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의 끝’을 말하는 목소리에 묻어나는 감정은 의외로, 수심이다. “올해 세계경제가 점차 회복되고 반도체 경기의 반등이 기대되고 있으나 무역갈등, 지정학적 분쟁 등 대외 불확실성은 여전합니다.”(문재인 대통령 2020년 신년사) “(경기가) 저점을 통과했지만 반등의 속도는 매우 느리기 때문에 국민들이 체감을 못하고 있습니다.”(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1월6일 고위 당정청 협의회)
<font size="4"><font color="#008ABD">경기 순풍 느끼면서도 걱정</font></font>
고통을 견디면 회복의 시간이 오고, 쾌락이 과하면 다시 고통의 시간으로 접어든다. 고루한데, 대개 진리인 명제는 자본주의경제에서도 그렇다. 저점을 찍고 회복하다가 호황에 이르면 다시 둔화하고 침체를 겪고 또다시 회복하고… 과정은 반복된다. 2013년 3월 저점을 찍고 우리 경제는 그런 순환의 열한 번째 주기에 접어들었다. 회복되며 정점(2017년 9월)에 이른 뒤, 2년 넘는 고통의 시간을 겪었다. 이제 끝을 가늠하고 있다. 대략 6~7개월 뒤 경기 상황을 알리는 선행지수 순환변동치가 지난해 11월까지 4개월 연속 올랐고, 선진국·안전자산으로만 향하던 투자도 신흥국·위험자산 쪽으로 조금씩 고개를 튼다.
그런데도 희망으로 들뜬 기운이 없다. 조심스러움, 여전한 걱정이 이어질 뿐이다. “소폭 반등하겠지만 그 강도는 미약한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한다.”(현대경제연구원) “경기회복의 순풍이 불고 있지만 아직은 예단하기 힘들다.”(하나금융경영연구소) 우리가 7년 가까운 시간 지나온 열한 번째 경기주기는 대체 무엇이었나? 무엇을 보고 겪었기에 그 끝을 마냥 축제처럼 즐기지 못하게 됐을까? 정부와 전문가들의 분석은 길고 다양하지만, 한 단어만은 공통적이다. ‘반도체’.
돌아보면, 열한 번째 경기순환은 시작부터 이례적이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입국을 선언한 이래, 우리 경제를 이끌어오던 주요 산업(조선·철강·기계·석유화학·비철금속·전자 등) 대부분이 2012년을 기점으로 침체에 접어든다. 이유는 여럿 추정되는데, 어찌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세상이 변했고, 우리 자리도 변했다. “중화학공업은 내구재 소비를 위해 존재하는데, (세계) 소비자들이 이제 하드한 내구재 소비를 줄이고 소프트한 맛집, 여행에 집중한다.”(김일구 등, <빅히트>) “중국 같은 후발국의 추격 속에 경쟁력을 서서히 잃어갔다.”(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다만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정보와 순간의 만족을 저장하고 구동하는 반도체 하나만큼은 압도적인 경쟁우위를 자랑하며 남았다. 다양한 제조업 수출 산업이 멎은 자리, 그저 반도체를 쥐고 열한 번째 경기주기가 시작됐다. 회복의 시간에도 고통의 시간에도, 예전과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2013년 3월에서 2017년에 이르는 회복(확장)의 시간. 그러나 상당 기간 경기가 나아진다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동행지수 순환변동치, 경제성장률은 조금 오르는 듯하다 다시 멈칫하곤 했다. 그래서 “2013~2015년 장기간 더블딥(경기가 나아지는 듯하다 다시 침체를 겪는 현상)을 겪었다”(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고도 평가한다. 2013~2015년 사이 반도체 수출은 조금(10.1% 증가) 나아졌지만, 반도체를 뺀 수출액은 외려 7.7% 감소한다.
[%%IMAGE2%%]<font size="4"><font color="#008ABD">전통적 경기회복과 다른 모습</font></font>
마침내 2016년부터 ‘반도체 슈퍼사이클’이라는 이례적인 상황이 펼쳐진다. 이후 2년 동안 반도체 수출액만 104% 늘어난다. 그렇게 ‘지표만 봐서는’ 마침내 호황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 체감되지 않았다. “반도체는 자동화된 시스템이나 소수 전문가가 필요하지 다른 제조업처럼 노동자가 필요한 산업은 아니다. 기업 수익이 늘고, 국내총생산(GDP)에 반영되지만 고용을 통해 평범한 국민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
설비투자도 주로 외국 기계를 수입하는 데 쓰였다. 수출 증가에 따라 생산이 좋아지면, 일자리가 늘어나 소득과 소비가 늘고, 그럼 다시 생산과 투자를 늘리는 전통적인 경기회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2017년 소비가 늘기는 했다. 다만 소득주도성장을 내건 정부 재정정책의 영향이 컸다. 반도체 기업과 수출·투자가 한 묶음, 평범한 국민들의 소비·고용과 정부 재정 지출이 한 묶음으로 따로 분리된 채, 각자 경기를 나는 기묘한 모습이었다.
2017년 9월부터 2020년에 이르는 고통의 시간. 그러나 제대로 심각성을 알아챈 것은 뒤늦었다. 2018년 고용 감소가 이어졌고, 투자가 줄었다. 그래도 반도체 수출액만은 2018년 3분기까지 증가세를 이어갔다. 수출 증가가 2018년 말까지 위기감을 가렸다. “반도체 수출이 2018년 말부터 감소로 돌아섰다. 이전부터 경기둔화 조짐은 있었지만 크게 놀랐던 건 그즈음인 것 같다. 다른 주력 제조업이 별다른 변동 없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산업 경기는 결국 반도체에 달려 있었다.”(기획재정부 관계자)
2019년 1월에야 정부는 부랴부랴 반도체 전문가 간담회를 마련하고, 그린북(최근경제동향·기획재정부 발간)에는 반도체에 대한 우려를 짚어 적었다. 이 보고서가 특정 산업을 경제 리스크(위험) 요인으로 지목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슈퍼사이클을 거치며 반도체는 어느덧 우리 수출의 21%, 설비투자의 25%(2018년 기준)를 차지하고 있었다. 쏠려 있던 단 한 산업이 움츠리자 전체 경기의 하락은 가팔랐다. “이번 경기수축기는 별다른 외부 충격이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으로 가팔랐다. 위험이 분산되지 않고 반도체 한 품목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주원)
<font size="4"><font color="#008ABD">수치에 앞서 사람의 삶</font></font>
지지부진한 회복과 가파른 하강을 겪은 7년, 그리고 2020년 새로운 회복의 초입에서 근심 어린 이유는 결국 “여전히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것 같기 때문”(기재부 관계자)이다. 산업구조는 별달리 변하지 않았고, “제2, 제3의 반도체”(문재인 대통령)는 아직 구호에 그친다. 4차 산업혁명을 타고 반도체 수요는 늘겠지만 그마저 상황은 과거보다 좋지 않을 것 같다. “반도체 가격 하락이 멈추고, 수요는 여전하니 조금 나아지는 측면은 있겠다. 다만 슈퍼사이클을 다시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이 늘려놓은 설비를 봤을 때, 반도체 가격 하락의 주범이던 공급과잉이 완전히 해소된 상황도 아니다.”(장보형) 그리하여 2013~2015년처럼 회복기라는데, 뭐가 좋아진 건지 모르겠는 “더블딥과 같은 상황”(주원)을 점치기도 한다.
무엇보다, 경제의 목표는 ‘수치에 앞서 사람의 삶’이라는 마땅한 생각 앞에 걱정은 한층 깊어간다. “경기가 나아지면 삶도 나아질 거라는 사람들의 기대는 큰데, 반도체를 비롯한 정보기술(IT) 산업은 보통 사람들 삶을 나아지게 하는 그런 산업은 아니다. 현실과 기대의 간극은 계속 정부 재정으로 메울 수밖에 없는데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게 참 걱정스럽다.”(김일구 한화투자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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