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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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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면 사야 했던 집 한 채, 여기서 갈리는 노후 복지

주택연금 생활자 81살 박화규씨의 삶으로 톺아본 집이 복지가 된 역사
등록 2019-11-26 01:03 수정 2020-05-07 04:47
1976년 4월9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총력저축 전진대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1976년 4월9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총력저축 전진대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한 사람이 집을 사고, 짊어지다, 마침내 풀려난다. 이것은 1938년생 박화규와 집이 얽히고설켜온 이야기다. 한국 사회 도처에 널린 흔한 이야기, 결말은 흔치 않다.

박화규는 1960년대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대기업 노동자로 살다 은퇴했다. 콘크리트 숲으로 변해가던 한국 도시의 풍경 속에 여느 중산층과 같은 궤적을 따랐다. 번듯한 집 한 채는 일생 목표고, 자부심이었다. 나이 마흔에 첫 집을 구했다. 이사 다녔다. 결국 집 한 채 남겼다. 그런 집을, 그는 ‘주택연금’을 선택하며 ‘놓았다’. 금융기관에 집을 맡기는 대신 다달이 연금 100만원을 받는다. 나라를 대신해, 스스로 마련한 자산을 기반으로 한 노후 복지가 그렇게 실현됐다. 주어진 현실 아래 합리적이지만 아직 대부분 주저하는 결말이다.

11월13일 정부는 ‘인구구조 변화의 영향과 대응방안 가운데 하나로, 주택연금 가입 대상을 확대했다. 가입 연령을 60살에서 55살로 낮추고, 시가 9억원 이하 주택만 가입할 수 있던 것을 공시가격 9억원(시가 13억원 수준)까지 넓혔다. 전세 낀 다가구주택, 단독주택도 받기로 했다.

한국 사회에서 주택연금은 국가가 보증하는 금융상품 이상의 의미다. 사회적 연대에 기반을 둔 공적복지를 제쳐두고 각자도생에 바탕을 둔 ‘내 집 마련’을 삶을 지탱할 수단으로 조장하고 독려해온 수십 년 역사가 이르게 된 선택지다. 집 한 채 노인의 삶이 빈곤, 아니면 주택연금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씁쓸한 일이다.

80대가 된 박씨가 쥐었던 집의 궤적, 한국 사회에서 집이 복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 그런 집을 노후 복지로 활용하지 못할 정도로 견고한 박씨 주변 사람들의 집에 대한 감정을 되짚었다. 매 시절 그가 서 있던 한국 사회의 모습은 책 <한국 복지자본주의의 역사>(김도균)를 참조했다.

개발독재 시대, 저축과 내 집 마련의 열망

1966년. 박화규는 공항 관제탑에 기술직 공무원으로 취직했다. 첫 집은 서울 강서구(당시 영등포구) 월세방이었다. 농가 사랑방 한 칸에 살았다. 박봉이었다. “그때 대통령이 쌀 두 가마니 값을 봉급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던 기억도 나요. 쌀 한 가마니를 채 못 샀으니까.” 1972년 바라던 ‘탈공무원’에 성공했다. 대한항공에 취직했다. 공무원보다 사정은 나았지만 그래 봐야 제대로 먹고 입을 정도는 못 됐다.
얼마 안 되는 임금은 일단 저축하고, 남는 돈을 쪼개가며 썼다. “남들 다 그랬다.” 같은 셋집이라도 모은 돈으로 조금씩 괜찮은 집을 찾았다. 농가 사랑방에서, 상가 건물로 이사했다. 셋집을 전전하며 딸 하나, 아들 둘을 차례로 낳았다. “주인집 애들이랑 우리 애들이 싸우고 와서 기죽어 있는 모습을 봤어요. 그런 게 집 없는 설움이죠. 오직 저축을 해야 한다, 생각했어요.”
못 먹고 못 입으며 모은 돈으로 1979년 합정동에 첫 집을 마련했다. 연립주택이었다. 감격은 없었다. 돈이 부족해 전세를 끼고 사는 바람에, 그 집에서 살아보지는 못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우리는 강서구 쪽 셋집에 그대로 살고 산 집은 세를 줬는데 집값이 꽤 올랐다고 부동산에서 팔라고 했어요. 어차피 당장 사기에 돈이 좀 부족하니 그 값 받고 팔았죠.” 그리하여 살게 된 첫 ‘내 집’은 합정동 집을 팔고 마련한 경기도 김포의 일반 주택(농가)이었다.

집 한 채를 바라보며 저축한 박씨네 다섯 식구는 전 국가적인 저축운동 한가운데 있었다. 정부는 금리를 두 배 가까이 올리고(1965년 금리 현실화 조처), 알뜰한 삶을 장려하는 저축 계몽지(1972년)를 냈다. 급격한 물가 인상으로 실질금리를 올리는 데도 한계가 오자, 금융 혜택과 각종 세금 면제 제도로 무장한 근로자재산형성저축이 도입(1976년)돼 인기를 누렸다. 못 먹고 못 입으며 모은 쌈짓돈이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했다. 원조 경제를 대신할 ‘내자 동원’이었다.

대신 근로소득세를 줄여주는 등 대대적인 ‘감세’가 평범한 노동자의 소득보장 정책이 됐다. 세금과 사회연대에 바탕을 둔 복지국가가 싹트는 대신, 저축과 내 집 마련이 사회적 열망의 한가운데 섰다. 개인의 경험과 사회가 강요한 규범이 뒤섞인 채였다.

1989년 1월30일 주택 200만 호 건설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한겨레 자료

1989년 1월30일 주택 200만 호 건설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한겨레 자료

1990년대 신도시 ‘자가 소유 중산층’의 신화

1991년. 박화규는 경기도 안양 평촌 신도시에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다. 남들 따라서 1기 신도시 붐에 올랐다. “회사 덕이 컸다”고 박화규가 말한다. 지금도 그는 집 거실에 대한항공 비행기 모형을 두고 있다.
항공사 직원은 내 집 마련에 여러모로 유리했다. 3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해외지사 근무를 하면, 관사에 살 수 있어 집세를 아낄 수 있었다. 특히 평촌 아파트를 사기 직전 근무했던 중동(바레인)은 가족과 떨어져 홀로 근무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임금을 아주 많이 줬다”. 가족을 김포 집에 남겨두고 그는 중동 땅에서 돈을 모았다. “애들 학자금도 회사가 다 대줬고요, 1970~80년대에는 건강보험도 대기업만 됐으니까요. 남들보다 돈 아끼기 좋았죠.”

전광석화처럼 이뤄진 ‘주택 200만 호 건설’(1989~91년)은 기업복지 확대 분위기와 맞물리며 ‘자가 소유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었다. 아파트 한 채가 중산층의 상징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내자(국내 자본) 동원을 위해 도입된 저축 지원 제도들이 중산층 육성과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좀더 강해진 노동자의 힘은 개별 기업복지 확대에 집중했다. 세금을 통한 복지국가, 재분배 논의는 각자가 골몰해야 할 아파트 한 채 구호에 또다시 밀렸다. 어쨌든 박화규 같은 대기업 노동자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다.

11월20일 박화규(81)씨가 자택에서 아파트가 들어차 있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방준호 기자

11월20일 박화규(81)씨가 자택에서 아파트가 들어차 있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방준호 기자

노후의 삶을 위해 짊어졌던 집을 내려놓다

2013년. 아들을 기다리며 박화규는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세마역(경기도 오산) 앞에 서서 물끄러미 아파트 공사 현장을 본다. 어느덧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다. 55살에 대한항공을 나와 삼성항공 등으로 직장을 옮겼다가 60대 초반에야 일을 멈췄다. 1990년대 후반 평촌 아파트를 팔고 인천 부평으로 이사했다. “회사까지 교통이 너무 불편했어요. 그런데 평촌 아파트 값이 두 배나 오른 거예요. ‘와 이렇게 비싸면 앞으로 아무도 못 사겠다’ 생각해서 팔았는데, 그 후로 훨씬 더 올랐죠.”
은퇴 뒤에도 부평에 살며 퇴직금을 은행에 넣어두고 필요한 만큼씩 빼서 썼다. 한계가 올 것 같았다. 비슷한 처지인 동료들에 견주면 “악바리같이 재테크 같은 걸 못해서 별로 모은 것이 없다”. 그래도 집 한 채는 남았다. “어느 날 아들 기다리면서 세마역 앞에 있는데 아파트 짓는 터가 있었어요. 집값도 2억원 중반 정도니까 우리 여력으로 될 것 같고 지하철 바로 앞이니 교통도 편할 것 같았고.” 그렇게 아들을 기다리다가 발견한 아파트를 샀다. 선택 하나를 더했다.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 부동산을 놓기로 했어요.”
주택연금을 받기로 했다. 주변 친구들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집 한 채는 애들한테 물려줘야 한다”고들 했다. 내가 100살까지 살면 애들도 70살이 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하다 하다 집을 놓는 건 자존심 구기는 일”이라고도 여겼다. 그런 자존심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나이 드니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목돈이 필요해질 때”를 걱정했다. 주택연금 100만원,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합하면 200만원 정도 되니, 한 달 50만원씩 꼬박꼬박 저축하기로 했다. “집값이 오르면 아까울 것”이라고도 했다. 받은 연금을 갚고 해지하는 방법이 있다. 그런 것들을 떠나 그저 “이 나이에 부동산값을 셈하면서 사는 게 피곤하게 느껴졌다”.
박씨 선택보다 친구들의 걱정이 아직은 일반적이다. 60살 이상 집 가진 노인 가운데 주택연금 가입자는 1.5% 정도(2018년 기준)다. 복지 대신 마련한 집을, 복지로조차 쓰지 못하는 정서적 거부감이 그와 비슷한 삶을 걸어온 친구들 사이에 짙고, 박화규는 그게 못내 안타깝다.
“주택연금은 자산 기반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불완전하지만 어쩔 수 없는 귀결”이라고 김도균 경기연구원 전략정책부장이 말한다. 끊임없이 공적복지를 희생하는 대신 내 집 마련을 일생의 꿈으로 주입해온 한국 사회에서 노년을 맞아버린 중산층 노인들에게, 집 아닌 다른 복지 수단은 너무 미약하다. 그런데도 집이라는 환상은 너무 거대하고 복잡하다. 집을 연금으로 전환하는 것에 거부감이 크다. 집 한 채 가지지 못한 노인은 그나마 주택연금조차 꿈꿀 수 없다. 집에 대한 욕망이 젊은 세대에서도 바뀌지 않고 이어지면 수십 년 뒤 같은 고민은 반복된다. 세금을 더 내고 복지국가 혜택을 모두가 누리기보다 각자 자리에서 마련한 ‘내 집’이 삶을 지탱할 수단으로 여겼던 수십 년 시간이 쌓아온 숙제다.

2019년 11월13일 경제 관련 장관들이 주택연금 활성화 대책이 담긴 ‘인구구조 변화 영향과 대응 방향’을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9년 11월13일 경제 관련 장관들이 주택연금 활성화 대책이 담긴 ‘인구구조 변화 영향과 대응 방향’을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집도 없다면 선택지가 없는 노후 복지의 빈곤

2019년 11월20일. 박화규는 이제 그저 ‘사는’ 곳이 된 집에서 자원봉사 활동으로 받은 표창장을 꺼내든다. 실버기자 활동을 하고, 복지관 강의를 찾아 듣고, 주택연금 홍보대사를 한다. 워낙 세상일, 특히 노인 문제에 관심이 많다. 밥을 잘 사서 동네 친구가 많고, 손주들한테 아쉬움 없이 용돈을 건넬 수 있다.

“돌아보니 남의 집에서 40년, 내 집에서 40년 살았네요.” 다들 궁핍해서 힘든 줄 모르고 아꼈고, 직장 덕에 중산층으로 내 집 마련 대열에 섞였고, 그 집을 놓을 수 있었던 삶은 돌아보니 다행스럽다. 그렇지 못했던 주변 사람들에게 시선이 미칠 때면 안타까움이 커진다. “집을 못 놓고 힘들어하는 친구들도 안타깝고, 집이 없어 그런 선택을 못하는 노인들은 더 안타깝고.” 셋방부터 아파트까지 60년을 이어온 집과의 질긴 인연을 끊어내고도, 집과 삶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만큼은 계속 머리를 맴돈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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