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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도 신협을

미국 백악관·하버드대 등 신협 운영, 독일 상호보험 장점 부각돼

국내서도 생협이 공제 사업 추진… 금융 민주주의 ‘몸풀기’
등록 2017-10-26 04:39 수정 2020-05-03 04:28
‘현민공제’ 광고를 달고 달리는 일본 아이치현의 시내버스. 미야코 영화생협 제공

‘현민공제’ 광고를 달고 달리는 일본 아이치현의 시내버스. 미야코 영화생협 제공

2011년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벌어진 미국 뉴욕 한복판에서 크리스텐 크리스천이라는 20대 여성이 구호를 외쳤다. “은행 계좌 폐쇄하고 신용협동조합(신협)으로 옮기자!” 크리스천은 그해 11월5일을 ‘계좌 전환의 날’로 선언해, 수만 명의 동참을 끌어냈다. 유럽뿐 아니라 대표적인 ‘1%의 나라’라는 미국에서도, 신협은 99%를 위한 안전한 금융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미국선 신협 9500개, 조합원 9천만 명

직장이나 마을·지역을 기반으로 한 미국 신협은 무려 9500여 개에 이른다.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70%가 넘는 9천만 명이 조합원이고, 미국 예금·대출 총액의 10% 이상을 신협에서 공급하고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백악관 전·현직 직원들과 그 가족도 신협 조합원이다. 1935년 설립된 백악관 신협은 자산 규모가 700억원 전후이며, 백악관 안에도 사무실을 설치해 현직 조합원들이 이용하기 편리하게 해놓았다. 유엔 본부, 미국 중앙정보국(CIA) 같은 기관과 하버드 등의 대학, 코카콜라 같은 주식회사들도 신협을 운영한다. 직원 조합원이 출자하고, 직원을 위해, 꼭 필요한 생활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뚜렷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2007년 국제 금융위기 이후 신협의 안전성을 높게 평가한 미국 금융 당국도 법인세 감면 등 적극적인 지원책을 펴고 있다.

보험 부문에서는 상호회사의 활약이 맹렬하다. 상호보험(Mutual Insurance)은 보험계약자가 사원이 되고 사원총회가 주식회사의 주주총회 구실을 하는 비영리 성격의 보험사다. 198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선 전체 생명보험의 절반, 전체 손해보험의 4분의 1을 상호보험에서 공급했다. 세계 보험사업의 대표적 기업 형태가 상호회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일으킨 신자유주의 열풍이 월스트리트를 휩쓸면서 다수의 보험사가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100년 상호회사 전통의 푸르덴셜 또한 2001년 뉴욕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독일 상호보험사들의 시장점유율은 1980년대까지 전체 생명보험의 27%, 전체 손해보험의 19%를 차지했다. 지금도 생명보험의 15%, 손해보험의 13%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 예일대 로스쿨의 헨리 한스만은 저서 에서 “상호회사의 장점은 은행의 경우보다 보험에서 더 강력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생명보험에선 사망률과 물가상승률을 장기적으로 어떻게 예측하느냐, 또 보험회사의 사업비를 얼마로 책정하느냐에 따라 보험가입자가 부담하는 보험료가 크게 달라진다. 이 때문에 보험사는 가장 손해를 보지 않는 쪽으로 보수적인 선택을 하기 십상이다. 보험가입자들의 보험료를 올리는 대신 그만큼 더 많이 남기는 이익을 주주들의 몫으로 챙겨주게 된다는 것이다. 헨리 한스만은 “상호보험에서는 보험가입자가 보험료 납부의 당사자이면서 동시에 배당을 취하는 당사자이다. 거래의 양쪽 당사자가 하나이기 때문에 보험가입자가 도박판의 비용을 몽땅 떠안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험료를 높게 책정해 이익을 많이 남기면 그만큼 보험가입자가 배당으로 가져가고, 반대의 선택을 하면 보험료를 적게 부담하는 대신 배당도 덜 받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각 선진국의 상호보험사들이 대거 주식회사로 전환한 데는, 주식회사 보험사들의 병폐를 바로잡으려는 금융 당국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오히려 상호보험의 장점이 희석되는 역설이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신주 무상 취득의 금전적 이득을 기대한 기존 보험가입자들도 주식회사 전환에 반대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도 전체 금융 부문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선진국의 신협이나 상호보험처럼 조합원이나 보험가입자를 위한 정직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라는 것이다. 지난 8월 포용금융연구회 발족 세미나에서 김용기 아주대 교수는 양적으로 비대해진 우리 금융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제는 사람 중심의 금융 민주화로 바뀌어야 한다고 큰 틀의 변화 방향을 제시했다. 고소득자와 자산 보유자, 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금융은 과도한 데 반해, 다수 서민을 위한 금융 혁신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금융산업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함께 가는 금융 민주주의 △가계소득을 늘리고 가계지출을 줄이는 금융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혁신금융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험가입자가 배당도 받는 상호보험
2015년 국회에서 생활협동조합의 공제사업 추진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공동으로 질병이나 사망에 대비한 구제사업을 벌이는 공제조합 설립은 국내 생협계의 숙원이다. 아이쿱생협 제공

2015년 국회에서 생활협동조합의 공제사업 추진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공동으로 질병이나 사망에 대비한 구제사업을 벌이는 공제조합 설립은 국내 생협계의 숙원이다. 아이쿱생협 제공

정부의 일자리위원회는 10월18일 사회적경제 활성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등의 성장 인프라 구축을 위한 금융 접근성 제고를 강조했다. 사회적경제가 풍성해지려면 사회적금융이 건강한 인프라 구실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얘기를 구체적인 정책으로 만들어냈다. 앞으로 5년 동안 최대 5천억원까지 신용보증 공급이 가능하도록 하고, 중소기업 정책자금 등에서 사회적경제 기업의 공급 목표치를 확대하기로 했다. 사회적기업 전용 투자펀드와 사회성과연계채권을 활용한 사회성과보상사업을 확대하고, 소셜벤처에 투자하는 1천억원 규모의 임팩트 투자 펀드를 내년에 신설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기존 신협이 사회적기업에 출자하거나, 협동조합이 다른 협동조합에 투자할 수 있도록 관련 법규를 정비하기로 했다.

다만 이번 방안에서 신협이나 상호보험 같은 협동조합형 금융 자체를 활성화하고 강화하는 내용은 빠져 있다. 본격적인 금융민주주의의 싹을 북돋우는 내용은 포함돼 있지 않은 것이다. 정부로서는 1997년 외환위기 때 공적자금을 수혈받은 한국의 여러 신협이 아직 사회적 신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현실을 간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호보험도 구체적 정책으로 언급하기에 한국에선 아직 많이 낯설다.

하지만 사회적경제 현장에선 민주주의 금융회사를 세우려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도전이 이미 시작됐다. 국내 생협들의 기세가 가장 돋보인다. 국내 생협의 매출 규모는 1조원을 훌쩍 넘어섰고, 조합원도 50만 명에 이른다. 풍성하고 조직화된 조합원을 대상으로 사망이나 질병에 대비한 보험 상품을 공급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공제사업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공제는 특정 단체의 소속 회원만이 가입할 수 있는 협동조합보험(상호보험)이다.

생협공제, 조합원 혜택 극대화

생협이 보험(공제)사업 추진에 나서는 것은, 국내 보험 상품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협 ‘선배’인 이웃 나라 일본의 공제사업 경험도 살아 있는 공부가 됐다. 일본의 공제단체는 대략 7천 곳, 가입 조합원은 7천만 명을 넘고 있다. 주식회사 보험사였다면 사업비나 주주의 이익으로 돌아갈 몫이 공제조합에서는 대부분 조합원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 소개된 일본의 현민공제(도민공제)는 매달 납입한 공제부금의 55.8%(전국 평균)를 공제금으로 지급하고, 배당금에 해당하는 할려금으로 26.7%를 조합원에게 지급한다(2009년 기준). 조합원이 낸 돈의 82.5%를 돌려받는 것이다. 사업비로 13.3%만 책정하고, 4.2%를 내부유보했다. 역사가 가장 오래된 사이타마현민공제는 지난해 공제부금 수입 가운데 48.01%를 공제금으로, 49.05%를 할려금으로 지급했다. 무려 97.06%를 돌려주고, 3%만 사업비 등으로 지출하는 기적을 이어가고 있다. 조합원을 대상으로 공제상품을 팔기 때문에, 광고·홍보비 등의 비용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조합원에게 불리한 상품 구성은 생각할 수도 없다. 이에 반해, 일본의 일반 생명보험회사는 보험료 수입의 25%를 사업비로 지출하고 31%를 내부유보해, 가입자가 돌려받는 돈은 공제부금의 50%에도 못 미친다. 우리의 보험 사정은 이보다 더 나쁘다.

국내 생협들이 공제사업을 하는 법적 근거는 2010년 생협법 개정 때 이미 마련됐다. 그동안 공정거래위원회의 시행령 작업이 미뤄져 손발이 묶였으나, 이르면 올해 안에 제도적 환경이 정비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이쿱 관계자는 “조합원 부담을 줄이면서 꼭 필요한 공제 혜택을 제공하는 실손보험상품 등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기존 보험업계에선 특정 종목만을 판매하는 중소 규모 전문 보험회사와 함께 신뢰받는 상호보험사를 설립하자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변액연금보험, 실손보험, 장기저축성 상품 등을 둘러싼 불신과 시비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은 최근 금융감독원 자료를 인용해, 40대 남성이 월 20만원씩 10년 동안 붓는 국내 생명보험사의 변액연금상품(기대수익률 3%)을 9년째에 중도 해지할 경우 원금(2180만원)을 챙기기는커녕 62만7494원을 손해 보게 된다고 폭로했다. 같은 돈으로 연 1.6% 금리의 은행 정기적금을 들었을때 135만원의 세후 이자 수입을 올리는 것과 크게 대비된다. 실손보험은 건강보험 재정을 축내는 요인으로 질타받고 있다. 가입자의 치료비를 건강보험으로 처리하는 일이 많아, 실손보험사가 부담할 몫을 건강보험 재정으로 떠넘긴다는 것이다.

가입자의 이해를 잘 반영하는 상호보험이나 전문 보험회사가 생겨나려면 우선 진입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험업법의 최소 자본금 규정을 보면, 주식회사나 상호회사(전문 보험회사)나 똑같이 300억원으로 정해져 있다. 미국의 경우, 생명보험사를 상호회사로 설립할 때 최소 자본금은 65만달러로 주식회사 설립(200만달러) 때의 3분의 1 수준이다.

‘간판만 협동조합’ 비판 극복해야

농협이나 신협 등 기존 협동조합 금융사들의 환골탈태도 요구된다. 금융감독기관에는 도덕적 해이 가능성이 높은 골치 아픈 금융사로 치부되고, 협동조합계에는 간판만 협동조합이라는 비판을 받는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5년 전 농협이 지주회사 체제로 개편하면서 보험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대신 농민 조합원을 위한 공제사업을 포기한 것은 쓰라린 아픔으로 기억된다. 신협중앙회에서는 청와대에도 한겨레신문사에도 직원 조합원을 위한 직장 신협이 신설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1997년 구제금융 사태 이후 신협의 신설은 사실상 금지돼 있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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