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노동 상한)제가 획일적 일률적으로 적용됨에 있어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오고 있다. 내년에 주 52시간제가 (50명 이상 사업장에) 도입되면 국가가 일할 권리를 뺏는 것이다.”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4차위) 장병규 위원장이 10월25일 ‘4차 산업혁명 대정부 권고안’ 발표를 마친 뒤 밝힌 말이다. 4차위는 정부에 “실리콘밸리에서 출퇴근 시간을 확인하는 회사는 없다”며 “주 52시간제의 일률적 적용 등 경직된 법 적용에서 탈피해 다양화하는 노동형태를 포용할 수 있도록 노동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런 장 위원장의 발언과 대통령 직속 기구인 4차위의 대정부 권고문은 ‘주 52시간제’ 도입에 비판적이던 보수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일할 권리를 빼앗는 이는 누구
일할 권리와 노동권은 얼핏 비슷해 보인다. 헌법 제32조에 ‘근로의 권리’로 표현된 노동권은 ‘일할 자리(일자리)에 관한 권리’와 ‘일할 환경에 관한 권리’를 포함한다. 후자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를 방어하기 위한 권리로서, 건강한 작업환경, 일에 대한 정당한 보수, 합리적인 근로조건 보장 등을 요구하는 권리로 헌법재판소는 해석해왔다. 그러나 장 위원장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최소 기준 보장을 일하고 ‘싶은 자’의 ‘권리’를 가로막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4차위의 권고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분야별 권고안’의 첫 번째 항목으로 ‘노동’을 꼽으며 “노동 다양화를 포용, 국가 주도는 최소화”라는 제목을 달았다. “가장 어렵지만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것은 노동제도의 개혁이다. 우리의 노동제도는 여전히 2차 산업혁명 시대에 머물러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다양화되는 노동의 변화를 반영하지도, 혁신을 이끄는 인재들을 포용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2차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제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보통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 발명으로 주력 산업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행한 것을 말한다. 2차 산업혁명은 전기가 보급되고 컨베이어벨트처럼 공장이 기계화·자동화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시기를 말한다. 자본가들이 막대한 돈을 들인 기계를 쉬지 않게 하기 위해 인간을 기계 흐름에 맞췄고, 교대제 노동과 야간노동도 이때 처음 나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노동법이다. 최초의 노동법은 1802년 영국의 ‘공장법’이라 불리는 ‘도제생의 건강과 도의적 의무에 관한 법률’로 하루 노동시간 상한을 12시간으로 정했다. 프랑스는 1841년·1892년 연소자와 여성의 일일 노동시간 제한을 정했다. 장시간 노동부터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아주 기초적 수준의 아동노동 보호와 모성 보호를 시작한 것이다.
현재 노동법이 2차 산업혁명 시대의 공장제 노동을 전제로 만들어진 까닭에 ‘시대 상황에 맞게’ 개정할 필요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다양화하는 노동의 변화’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업무의 수행과 지휘·감독 방법이 다양해졌고, 이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노동과 그 통제 방식의 변화에도 관련 제도의 틀을 바꿀지언정 노동법의 ‘정신’마저 바꿀 수는 없다.
독일 정부는 2년 전 백서 발간을 통해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맞는 노동법에 관한 논의를 정리한 바 있다. <노동4.0 백서>에서 노동시간과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대목을 보자. “취업자들은 일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과 과도한 요구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근로시간의 형태는 안전과 건강이 위협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구성돼야 한다. 더 많은 근로시간 선택지를 제공함으로써 근로시간·공간 주권이 확대돼야 한다. 산업안전보건제도는 디지털화뿐 아니라 더 현저해지는 인구구조 변화를 반영해 개선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으로 인한 육체적 스트레스뿐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근로시간·공간 주권 강조하는 독일 ‘노동4.0’
독일의 ‘노동4.0’은 노동법의 기본 정신을 바탕으로 변화된 산업환경에 맞춰 노동자를 어떻게 보호할지에 초점을 맞췄다.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해 일하는 방식을 선택할 여지가 늘어났으니, 이 선택권을 노동자에게 줘야 한다는 취지다. 과로를 부르는 장시간 노동을 선택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했던 ‘인재’란 누구인가. 권고문은 ‘인재’를 전통적 노동자와 구별한다. 인재를 강조하면서 ‘노동자’와 갈라치기한다. “인재는 스스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개인적 역량을 바탕으로 차별화된 가치를 창출하는 존재” “공장의 생산직이나 절차에 따라 일하는 사무직과 다르다” “전통적 노동자의 성과는 시간과 깊은 연관이 있지만, 인재의 성과는 시간과 무관하다” “기업뿐 아니라 인재도 일자리를 선택한다. 해고와 이직은 일상이다”.
인재론과 ‘노동시간 제한 없이 일할 권리’를 결합하면,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자신의 성과를 입증하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 과로의 가능성은 당연히 높아지며, 일·생활 양립을 보장받을 수 없어 여성노동자들의 임신·출산·육아도 어려워진다. ‘인재’와 가까운 정보기술(IT) 노동자들은 장 위원장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해 네이버, 카카오, 넥슨, 스마일게이트 등 IT 회사에서는 노조 설립 바람이 불었다. 이들은 주로 과로를 유발하는 장시간 노동 근절, 일·생활 양립 보장, 포괄임금제 폐지, 성과 배분 기준 투명화, 고용 안정 등을 회사에 요구했다.
장 위원장의 게임업계 후배이기도 한 배수찬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넥슨지회장은 “일할 권리를 노동자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들이 말하는 것이 가장 황당하다. 게임업계에서 더 일하고 싶은데 막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채용에서 교섭력을 갖춘 사람이 100명 중 몇 명이나 될까? 해고 뒤 사회안전망도 부족한데 이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기업의 변호사 노릇만 하는 것이 안타깝다. 저런 권고문을 쓰기에 앞서 게임업계 노동자들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문제의 권고문은 장 위원장이 기초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실제 권고문 내용은 장 위원장이 3월 <디지털타임즈>와 한 인터뷰(‘혁신은 인재가 하는 것… 일을 해서 얻는 행복, 법으로 막지 말아야’)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컨베이어벨트를 ‘지키고’ 있는 노동자와 탤런트 및 지식노동자(이른바 인재)는 다른 것”이라며 주 52시간제 도입에 대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고도 말했다. 장 위원장은 네오위즈·첫눈을 창업한 IT 1세대로, 유명 게임인 <배틀그라운드>를 만든 게임업체 ‘크래프톤’의 대주주이자 이사회 의장이다. 이런 권고문이 나온 데는 장 위원장의 ‘개인적’ 견해와 삶의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4차위 관계자는 “장 위원장뿐만 아니라 민간위원들이 권고문 검토 과정에 참여했고, 의견을 종합해 작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자동화·지능화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우려의 대부분은 ‘일자리 소실’이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일반인 2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봐도, 85.7%가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고, ‘자신의 일자리가 대체되거나 현재 직업을 바꿔야 한다’고 응답한 이들은 65.2%였다. 그러나 정작 위원장이 직접 발표한 권고문에는 인재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노동제도를 바꾸고, 인재 육성을 위해 대학 등록금을 자율화하며, 인재가 마음껏 도전할 토대를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갖춰야 한다는 내용으로 정리됐다. 사라져가는 일자리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거나 인재와 ‘구별’된다는 절대다수의 ‘전통 노동자’에 대한 대책은 언급되지 않았다.
다른 위원 “자괴감 느껴”
민간위원 18명 가운데 유일한 ‘노동계’ 인사인 황선자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부원장의 “인재와 전통적 노동자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으며, 누구나 교육을 통해 인재가 될 수 있으므로, 둘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혁신적 역량을 갖춘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주 52시간 상한제도 지키지 못하는 기업의 일자리는 국민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가 아니다”라는 의견은 ‘각주’로 부차화됐다.
황 위원은 권고안 발표 뒤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4차위에 참여하며 자괴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장 위원장의 권고문은 그동안 4차위에서 논의한 안의 요약이 아니다. 위원들이 노동문제를 주되게 논의하지도 않았다. 나는 기술 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자리 파괴나 창출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고, 노동자들의 직업훈련 지원과 사회보장을 위해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3월부터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해 기업의 입장을 반영하려다보니,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말하는 정부의 기조와 전혀 무관하게 노동 분야에서 ‘국가 주도는 최소화’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정부 부처의 연구용역 결과를 볼 수 있는 ‘온나라 정책연구’ 누리집을 보면, 모두 20건의 4차위 학술연구용역 결과가 올라와 있다. 노동·사회보장 분야에선 ‘ICT 분야 일자리 변화에 대비한 노동법 개편 방향’ ‘4차 산업혁명 시대 노동의 미래와 대응 전략’ ‘4차 산업혁명 시대 보편적 사회보장제도 도입’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연구용역 결과물은 4차위 권고문 요약본에 실리지 않았고, ‘부록’으로 후퇴했다. 이를테면 ‘노동 존중 기반의 혁신성장 주도 일자리 창출’ ‘일자리 갈등 해소와 협력관계 구축을 위한 사회적 대화 활성화’ ‘삶의 질·건강·안전 등의 기본적 권리 보호 강화를 기반으로 노동자가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 및 환경을 충분하게 보장’ 등이다.
‘노동 존중’ 기반 혁신 성장은 권고문 어디에
벌써부터 첨단 정보통신 기술로 무장한 혁신기업과 기존 산업의 갈등이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 기술과 자본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4차위는 선택된 소수(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대책을 설파했을 뿐, 배제될 다수(전통 노동자)에 대해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4차 산업혁명의 총체적 변화 과정을 국가적인 방향 전환의 계기로 삼아, 경제성장과 사회문제 해결을 함께 추구하는 포용적 성장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며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4차산업혁명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 제1조) 설치된 4차위에서 노동자의 권리는 각주가 됐고 부록이 됐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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