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에서 청년 대책으로, 반값 대학생 기숙사를 세운다고 하자. 30년 뒤 사라질 수 있다는 대표적인 인구소멸 위험 지역인 경상북도 의성군은 귀농·귀촌인을 유치하기 위해 마을마다 아이 돌봄 시설을 하나씩 짓는다고 하자.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돈! 재정이 빈약한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에 손 내밀지 않고 대규모 투자 재원을 조달할 길은 없을까.
소농과 소상공인을 지원하기 위해 시작미국에서는 중북부 노스다코타주의 ‘공공은행 100년 실험’이 최근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노스다코타주는 100년 전인 1919년 7월28일, 미국 최초의 공공은행인 노스다코타은행을 설립했다. 주민투표를 거쳐 주 예산 200만달러로 자본금을 마련했고, 100년 동안 한결같이 주민을 위한 공공사업에 재원을 공급해왔다. 주민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명실상부한 공공은행으로 인정받는다. 100년을 버티면서 은행업 자체로도 시장에서 번영을 구가했다. 지난해 자산 규모 70억달러(약 8조4천억원)로 성장했고 1억5900만달러(약 1900억원) 흑자를 냈다. 2007~2008년 금융위기 기간을 포함해 무려 16년 연속 흑자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노스다코타은행은 거대 곡물상과 철도 기업의 횡포에 짓눌리던 소농과 소상공인을 지원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1919~33년 소농 1만6천 명에게 4100만달러를 대출했고, 대공황이 지나간 1940년대에는 노스다코타은행의 도움을 받아 많은 농민이 저당 잡혔던 농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1945년부터는 주정부에 이익배당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지역 공공사업에 투입된 배당금 총액이 10억달러(약 1조2천억원)를 넘어선다. 1967년부터는 대대적인 학자금 대출 업무를 시작했다. 노스다코타 출신으로 노스다코타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톡톡히 혜택을 누린다.
1961년부터 1973년까지 최장기 노스다코타 주지사를 지낸 윌리엄 가이는 노스다코타은행에 대해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한 엔진”이라고 늘 자랑스러워했다. 노스다코타은행은 도로와 다리 건설, 서민주택 공급, 지구온난화에 대처하는 환경 사업 등으로 좋은 조건의 자금을 공급하는 공공은행 역할을 꾸준히 확대해왔다. 최근에는 인디언 원주민들의 송유관 건설 반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 예산 10만달러를 대출해 입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금융”을 향한 노스다코타 주민들의 자부심은 변함이 없다.
위기의 든든한 지역사회 버팀목더그 버검 노스다코타 주지사는 최근 노스다코타은행 설립 100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노스다코타만의 유일한 공공은행”에 대해 “다른 주에선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는… 부러움과 호기심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미국 공공은행연구소장인 엘런 브라운은 저서 에서 “공공은행 시스템은 과도한 부채나 세금 부담, 환경 피해 없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 사회간접자본 구축 재원을 공급한다”고 말했다.
노스다코타주의 유례없는 공공은행 설립 도전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1919년 공공은행의 탄생은 사회주의자들이 이끌던 무당파동맹(NPL·Nonpartisan League) 집권의 산물이었다. 무당파동맹은 1916년과 1918년 노스다코타 주선거에서 독점기업 횡포에 맞선 노동자 보호, 누진세 도입, 은행과 보험 공유화 등의 공약을 내걸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자 공공은행이 ‘사회주의의 엔진’이 될 것으로 우려한 뉴욕 월스트리트 은행들이 중심이 되어 노골적인 공격에 나섰다. 노스다코타 주정부의 지방채 거래를 전면 중단한 것이다. 무당파동맹 정부도 1920년 주 하원선거에서 패배해 다수 의석을 잃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시련이 이어졌지만 노스다코타은행은 무너지지 않았다. 생존하는 데 성공했다. 전문가들은 노스다코타은행을 출범시키면서 주정부와 시정부의 모든 자금을 ‘노스다코타 계좌’로 법제화한 것이 생존에 큰 힘이 됐던 것으로 분석한다. 소농과 소상공인 등 주민들의 열성적인 지지도 힘을 보탰다.
노스다코타의 100년 공공은행 실험은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여러 주에서 다시 움을 틔우고 있다. 노스다코타은행의 100년 활약상이 알려지고 2008~2009년 금융위기도 거뜬히 견뎌냈다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더 공정하고 정의롭고 민주적인 금융을 요구하는 것이 전국적 정치 이슈로 떠올랐다. 올해 미국 중간선거에서 뉴욕주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20대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같은 젊은 정치인들의 지지도 한몫했다.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지난해 11월 공공은행 설립 요구안을 주민투표에 부쳤다. 과반수 득표에는 모자랐지만, 주민의 절반 가까운 44%의 지지를 얻어냈다. 주민투표 이후로도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공공은행 설립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공공은행 설립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기존 연방 법규 폐지에도 나서고 있다. 100여 개 환경·노동·정치 단체가 캘리포니아 주민 330만 명을 대신해 힘을 모았다. 로스앤젤레스를 포함해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샌디에이고 등 10개 시정부도 공공은행 설립 지지를 표명했다. 이들이 제안한 새 법안은 이미 주의회 하원을 통과해 상원 심의가 진행 중이다.
로스앤젤레스의 공공은행 설립운동본부는 누리집에서 공공은행 설립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지난해 시에서 (월스트리트의) 대형 은행과 투자회사에 지급한 이자와 수수료가 12억7천만달러(약 1조5천억원)에 이른다. 그런데 그 은행들은 민영 감옥과 화석연료 산업, 무기 제조 업체 등 사회적으로 해로운 산업에 돈을 빌려준다. 시의 대규모 재원을 마련할 대안이 있다. 세계적으로 검증된 공공은행 모델이다. 공공은행은 중간 거래자와 주주, 고임금을 받는 임원을 배제해 낮은 비용으로 지역에 자금을 공급한다.”
민영 감옥·화석연료 산업 대신뉴저지주에서는 필 머피 주지사가 지난해 선거에서 공공은행 설립 공약을 내걸었으며, 워싱턴에서는 시정부가 공공은행 설립을 둘러싼 공개토론회도 열었다. 뉴욕시와 오클랜드주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정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비영리 매체 (In These Times)는 최근 노스다코타은행을 소개한 기사에서 “미국 전역에서 공공은행 이야기가 다시 회자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며 “오늘날 새로운 황금만능주의 시대 상황이 100년 전 노스다코타은행이 설립되던 때 농민과 사회주의자,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들이 맞닥뜨렸던 현실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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