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2" color="663300">왜 기업들은 막대한 현금보유액에도 설비투자 안하나…외국자본의 적대적 M&A와 고배당 요구에 밀려 </font>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를 떠받쳐온 두 축은 민간소비와 수출이었다. 은행에서 저금리로 돈을 빌려 집을 산 가계는, 비록 미실현 이익이지만 부동산값이 상승한 만큼 소비지출을 늘렸다. 장래의 소득을 앞당겨 쓰는 신용카드 사용액 급증도 민간소비 증가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350만명의 신용불량자를 낳은 신용카드 대란 이후 가계 소비심리 위축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고, 지난 ‘10·29 부동산값 안정대책’ 이후 집값이 떨어지면 가계 소비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수출이야 아직 그런 대로 실적이 좋은 편이지만, 오르락내리락하는 환율에 좌우되는 수출만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 경제를 이끌어갈 동력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바로 기업의 설비투자다.
주요대기업 현금보유액 73.5% 증가
기업의 설비투자는 고용창출 및 경제성장의 관건으로, 투자 부진은 경제성장 둔화로 이어져 국민 생활수준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업의 설비투자 규모는 외환위기 이후 뚝 떨어진 채 바닥을 기고 있다. 제조업의 설비투자 규모는 1997년 43조원에 달했으나 2000년 이후에는 90년대 초반 수준인 20조원대로 떨어졌다. 특히 올 들어 설비투자 증가율은 1분기 1.6%, 2분기 0.8%로 경제성장률(1·2분기 각각 3.7%, 1.9%)을 밑돌면서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설비투자의 국내총생산(GDP) 기여율도 지난해 12.4%에서 올 1분기 5.6%로 대폭 감소한 뒤 2분기에는 오히려 -5.5%로 떨어졌다. 이런 설비투자 부진은 성장잠재력 저하로 이어지는데 우리 경제의 생산능력증가율은 2001년 7.4%, 2002년 3.2%, 올 2분기 2.2%로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대기업의 경우, 현금이 없어서 또는 투자에 동원할 자금을 은행에서 차입하기 어려워서 투자를 못하고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은행이 분석한 2002년 제조업체(총자산 70억원 이상 업체) 현금 흐름을 보면 영업활동에 따른 현금수입액은 업체당 평균 126억원으로 1997년(34억원)에 견줘 4배 가까이 대폭 늘었다. 반면 설비투자 활동으로 인한 현금지출액은 97년 146억원에서 지난해 73억원으로 절반가량 줄었다. 벌어들인 현금이 금고에 가득 쌓이고 있지만 정작 투자는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유형자산에 대한 투자지출은 업체당 평균 48억원으로 94∼97년 평균(106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비록 과잉·중복 투자 해소를 위한 것이지만 외환위기 이후 연평균 유형자산 매각액은 15억3천만원으로 외환위기 이전(8억8천만원)보다 훨씬 늘었다. 기업이 설비투자는커녕 오히려 자산을 팔아 현금화하는 이른바 ‘탈투자’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사실 대기업들은 지난해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올린 이후 돈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고 있다. 제조업체의 투자안정성비율(투자안정성비율 100%는 외부 자금 의존 없이 영업에서 벌어들인 이익만으로 공장·설비 등 유형자산 투자를 실행할 수 있다는 뜻)은 97년 33.0%에서 2002년 무려 264.0%로 늘었다. 쉽게 말해 투자 여력이 충분한데도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기업의 막대한 현금보유액에서 한눈에 나타난다. 우리나라 제조업체의 현금보유액은 외환위기 이후 30조원대를 유지하다가 지난해 46조원으로 대폭 증가했다. 현금보유 비중(현금/총자산) 역시 99년 5.3%에서 지난해 말 7.9%로 크게 증가했다. 은행의 기업예금 잔액도 91∼97년까지 통틀어 19조원 증가하는 데 그쳤으나 97∼2000년에는 무려 80조원이나 증가했다. 기업의 여윳돈이 성장을 위한 설비 확충으로 흘러가지 않고 은행권을 맴돌면서 이자 따먹는 데 쓰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요 대기업(제조업 13개 업체)의 지난해 말 현금보유액은 11조8천억원으로 2001년 말(6조8천억원)보다 73.5% 증가했다. 각 기업의 감사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12월 현재 삼성전자의 현금성 자산(현금 및 현금등가물+단기금융상품+유가증권)은 7조3천억원, 포스코 1조1천억원, 현대자동차 4조2천억원, 기아자동차 1조5천억원에 달한다. 30대 대규모 기업집단이 우리나라 전체 투자의 78%를 차지하는데, 이런 대기업들이 엄청난 규모의 현금을 단기 금융상품에 넣어둔 채 틀어쥐고 있는 것이다.
자본자유화와 투자부진의 만남
기업들은 “미래 경영환경이 불투명하고 마땅한 투자처가 없기 때문에” 투자를 미루고 현금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재벌기업들까지 쓰러지면서 빌려준 돈을 떼인 은행들이 이제는 자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며 “그래서 기업마다 투자를 축소·연기하고 대신 현금보유액을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이 돈 빌려주기를 꺼리는 상황에서 급히 돈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 기업의 저축인 내부유보 자금을 많이 쌓아둘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물론 기업이 ‘적정 수준’의 현금은 갖고 있어야 하고, 현금보유 비율 증가는 그만큼 기업들의 현금 흐름과 수익성이 좋아졌음을 뜻한다. 그러나 리스크를 감수하는 ‘기업가 정신’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기업들이 막대한 현금보유액을 설비투자나 연구개발(R&D)에 쓰지 않고 유휴자산으로 놀리는 한 우리 경제는 활력을 되찾기 어렵다. 한국은행 김태석 기업통계팀장은 “현금보유 확대는 안정적인 기업활동을 위해 불가피하지만 투자 부진이 장기화되면 미래 성장잠재력이 저하된다”며 “대기업마다 과거에 경기가 아주 안 좋을 때 갖고 있던 현금보다 훨씬 더 많은 ‘과다한’ 현금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8월 세제개편을 통해 임시투자세액공제를 대폭 확대하는 등 그동안 투자심리를 부추기기 위한 온갖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투자할 테니 규제를 풀어달라”며 투자를 무기로 압박하는 재계의 요구를 수용해 세금을 깎아주는 등 기업 부담을 덜어줬는데도 투자는 여전히 살아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현금은 넘쳐나는 판인데, 왜 그럴까 외환위기 이후 시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겉으로야 ‘미래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현금보유액 급증과 투자 부진의 대표적인 이유로 꼽히지만 그 뒤편에는 외환위기 이후 급속히 진행된 ‘자본 자유화’라는 또 다른 이유가 숨어 있다. 자본 자유화와 투자 부진이 서로 맞물려 있다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자본시장 자유화 이후 국내 기업마다 주식시장에서 (특히 외국인 투자자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 및 고배당 요구로 몸살을 앓고 있다. 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고 했던가.
경영권 방어 위해 돈 쌓아둬야
우선 적대적 M&A 위협부터 보자. 외국인의 국내 우량주식 보유비율은 대부분 50%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대주주 지분이 적은 기업마다 경영권 위협에 노출돼 있다. 실제로 주식시장에서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지분매입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적대적 M&A를 둘러싼 ‘흑기사’ 세력의 출현이니 ‘백기사’의 등장이니 하는 말이 판치고 있다. 물론 외국 투자자본은 “지분매집이 경영권 장악이 아닌 투자 목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지난 4월 영국계 소버린자산운용의 갑작스런 SK(주) 경영권 장악 위협 이후 대기업마다 경영권 방어에 비상이 걸렸다. 전경련 이상호 조사역은 “SK(주) 사태 이후 대기업들이 경영권 방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며 “기업마다 현금 유동성을 늘리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개발경제학)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자본시장 중심으로 바뀌고 주주 자본주의 원리가 절대화되고 있다”며 “적대적 M&A에 노출된 기업마다 단기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사주 매입 및 막대한 현금보유에 치중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장기적인 기술·설비 투자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외국 자본의 기업사냥에 대비하기 위해 영업이익 중 상당 부분을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단기 기업예금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장기 설비투자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요즘 현대 패밀리 내부에서 한창 경영권 다툼이 일고 있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적대적 M&A 논란은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사망 직후 GMO이머징마켓펀드를 포함한 외국인이 지분을 11% 이상 사들이면서 시작됐다. 또, 지난 8월 말 3%이던 지분을 최근 5.2%까지 끌어올린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잇단 지분매입도 경영권 방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차 지분 10.5%를 갖고 있는 다임러크라이슬러와의 지분경쟁 때문이라는 것이다. 설비투자에 써야 할 엄청난 자금을 쓸데없이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자금으로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 기업끼리의 적대적 M&A 위협 때문에 현금을 쏟아붓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달 복수케이블TV방송사업자인 한빛아이앤비는 동종 업체인 큐릭스와 적대적 M&A 전쟁을 치르면서 경영권 방어를 위해 수백억원을 퍼부어야 했다. LG경제연구원 박상수 연구원은 “자본 자유화 이후 외국 투자자들의 실체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서 기업마다 더욱 경영권 방어에 비상이 걸렸다”며 “일부 국내 기업은 다른 기업을 적대적 M&A하는 데 써먹기 위해 현금보유 규모를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계 주주들의 배당요구 거세다”
한국 주식시장을 점령한 외국인 주주들의 고배당 요구도 설비투자 부진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 기업환경이 바뀌어 주가가 기업 이미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주주들의 과도한 현금배당 요구를 들어주려면 순이익 중 상당 부분을 현금으로 쌓아둬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결산 상장법인들의 배당금 총액은 사상 최대인 5조8천억원에 달했다. 상장법인의 배당금 총액은 2000년(3조9천억원), 2001년(3조8천억원)에 이어 큰 폭으로 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현금배당으로 가져간 돈은 2조1천억원인데, 2001년(1조2천억원)에 비해 두배 가까이 늘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마다 주주가치 극대화를 추구하는 등 기업경영이 온통 주주 중심으로 바뀌면서 상장법인들의 배당성향(주주 배당금 총액을 당기순이익으로 나눈 것)도 2000년 20.10%, 2001년 21.58%, 2002년 19.12% 등 20%대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순이익의 20% 정도를 주주한테 배당금으로 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 8월6일 현재 기업의 평균 배당수익률(주가에 대한 배당금 비율)은 5.16%로 국고채 금리(4.65%)보다 훨씬 높은 수익률을 보였고 있다. 주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리스크가 큰 주식에서 채권보다 더 높은 ‘안정적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시설·설비 투자액 대비 주주배당금은 98년 3.7%, 2000년 6.6%에서 2002년 22.4%로 대폭 늘었다. 그만큼 기업의 설비투자가 줄어든 대신 현금배당 규모가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은 배당투자를 노려 11월, 12월에 배당 실시 기업의 주식을 대량으로 미리 사들이고 있다. 증권거래소 관계자는 “외국 투자자들이 막대한 지분율과 응집력을 배경으로 주주총회에서 국내 기업한테 고배당을 달라고 압박하고 있다”며 “특히 미국계 주주들의 배당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고 말했다. 현금배당 규모가 늘수록 자연히 대규모 투자는 더 어려워진다. 적대적 M&A에 대비하랴, 외국인 주주들의 고배당 요구를 들어주랴 국내 기업마다 투자는 엄두도 못 낸 채 막대한 현금을 싸안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투자 부진으로 일자리가 창출되지 못하면 실업이 증가하고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떨어진다는 점에서 설비투자는 기업 내부에 국한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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