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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3세대, 신나게 춤추다

등록 2004-05-21 00:00 수정 2020-05-03 04:23

대구에서 열린 카자흐스탄 뮤지컬 … 젊은이들의 새로운 춤·노래에 관객 환호

▣ 대구= 글 박영률 기자/한겨레 사회부 ylpak@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공연은 웃음으로 시작해 갈채로 끝났다.

고려인 동포 배우의 어눌한 함경도식 억양에 폭소를 떠뜨렸던 300여 관객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멋진 춤과 흥겨운 노래에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었다. 2004 전국연극제 개막공연으로 초청돼 5월14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막을 올린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단 램프라이트의 뮤지컬 은 점잖은 대구 사람들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깨춤을 들썩이며 환호하게 만들었다.

고려극단 배우들의 재기발랄한 연기와, 함께한 카자흐스탄 토데스 무용단의 현대적 몸짓, 우리 노래와 러시아 노래가 어우러진 이 공연에서는 한국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는 고려인 3세대의 발랄함이 여지없이 배어났다.

램프라이트 대표 최타치아나(45)의 부모는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연해주로 이주했다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다시 우즈베키스탄에 와 최씨를 낳았다. 최씨는 고교를 졸업한 1977년, 아버지 농장에 품일을 하러 온 고려극장 배우 아주머니를 따라 알마타로 가 국립 고려극장 배우가 됐다.

1932년 연해주에서 만들어진 국립 고려인 극장은 1937년 강제 이주된 한인들을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본거지를 옮겨 척박한 중앙아시아 땅에서 살아가는 고려인의 애환과 향수를 달래왔다. 하지만 1991년 카자흐스탄 독립 이후 경제적 곤란이 심해지고 배우들의 노령화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최씨를 비롯한 젊은 단원들이 독립해 램프라이트를 만들었다. 남녀 단원 5명의 미니 극단이지만 지난해 카자흐스탄에서 공연한 첫 작품 에 이어 두 번째 작품 모두 좋은 반응을 얻었다.

최씨는 “ 등 전통극이나 강제이주의 애환을 담은 연극만으로는 더 이상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지만, 고려인 극장 안에서 다른 시도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램프라이트의 청일점 배우 채유리(31)는 고려인 3세로 타슈켄트 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민족차별이 점점 심해지는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지난 1996년 카자흐스탄으로 왔다. 1998년부터 고려극장에 몸담았다가 지난해 최씨와 함께 독립했다. 채씨는 “부모세대를 존중하지만 세계의 흐름과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이야기가 간절히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들이 이날 공연한 은 잘 알려진 한국 뮤지컬 를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을 완전히 뜯어고쳐 두 자매와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로 새롭게 꾸몄으며, 곡도 러시아에서 새로 작곡했다.

특히 고려인 3세인 김레나(33)씨가 설립자이자 단장으로 있는 토데스 무용단 단원 6명이 뮤지컬에 가세해 더 화려하고 열정적인 무대가 됐다. 토데스 무용단은 같은 이름의 모스크바 유명 무용단의 카자흐스탄 지부 격으로 설립 2년 만에 고려인 60여명을 비롯해 90여명의 남녀 단원이 있는 카자흐스탄의 대표적 무용단이 되었다. 고려극장 아리랑 무용단원으로 10여년 동안 한국무용을 해온 단장 김씨는 처음부터 현대무용을 하고픈 열망이 있었지만, 카자흐스탄에는 몸담을 만한 현대무용단이 없었다.

김씨는 결국 지난 2001년 모스크바 토데스 무용단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고 안무자를 카자흐스탄으로 초빙, 그 이듬해 카자흐스탄 토데스 무용단을 만들었다. 김씨는 “무언가를 열망하고 노력하면 결국 이루어지더라”면서 “앞으로 무용단이 확고히 자리잡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고려인은 모두 11만명, 최씨 등은 한국의 발전상 때문인지 옛 소련 시절보다 오히려 요즘 고려인 젊은이들에게서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관심이 더 높다고 입을 모았다. 학교에서 선택하는 제2외국어도 대부분 모국어인 한국어를 선택한다고 한다.

램프라이트 대표 최씨는 “하지만 문화가 없이는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면서 “일단 대중화와 세대교체에 성공한다면, 그때 가서 새롭게 해석한 등을 다시 무대에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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