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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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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인생, 은빛 무대를 적시다

등록 2006-11-23 00:00 수정 2020-05-03 04:24

55살 이상 ‘젊은 노인’들이 만든 ‘실버극단’의 첫 작품 연습현장…연기 초보들 모였지만 즉흥극에 각자의 세상살이 녹여내다 보면 절로 눈물이…

▣ 인천=사진·글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11월8일 인천 남구 학익2동 사무소 행복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연극단원들의 연습이 한창이다.

큰딸이 “아빠, 도대체 왜 그래? 자식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환갑이 넘어서 왜 이러고 다녀? …정신 좀 차리고 식구들 좀 그만 괴롭혀”라고 하자, 술기운이 오른 아버지가 “어, 너, 그래 이 애비 때문에 네가 돈 많이 썼다, 이거야? 그래서 지금 네가 이 아버지한테 유세하는 거냐?… 이 아버지가 우습냐고?” 맞받아치며 대본에도 없는 즉흥 대사를 늘어놓는다.

인천시 내 문화예술인 모임인 학산문화원(인천시 남구)이 운영하는 ‘실버극단’ 배우들. 55살 이상의 희망자를 모집해 극단을 만들었다. 9명의 단원 가운데 학교 연극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3명을 제외하곤 다들 연기가 처음이다.

1시간 남짓한 연극의 제목은 . 젊은 시절 집안의 반대로 헤어진 연인이 30년이 흐른 뒤 만나 다시 사랑하게 되는 내용이다. 지난 14일 오전 11시 남구노인복지회관 공연을 시작으로 19일 오전 11시 일산 고양꽃전시관, 22일 저녁 7시 학산문화원소극장에서 각각 한 번씩 공연한다. 연극 전문가 2명의 지도를 받으며 4개월 동안 주 3회 2~3시간씩 연습했다. 출연자들이 즉석에서 상황을 설정해 대사를 만들고 이 중 좋은 부분만 전문 연출자가 가려내 대본을 만들었다. 대사를 잊을까봐 소품에 살짝 적어놓고 보기도 하고, 중간중간 상황을 잊어버리거나 즉흥 연기가 과해 내용이 꼬이기도 하지만 열정만은 대단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하면 할수록 좋아요. 격렬한 액션에 다양한 동작을 하다 보니 체력도 좋아졌고 많은 대사를 외다 보니 치매도 예방되는 것 같고….” 목재 무역업을 하다 은퇴한 백흥인(67)씨의 말이다. 그는 젊은 시절 헤어진 연인의 환갑잔치에 찾아가 청혼을 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절로 나더라고 했다. 20대 역할을 하느라 빨간 목티에 청바지, 노랑머리에 반짝거리는 비즈가 달린 은색 모자까지 챙겨온 김영희(66)씨는 말한다. “때론 오버 액션도 하고 무대 위에서 망가지기도 하지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아요. 인생 자체가 연극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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