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10월13일 프랑스 파리에서 교육환경 개선을 촉구하는 ‘전국 시위의 날’을 맞아 고등학생들이 ‘앙리 4세 고등학교’ 입구를 막은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심각한 교사 부족, 과밀 학급, 지원 부족, 열악한 학습 환경을 지적하며 교육예산 증액을 요구했다. EPA 연합뉴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 ‘빅쇼트’는 마크 트웨인의 말로 알려진 경구로 시작한다. “곤경에 빠지는 것은 무언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무언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금융위기는 종종 ‘이번엔 다르다’는 확신 속에서 잉태됐다. 2008년에는 ‘집값은 전국적으로 동시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과도한 부채를 안고도 세계경제가 금리 상승을 견뎌낼 수 있다고 너무 쉽게 믿는 것은 아닐까.
2026년 10월7일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연차총회를 앞둔 연설에서 세계 공공부채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수준에 근접했으며 2030년 이전에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00%를 넘어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IMF 재정모니터에 따르면 2025년 세계 공공부채는 GDP의 94%에 이르렀고, 정부 이자 지급액은 4년 만에 세계 GDP의 2%에서 3% 가까이 늘었다. 총재는 특히 선진국의 부채 위험을 경고하며, 금리가 성장률보다 낮아 성장만으로 부채비율을 낮출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났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공공부채는 GDP의 125%를 넘어섰고 일본은 230%대다. 프랑스는 공공부채가 GDP의 120%에 육박한 가운데 2027년 예산안 발표 직후 10년물 국채금리가 2002년 이후 처음으로 5%에 근접했다. 독일 국채와의 스프레드(금리 격차)도 유로존 재정위기 이후 최대인 1.5%포인트까지 벌어졌다. 긴축에 반발하는 시위에 고등학생들까지 가세하고 신용등급마저 하향 조정되면서 프랑스는 이탈리아보다 높은 국채금리를 부담하게 되었다. 재정 악화와 정치 불안이 서로를 증폭시키는 양상이다. 높아진 금리는 이자 부담과 긴축 압력을 키우고, 긴축은 다시 정치적 반발을 부를 수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부채 누증과 금리 상승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중동전쟁발 에너지 충격으로 물가 상승 압력이 높아지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9월 3년 만에 금리를 올렸고, 한국은행과 유럽중앙은행, 일본은행도 긴축 방향으로 대응하고 있다. 미국과 독일, 일본의 10년물 국채금리는 각각 2007년, 2009년, 1996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과거에도 미국의 통화 긴축은 금융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였다. 1979년 폴 볼커 연준 의장의 급격한 금리 인상 이후 1980년대 저축대부조합(S&L) 위기가 불거졌고, 1982년 멕시코에서 시작된 중남미 외채위기가 발생했다. 1994년 금리 인상기에는 그해 말 멕시코 ‘테킬라 위기’가 일어났고, 이후 달러 강세와 역내 금융 구조의 취약성이 맞물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촉발됐다. 2004년부터의 금리 인상은 주택금융의 취약성을 드러내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배경이 되었다. 그 여파는 재정 문제와 맞물려 2010년 유럽 재정위기로 이어졌다. 2022년 급격한 긴축기에는 영국 국채시장의 혼란과 가나 등 저소득국의 디폴트(채무불이행)가 발생했으며, 2023년에는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다. 위기마다 직접적인 촉발 요인과 경로는 달랐다. 그러나 부채와 금융위험이 누적된 상태에서 금리가 오르면 취약한 부문부터 균열이 드러난다는 교훈은 공통적이다.
한국의 일반정부부채는 2026년 GDP의 54% 수준으로 주요 7개국(G7) 평균의 절반에 못 미친다. 그러나 이 숫자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된다. 최근 5년간 국가채무는 연평균 9% 늘어 명목성장률의 1.7배에 달했다. IMF는 한국을 벨기에와 함께 부채비율의 ‘상당한 증가’가 예상되는 나라로 지목하고, 2031년에는 일반정부부채 비율이 63%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기축통화국이 아닌 한국은 대외 충격이 닥쳤을 때 자본유출과 환율 불안에 노출될 수 있다. 물론 원화 표시 정부부채를 외화 표시 외채와 동일하게 볼 수는 없지만, 부채의 증가 속도와 대외건전성을 함께 살펴야 하는 이유다.
더 큰 취약성은 민간부채에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가계와 기업 신용을 합한 민간신용은 2025년 말 GDP의 198%로 선진국과 신흥국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여기에 정부부채를 더한 매크로 레버리지는 GDP의 2.5배에 가깝다. 가계대출과 판매신용을 합한 가계신용 잔액은 2026년 2분기 사상 처음 2천조원을 넘어섰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80%대 초반으로 낮아졌지만 가계의 부담이 그만큼 줄었다는 뜻은 아니다. 부채 규모 자체는 줄지 않았으며, 반도체 호황과 물가 상승에 따른 명목GDP 확대가 비율 하락에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중장기 금융 불균형을 가늠하는 금융취약성지수는 9분기 연속 상승했다. 한국은행은 7·8월 기준금리를 잇달아 인상해 3%로 높였다. 금리가 0.25%포인트 오를 때마다 가계와 기업의 이자 부담은 7조원씩 늘어나는 것으로 추산된다. 취약차주의 연체율은 이미 10%를 넘었고 3년 연속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조차 감당하지 못한 한계기업의 비중은 19%에 이른다. 전체 가계대출 연체율이 1% 안팎이라고 안심할 수 없는 이유다. 한국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금리 인상이 연체율에 본격 반영되기까지는 9개월에서 15개월이 걸린다. 긴축의 청구서는 이것뿐이 아니다.
가계부채의 중심에는 부동산 대출이 있다. 금리 상승과 주택공급 확대가 맞물려 집값이 하락하면 원리금 상환 부담과 담보가치 하락이라는 두 충격이 겹칠 수 있다. 물론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등에 힘입어 우리나라 주택담보대출은 다른 나라에 견줘 건전한 편이다. 그러나 최근 규제는 15억원 초과 고가 주택의 대출한도를 4억원, 2억원으로 차등 제한하는 한편, 비규제 지역과 생애최초 구매자에게는 LTV 70%를 허용하고 서민용 정책대출은 DSR 적용에서 제외한다. 이들 대출에도 다른 심사 요건이 있지만, 주택가격과 정책 지원 대상 여부가 차주의 상환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다. 고가 주택이라도 자기자본과 소득이 충분하면 위험이 낮을 수 있고, 저가 주택이라도 소득 대비 원리금 부담과 주택가격 대비 대출 비율이 높으면 금리 상승과 집값 하락에 동시에 취약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교훈도 저소득·고레버리지 차주에게 위험이 누적될 때 금융시스템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집값 안정은 중요한 정책 목표지만, 금융 안정을 위한 규제는 주택가격뿐 아니라 실질적인 상환 능력과 부채 부담을 중심으로 설계돼야 한다. 가격대별 대출한도 규제에만 의존하면 정작 취약한 곳에 빈틈이 생길 수 있다.
우리 경제는 대외의존도와 금융시장 개방도가 높아 국외의 금융 불안이 실물과 금융 경로를 통해 빠르게 전이된다. 1997년과 2008년이 그랬다. 외화 유동성을 점검하고 취약차주와 한계기업에 대한 선제적 스트레스테스트(재무 건전성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 서민과 실수요자에 대한 정책금융의 역할은 유지하되, 정책대출을 포함한 건전성 규제의 사각지대도 줄여야 한다. 글로벌 부채 누증과 급격한 금리 상승이 맞물린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는 괜찮다’는 확신이 아니라 취약한 고리를 미리 보강하는 일이다. 확실히 안다는 착각이야말로 다음 위기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임현준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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