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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 ‘스피드 경영’과 정확하게 반대”

10월27일 취임 1년 맞는 이재용 회장, 매출 부진에 지배구조 개편 더뎌… ‘초격차’, 책임경영 모두 미비
등록 2023-10-27 22:13 수정 2023-11-16 11:07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3년 3월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에서 열린 삼성물산·제일모직 불법 합병 의혹 관련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 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3년 3월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에서 열린 삼성물산·제일모직 불법 합병 의혹 관련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 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안타깝게도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분야를 선도하지 못했고, 기존 시장에서는 추격자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2022년 10월25일 고 이건희 회장 2주기 사장단 간담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3년 10월27일 취임 1년을 맞았다. 1년 전 취임사는 사장단 간담회 발언으로 대신하고 취임식 없이 이사회 의결을 거쳐 회장에 앉았다. 삼성전자 이사회는 회장 승진 안건을 의결하면서 “책임경영 강화, 경영 안정성 제고, 신속·과감한 의사결정이 절실해서”라고 이유를 밝혔다. 그사이 삼성전자는 반도체 업황 악화로 실적은 고꾸라졌고, 이 회장의 리더십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취임 1년 조용한 이유 “2014년부터 경영 이끌어와”

회장 취임 1년은 짧은 시기여서 평가하기엔 이르지만, 좋은 성적을 매기기는 어렵다. 2023년 3분기 삼성전자는 매출 67조원, 영업이익 2조4천억원을 올렸다. 1년 전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12.7%, 77.9% 줄었다. 영업이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반도체(DS) 부문 적자 전환의 영향이 컸다. 그래서인지 삼성전자는 이 회장 취임 1주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고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2014년 이후 사실상 경영을 이끌어왔기 때문에 취임 1년을 맞아 별도로 홍보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가전사업은 근근이 5% 안팎의 영업이익으로 제자리걸음이고, 모바일사업은 폴더블폰으로 새 시장을 개척했지만 성장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마저 적자 상태다. 2019년 4월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해 “메모리반도체에 이어 파운드리(주문위탁생산), 시스템반도체에서도 확실히 1등을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파운드리 1등인 대만 티에스엠시(TSMC)와 격차는 여전하고 엑시노스 등 시스템반도체도 두각을 나타내는 제품이 없다. 더욱이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꼽히는 인공지능(AI)용 메모리반도체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에서도 에스케이(SK)하이닉스에 밀렸다. 아직 반도체 매출 비중은 작지만 급성장할 분야인 점을 고려하면, 수십 년 지켜온 ‘1등 메모리반도체 기업’이라는 명성엔 흠이 갔다.

위기에서 더욱 필요한 것은 리더십과 그에 동반하는 빠른 결정이다. 고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선언’에서 “남보다 먼저 시장에 내놓은 기회선점적 경영을 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스피드가 생명인 때”라고 말했다. 신경영 성공 요인의 하나로도 그룹 총수가 전문경영인과 달리 장기적 안목으로 높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빠른 결단을 내렸다는 점이 꼽힌다.

반면 이재용 회장의 취임 사유 가운데 하나인 ‘신속·과감한 의사결정’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 한종희 부회장은 2023년 1월 “조만간 좋은 소식을 기대해도 좋다”고 밝혔는데 여전히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2017년 전장(전기자동차 부품)산업 강화를 위해 약 9조2천억원을 들여 오디오장비 제조업체 하만을 인수한 이후 대형 인수·합병은 없었다. 오히려 비판이 흘러나온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이건희 회장의 ‘스피드 경영’과 정확하게 반대”라며 “사업지원티에프(TF)가 글로벌 환경은 물론 변화하는 기술 흐름에도 크게 아는 게 없어 몇 단계 보고가 이뤄지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반도체 부문 적자 전환 등 돌파구 필요하지만

물론 변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는 2042년까지 300조원을 투자해 경기도 용인 남사읍에 첨단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이병철 창업 회장의 기흥, 이건희 회장의 화성·평택 등에 이어 이재용 회장의 ‘용인’이 생길 수 있게 됐다. 김창욱 보스턴컨설팅그룹 엠디(MD)파트너는 “최근 자국 반도체 생태계 강화 추세에 맞춰 이재용 회장은 취임 이후 삼성전자를 대표해 베트남, 인도 등 글로벌 협력을 강화하고 국내 장비사 육성에도 적극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또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포럼’ ‘삼성 메모리 테크데이’ 등을 열어 속속 새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인공지능용 HBM3E(고대역폭메모리 5세대), 지디디알(GDDR)7과 전장용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내장형엠램(eM램) 등을 공개했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HBM3(4세대)에서 SK하이닉스에 늦었지만 HBM3E(5세대), HBM4(6세대)부터는 기술 주도권을 되찾을 것”이라며 “여기에 선단 공정 파운드리, 패키징을 갖춘 삼성전자의 경쟁력이 향후 부각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재용 회장의 리더십이 효과를 나타내 과거 삼성전자가 자랑한 ‘초격차’를 실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권오현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책 <초격차>에서 “초격차는 규모나 자본에 의해 그 실현 가능성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혁신을 향한 리더의 의지, 구성원의 주도적 실천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건희 회장 시절에는 미래전략실과 현장 사업부 수뇌부의 목소리가 동등했던 반면 이재용 회장 시절에는 사업지원TF가 보고받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수직적 관계라는 평가다. 최근에도 사업지원TF를 이끄는 정현호 부회장이 전장 분야 반도체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경계현 사장에게 사업 집중도를 높이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사업지원TF 결정이라며 수시로 전달되는데 사업부 상황을 잘 모른다는 의구심을 낳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취임 1년째인 10월27일에도 이재용 회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불법 합병’ 관련 자본시장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한 재판에 참석했다. 2020년 기소된 후 4년째 접어들었고, 이날은 105차 공판이었다. 여전히 ‘사법 리스크’를 안은 상황이다. 이 때문인지 현대차, SK, 엘지(LG) 등 4대 그룹 회장과 달리 유일하게 미등기 이사다. 1년 전 참여연대가 “미등기 임원인 이재용 부회장이 회장에 오르면 권한은 행사하면서 법적 책임은 지지 않게 돼, 삼성이 주장하는 책임경영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 비판이 여전히 유효하다.

불법 합병 혐의 ‘사법 리스크’도 여전

여기에 장기 과제인 지배구조 개편 역시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이 회장은 2020년 5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며 ‘4세 경영 포기’를 약속했다. 하지만 2020년 보스턴컨설팅그룹에 의뢰한 지배구조 개편 연구 용역 결과가 나오지 않아 진척이 없다. 삼성준법감시위원회 관계자는 “용역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살펴보지 못하고 있다. (이 회장의) 등기 임원도 사법 리스크가 해결된 뒤 얘기해볼 문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지배구조 개편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여서 차근차근 준비해야 하는데 이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없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1년 전인 2022년 10월27일 재판에 출석하면서 회장 취임 소감을 묻는 질문에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신뢰받고 사랑받는 기업을 만들어보겠다”고 말했다. 첫 1년에는 그런 노력을 찾기는 힘들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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