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와 어린이 문학가, 우리말 운동가로서 큰 가르침 주고 떠난 고 이오덕 선생을 말한다
지난 8월25일 이오덕 선생께서 일흔여덟을 일기로 타계했다. ‘선생’이란 말을 붙여 쓸 만한 어른이 드문데, 선생한텐 이 말이 썩 자연스럽다. 이 선생에겐 이 말말고도 교사, 교육사상가, 어린이 문학가, 우리말 운동가, 수필가, 비평가… 등 지칭이 여럿이다.
참교육 겨레운동에 앞장

선생은 1944년 봄 처음 교사로 경북 청송에서도 두메인 부동국민학교로 부임한 뒤 일년 반 만에 해방을 맞는다. 열아홉에 교단에 서서 일제 “황민화 교육을 하기에 정신을 잃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해방 되고서도 일본 잔재를 씻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이란 글이 있다. “모두 일본 사람같이 성씨를 갈아버렸을 때 끝내 갈지 않던 이성도(李聖道)란 아이가 있어, 그렇게 고루한 가정의 아이 같고 촌스럽게 내 눈에 비쳤던” 자신의 무지함과 일제 꼭두각시 노름의 기막힘을 한탄한다.
식민지 시대에 교사 노릇을 한 것을 크게 반성하는 데서 선생의 교육관이나 문학관, 언어관이 출발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고백이다.
선생은 43년 동안(1944∼86)을 주로 경북 청송·의성·안동·영주 등 두메를 돌면서 평교사에서 교감, 교장을 두루 거친다. 그러면서도 “5공 정권이 하도 시끄럽고 못살게 굴어서” 86년 정년을 5년 가까이 남기고 교단을 그만두기까지 쉴 새 없는 반성으로 어린이 교육에 임한다. 선생을 교육사상가로 일컫는 까닭은 처음 마음을 끝까지 가져가면서 실천하는 자세에서 나타난다. 저서 (청년사·1977), (한길사·1978), (지식산업사·1986)를 보면 그가 얼마나 잘못된 교육풍토를 바로잡으려 고민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87년의 전국교사협의회,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설립 운동, 교육·학교 민주화 운동 등 현장에서 벌어진 민주교육 운동에서 그가 끼친 직·간접적인 영향들도 빠뜨릴 수 없다.
선생이 90년에 낸 (한길사)은 그의 교육철학을 뭉뚱그린 책이다. 참교육의 고갱이는 한마디로 ‘겨레교육’이다. 이는 ‘도덕·노동·표현 교육의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도덕 교육’은 겨레 교육을 일으켜 세우는 기둥이며, ‘삶’(일하기)과 ‘표현’을 통한 교육은 식민지 교육을 맑히고 민주·민족·인간됨의 참교육을 실천하는 데 가장 효과 있는 방법임을 강조한다.
“참교육이 되려면 아이들이 즐겁게 일(놀이)을 하도록 해야 하고, 이런 삶의 교육을 하는 선생님들도 아이들과 같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교사의 본바탕은 ‘일하는 사람’이라 해야 옳다.”
교과서로 단편적인 지식만 외우게 하는 게 교육의 전부인 병폐를 꼬집으면서, 교직원 노조를 반대하는 이들이 들추는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 교육자’라는 말을 반박하면서 한 말이다. 다만, 교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덧붙인다.
1·2권은 62∼72년 사이의 교단생활 일기를 묶은 것인데, 여기서 그가 교사로서 임했던 고민들을 엿볼 수 있다. “아이들을 믿어야 그들을 살리는 교육을 할 수 있으며, 세상과 남을 위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 되는 사람, 창조적으로 사는 사람,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을 기를 수 있다.”
도시화 병폐가 깊어지고, 정보·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선생의 일깨움은 더욱 절실히 적용될 듯싶다.
‘어린이 말꽃’을 피우다
선생은 55년 동시 ‘진달래’(소년세계)를 발표하고, 71년 와 에 각각 동화와 수필이 당선되어 ‘말꽃’을 하는 일을 겸한다.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김수업 교수 말을 빌리면 ‘어린이 말꽃’(아동문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지러진 초가집들이 깔려 있는 골짝이면/ 나무꾼들의 슬픈 산타령이 울리는 고개면/ 너는 어디든지 피어 있었다.// 진달래야!/ 그리도 이 땅이 좋더냐?/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헐벗은 이 땅이/ 그리도 좋더냐?(중간 줄임) 진달래야./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차라리 시들어지는/ 너무나 순진한 어린이 같은 꽃아!/ 내 마음속 환히 피어 있거라./ 영원히 붉게 붉게 피어 있거라.”(‘진달래’에서) 사람과 가깝긴 하지만 자연의 한 부분인 ‘진달래’에 마음을 실은 30대 안팎의 노래다.

그가 오십 고개에 쓴 것으로 보이는 ‘씨앗을 뿌리며’도 꾸민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깨어나라, 너희들을 두꺼운 벽 속에 가둔/ 그 어둔 계절을 쫓아버릴 때는 왔다./ 포근한 어머니의 품속에서 눈뜨는 병아리같이/ 너희들은 마지막 눈부신 꿈의 설계를/ 어머니의 가슴 따스한 땅에 안겨 완성하고/ 그 두꺼운 문을 열어젖히고 환한 세상으로/ 소리쳐 나오너라./ 너희들을 기다려 해님은 그 먼 나라에서/ 따스한 입김을 보내 주고/ 별들은 빛나는 이슬을 마련하여/ 밤마다 기다리고 있단다./ 저기 하늘엔 잔잔한 빗방울을 안은/ 구름이 지나가고/ 언덕마다 산기슭마다 날개를 펴고 서성거리는/ 바람은 너희들의 어깨를 만져 줄 날을/ 생각하고 있단다.”(이하 줄임)
선생은 동시·동화 창작을 하는 한편, 말·글을 통한 어린이 교육 방식을 주목한다. 그런 끝에 부닥친 것이 당시(50∼70년대) 삶을 떠나 노닥거리기나 하는 어린이 문학의 풍토였다.
“모두 꽃이나 무지개를 노래하고 왕자와 공주를 꿈꾸며, 힘들게 일하는 농민이나 노동자들을 부끄러워하고, …어린이 문학이란 이름으로 독재권력의 부정과 부패를 옹호하고 변론하며 설교를 늘어놓는 교훈적인 작품들”로는 어린이들을 감동하게 하거나 제대로 된 문학으로 자리잡지 못한다는 게 선생이 내세우는 주지다. ‘어린이의 세계와 삶 속’에 들어가서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77년 으로 묶이어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이후 어린이문학협의회, 한국글쓰기연구회들이 생겨나 이 땅 어린이 문학계뿐만 아니라 교단·문단 전체에 공부하며 글 쓰는 풍토를 일궈낸다.

선생은 직접 창작도 많이 했지만, 어린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정직한 글을 쓰게 하여 이를 모아 어린이 시집과 얘기책을 많이 엮은 공적 또한 남다르다. 들이 그것인데, 두루 선생이 재직했을 때 가르친 어린 제자들의 글이다.
“우리말을 바로잡아라”
선생의 교육철학은 결국 ‘자주적인 겨레교육’, 곧 나라의 임자가 되는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 있다. 식민지 시절의 반성과 그것이 청산되지 않은 현실을 바로잡고 세우기인 것이다. 자신을 제 말로 나타내기를 꺼리고 어려워한다면, 그것처럼 큰일이 없다. 문학도 교육도 학문도 나라 발전도 이를 떠나서는 이뤄질 리 없는 까닭이다.
선생은 86년 퇴임 뒤 우리말글 바로쓰기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인다. 이는 가 창간된 다음해인 89년 한길사에서 나온 에서 구체화한다. 바로잡아야 할 많은 보깃글을 에서 들춰낸다. 글자만 한글 전용일 뿐 문장이나 쓰는 말들은 여전히 한자말·일본말·영어 ‘때’를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 책은 언론·방송·출판·학계에 두루 경종을 울린다. 그동안 ‘한국글쓰기연구회’ 등을 통해서도 기성인들의 문장개혁운동을 벌였고, 98년에는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을 묶어 오늘에 이른다. 이 모임은 두어달에 한번씩 이란 책을 내는데, 현재 김경희·이대로·김수업·김정섭님이 공동대표로 있다. 선생은 예순에 퇴임한 뒤 18년 동안의 무게가 그 앞의 삶과 균형을 이룬다. 교사·문필가·우리말 운동가란 세 갈래가 한 가닥으로 모여서 마침내 겨레 스승의 자리에 올랐다.
최인호/ 한겨레 교열부장 golja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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