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의 현대사를 헤쳐온 정연주 논설주간이 들려주는 한반도 그리고 미국 이야기

언론인 정연주는 1970년 12월 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할 때 선배들로부터 왜 지금같은 암흑기에 기자가 되려느냐는 물음을 받았다. 그는 그 이유를 32년이 지난 지금 책을 통해 고백한다.
‘정연주의 워싱턴 비망록1’이라는 부제가 달린 은 “개인의 삶을 헤아리기엔 역사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세대”에 속한 한 개인의 삶을 그린 자서전이다. 동시에 그의 57살의 삶과 뒤엉킨 현대사를 기록한 역사서다. 의 서문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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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밤낮으로 비가 내리고, 온 세상은 짙은 암흑에 묻혀 있었다. 노아는 그 암흑의 세상이 끝났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비둘기 한 마리를 방주 밖으로 내보냈다. 얼마 뒤 비둘기는 나뭇가지를 물고 방주로 돌아왔다. 노아는 비둘기가 물고 온 나뭇가지를 보고 암흑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게 되었다. 노아에게 나뭇가지를 물어다 준 한 마리 비둘기는 암흑으로 뒤덮인 노아 시대에 진실을 알려준 언론이었다.”
굳센 기개 이면의 떨림과 고통들

한 마리 비둘기가 되려는 꿈을 꿨으나 그는 희망의 나뭇가지를 물어 나를 수 없었다. 유신반대를 외치는 어떠한 목소리도 신문지면에 담기지 않았다. 72년 “기적처럼” 서울대생들의 유신반대 집회가 열렸다. 현장에 달려간 그는 “개와 기자는 접근금지”라는 팻말을 먼저 만난다. “마침내 개가 돼버린” 그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유신독재에 대한 분노로 몸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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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운동을 계기로 기자 정연주의 삶은 일거에 뒤바뀐다. △편집권에 대한 외부 간섭의 배제 △기관원 출입 금지 △언론인 불법연행 거부를 내건 이 운동의 뜨거운 감격도 잠깐이었다. 75년 3월17일 새벽 14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그는 길거리로 내몰린다. 그로부터 13년 동안 그는 기사를 쓰지 못했다.
큰아이는 길거리에 내몰린 지 닷새 뒤 태어났다. 영어 번역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며 편집장을 하던 그는 78년 말 둘째가 갓 돌을 넘겼을 때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감옥에 갇힌다. 제도언론이 일절 보도하지 않은 학생 시위, 노동·농민 운동, 재야 움직임 들을 모아 일지형식으로 기록한 6쪽짜리 유인물을 만든 게 화근이었다. 일명 ‘동아투위 민주인권일지 사건’이다.
‘까막소’에서 그는 구체적인 ‘민중’을 만난다. 흉악범죄를 저지른, 돈 없고 백 없고 배운 것 없는 ‘개털’ 죄수들이다. 그런 이들의 어깨에도 70년대 말 ‘스산한 역사’는 얹혀 있었다. 그는 책의 상당부분을 그가 만난 개털들의 얘기로 채워넣었다. 그는 박정희 사망소식을 감옥 안에서 사흘 늦게 접한다. 세상이 금방 뒤집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제자리였다. 풀려난 지 열흘 뒤 그는 12·12 쿠데타를 접한다.
80년 서울의 봄, 계엄 아래서 그를 비롯한 해직기자들은 길고 긴 수배생활에 들어간다. 그의 얼굴은 40여명의 수배자 명단에 올라 전국 곳곳에 뿌려진다. 감옥에서 만난 민주교도관 전병용씨를 비록해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그는 용케 잡히지 않고 버텼다. 대신 아내와 칠순 아버지가 끌려가 감금 고문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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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원들이 물샐 틈 없이 집주위를 지키고 있어 칠순 아버지를 목욕탕 한증막 속에서 딱 한 차례 가까스로 ‘접선’했다. 막내아들 걱정에 눈물바람을 하던 어머니는 먼 발치에서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한 차례 보았다. 그것이 부모와의 마지막 만남일 줄은 몰랐다.
정보기관에서 그를 그토록 쫓은 까닭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시킬 목적이었다. 81년 2월 말 계엄령이 해제되며 그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듬해 유학준비를 하던 그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도피 중인 막내아들 얼굴도 못 보고 미국 큰아들네로 초청받아 떠난 부모님이 열흘 간격으로 숨을 거둔 것이다. “가슴을 칼로 에는 듯한 고통과 한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역사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
“역사의 잿빛 벌판”에서 30대를 바친 그는 82년 11월 서른일곱의 나이에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렇게 떠난 발길이 18년 세월이 됐다. 주경야독하며 경제학 박사학위를 딸 즈음 그는 서울에 있는 선배에게서 믿기지 않는 전화 한통을 받는다. “서울로 나올 수 있겠어” 국민주 신문이 창간되니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었다. 88년 창간과 함께 그는 손에 다시 펜을 쥘 수 있게 됐다. 통신원으로 그가 쓴 첫 기사는 미국 대통령선거 전에 대한 기사였다. 13년 만의 첫 기사를 쓰기 위해 그는 꼬박 하루를 바쳤다. 펜은 녹슬었지만 그는 내내 행복했다.
그의 미국 바로 알리기는 지속된다
89년 워싱턴 특파원이 돼 언론현장에 돌아온 뒤 11년의 세월을 그는 “미국의 심장부”에서 보내며 “미국의 뿌리와 실상을, 그리고 미국의 정치·경제·사회가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아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책의 제4부는 본격적인 미국 해부의 내용들이다. 미국에서 수십 보따리의 자료를 챙겨온 그는 이 책을 시작으로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실타래처럼 풀어놓을 작정이다.
워싱턴 특파원 생활을 포함해 언론현장에서 보낸 시간은 냉철한 이성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겁 많고 나약했다”고 고백하듯 결단의 순간마다 그를 따라다닌 ‘떨림’과 ‘설렘’은 지금껏 그를 움직인 동력이 눈물 같은 감성의 힘임을 증언한다. 논설주간으로 있는 그는 한국의 언론현실과 남북관계, 미국문제 등에 관해 써온 글들을 추려 모아 를 이번에 함께 펴냈다. 칼같이 벼려낸 감성의 힘을 맛볼 수 있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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