상주하면서 기지를 유지·보수한다.
초기만 해도 극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제1차 월동대(1988~89)는 식량 수요를 잘못 예측하는 바람에 다섯 달 만에 먹을거리가 바닥나 급히 추가 보급을 받기도 했다. 1988년 4월에는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의 실사를 받은 적도 있다. “그린피스가 뭐하는 단체인지도 모를 때였죠. 여하튼 온다고 하니 받아줘야 하는 것 같아서 충실히 기지를 안내했습니다.”(장순근 박사) 싱겁게도 그린피스는 ‘기지 주변에 담배꽁초가 많다’고 지적하고 떠났다.
남북의 체제경쟁에 따라 서둘러 건립된 세종기지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일찍이 기지를 건설한 건 잘한 일”이라는 게 이상훈 극지연구소 박사(제20차 월동대장)의 평가다. 20년 동안 기지 관리의 노하우가 쌓였고, 극지 연구의 기반도 마련됐다는 것이다. 이제 세종기지에는 1년을 나는 17명의 월동대원 이외에 여름 기간을 이용해 100여 명 안팎의 연구원들이 드나든다. 한국 과학의 불모지였던 빙하학, 해양생물학, 해저지질학 등의 분야에서 연구성과도 하나둘씩 나온다. 특히나 2003년 고 전재규 대원의 해양 조난사고를 계기로 극지 연구사업이 탄력을 받고 있다. 2010년에는 한국 기술로 건조 중인 쇄빙선 ‘아라온호’가 유주모호를 대신하며, 2011년에는 남극 대륙에 제2기지가 들어선다. 이상훈 박사는 “세종기지가 그동안 남극 대륙의 변방인 킹조지섬에 있는 탓에 효과적인 극지 연구를 하지 못했다”며 “제2기지와 쇄빙선으로 극지 연구가 한 차원 도약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킹조지섬은 남위 62도13분으로 남극 대륙에서 100여km 떨어져 있다).
12월5일 오후 5시 유주모호는 킹조지섬에 닿았다. 바람은 매서운 한기를 일으켰고 해는 밤 12시가 넘어도 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볼 남극은 두 가지 색이다. 바다가 반사하는 푸른색, 눈이 반사하는 하얀색. 2008년은 앞으로 두 가지 색깔로 존재할 것이다. 당장 펭귄들이 기웃거리고, 푸른 빙하가 성큼 다가서 있다.
이제 남극에서의 인생은 시작됐다. 새해에는 더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신입 월동대원 다섯 명의 손이 바빠졌다.
△ 월동대원의 주임무는 세종기지를 유지·관리하는 것이다. 12월7일 오후4시께 파도가 15m에 이르자 세종기지가 소유한 바지선 ‘거북호’의 파손 우려가 있다는 박명희 총무의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세종기지 전체에 전달됐다. 대원들은 선착장에 모여 거북호를 임시 대피시키느라 땀을 쏟았다.
△ 세종기지 본관동의 식당은 모두가 모이는 생활 공간이자 휴식처이다. 텔레비전에는 위성방송 YTN이 실시간 방송되고, 대원들은 노래방 기기로 노래를 부른다.
△ 세종기지가 있는 세종곶 근처에는 가끔씩 해표가 물에 올라와 쉰다. 오랜만에 날씨가 갠 12월9일 오전 웨델 해표 한 마리가 눈밭으로 올라왔다.
△ 펭귄도 세종기지의 오랜 손님이다. 2km 떨어진 펭귄마을에서 산란하는 턱끈펭귄(사진)과 젠투펭귄이 단골손님이다. 매년 9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기지 근처에서 펭귄을 쉽게 볼 수 있다.
△ 유주모호에서의 화물 하역은 세종기지 연중 작업 중 가장 큰 일이다. 세종기지 인력 모두가 밤낮없이 작업에 매달린다. 12월5일 저녁에 시작된 하역 작업은 밤을 새워 진행됐지만, 초속 12m/s가 넘는 강풍이 불어 이튿날 아침 7시에 중단됐다. 바람이 세면 유주모호의 화물을 세종기지가 소유한 조그만 바지선으로 옮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 극지연구소 이주한 연구원이 세종곶 근처를 돌며 지각구조를 탐사하고 있다.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세종기지는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하계 연구원들로 붐빈다.
△ 박명희(맨 왼쪽) 제20차 월동대 총무가 새로 부임한 제21차 월동대원들에게 세종기지 이곳저곳을 소개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종훈(조리장), 최영수(중장비), 유태관(해상안전), 박교식(중장비)씨. 17명의 제21차 월동대 가운데 한 달 먼저 들어온 선발대원들이다.
△ 항공우주연구원 양형모(35)씨가 아리랑 위성 관제소 안테나를 점검하고 있다. 아리랑 위성은 극지를 통과하기 때문에 양씨는 매년 12월 세종기지에 와서 점검과 수리작업을 한다.
△ 12월9일 세종기지 뒷산 설악봉으로 소풍을 간 대원들이 한국의 극지사랑모임 ‘눈사람클럽’을 위해 사진을 찍었다.
△ 세종기지가 자리잡은 바톤반도 마리안 소만은 수심이 앝아 고무보트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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