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로맨스소설을 탐독하고 싶은 사람이었다면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10월9일 수요일, KBS2 채널에서는 수목드라마 이 끝나고 곧바로 한 편의 드라마를 내보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검사 석현(홍경인)은 영광파의 막내 형주(황찬성)를 조건 없이 풀어주며 그의 앞날을 예견한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형주는 고교 시절 촉망받는 유도 선수였는데, 돌이킬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려 조직폭력배가 되었다. 좋아하던 선생님을 희롱한 아이들과 싸움이 붙었는데 치고받는 사이 상대편 학생이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쳐 죽었다. 소설가 이현(채정안)과 남편 석현은 겉보기에 완벽한 부부다. 하지만 석현은 아내에 대한 집착과 의심, 폭력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남자다. 몸도 마음도 상처가 가라앉을 날이 없는 이현은 자신을 위로하는 방편으로 늘 로맨스소설만 쓴다. 석현에게 집요하게 쫓기던 영광파는 의처증이 있는 석현의 약점을 잡기 위해 부부를 미행한다. 그러던 중 형주는 이현이 자신이 고등학교 때 짝사랑했던 국어 교사였음을 알아보고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결국 시나리오는 석현이 그린 대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단막극 ‘당신의 누아르’는 KBS 가을 멜로 특집 중 1편이다.
경쟁력의 돌파구를 찾아서드라마 단막극이 돌아왔다. 케이블 드라마가 입지를 다지고 종합편성채널(종편) 드라마까지 가세하면서 시청률을 나눠가져야 했던 공중파 드라마는 과거의 위상을 잃었다. 예컨대 (tvN)처럼 미스터리·추리 등 장르물에 강한 케이블 드라마들이 신선한 소재로 마니아층을 형성한다면, 김수현 작가의 (JTBC)를 비롯한 종편 드라마는 공중파에서 활약하던 작가와 제작진을 흡수해 초반부터 작품성과 흥행성을 갖춘 드라마를 내놓았다. 공중파에 비해 소재나 수위에 제한이 없는 케이블 채널들의 거침없는 행보에 공중파 드라마는 약해진 경쟁력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방송 3사가 합의하듯 내놓은 대안은 단막극의 부활이다.
KBS는 이라는 제목으로 2010년부터 매월 5~6월에 시작해 연말까지 단막극을 내보냈다. 지난 6월에는 으로 개비해 방송 시간을 일요일 밤에서 황금시간대인 수요일 밤 11시로 옮겼다. 첫 작품인 은 등을 연출한 이정섭 PD와 2012년 KBS 극본 공모 당선자인 채승대 작가가 힘을 합쳐 만들었다. 7월에는 방학을 맞아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를 드라마로 제작해 고등학생들의 성장기 4부작을 내보내는가 하면, 충무로의 블루칩( 한예리, 정은채 등)이나 개성이 뚜렷한 배우( 예지원, <happy> 정웅인) 등을 적절히 영입해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선보였다.
MBC도 짧은 호흡의 드라마를 내놓았다. 지난 10월2일 백일섭 등 베테랑 연기자들이 참여한 으로 단막극 시리즈 의 첫 문을 열었다. 올해 총 10부작이 예고된 은 1991년부터 2007년까지 총 664회 방영된 의 명맥을 잇는다. MBC는 이후 으로 2010년 9~10월 총 5편의 단막극을 방영하면서 단막극 부활을 예고하는 듯했지만 단막극 시리즈는 오랫동안 편성표에 포함되지 못했다. SBS는 2004년 종영한 이후로 10년 만에 단막극을 부활시킬 예정이다. 내년 3개월간 단막극 편성을 목표로 지난 7월에는 2부작 드라마 극본 공모 공고도 냈다.
사극 단편물, 눈에 띄네
드라마 단막극은 일상을 예리하게 파고들거나 삶의 단면을 잔잔하게 보여주는 현대물이 주를 이뤘지만, 올 시즌에는 사극 단편물의 등장이 눈에 띈다. MBC는 에 이어 2부작 을 방영했다. 은 조선 성종 때를 배경으로 차별 없는 새 세상을 꿈꾸는 세력과 서얼 출신의 한성부 관리 준경(강하늘)이 얽히며 만들어지는 이야기다. 모양은 사극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사람들의 열망을 활용해 권세를 가지려는 자의 욕망,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비뚤어진 방식을 택하는 왜곡된 이상주의자, 혁명을 도모한다는 미명하에 유린되는 인권, 그리고 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정의로운 인물들이 각각 창원군(진태현), 유광헌(손병호), 불온파, 준경 등의 이름으로 엮여 있다. KBS 또한 10월23일 사극 ‘마귀’를 방영할 예정이다.
MBC 의 김진민 CP는 10월1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드림센터에서 있었던 제작발표회에서 “(경제적인 면을 추구하기보다는) 좋은 배우, 작가, 감독을 발굴하고자 하는 작지만 제일 큰 목표를 위해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정통으로의 회귀는 가장 미래적인 방식일지도 모른다. 짧고 압축적인 단막극은 최근 이용자가 늘고 있는 모바일 드라마의 짧은 방영 시간, 적은 시리즈 회차 등의 특징과 일부 겹치기도 한다. 가장 오래되고 기본적인 방식으로 돌아와 승부수를 던진 공중파 단막극의 내일은 어떻게 전개될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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