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은 단지 시범경기 일단락에 불과하고 본게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7월20일 하이투자증권 ‘기업브리프’) 삼성이 앞으로 치러야 할 본경기는 두 가지다.
합병에 반대하는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엘리엇)와의 시범경기에선 이겼지만, 삼성을 향한 안팎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외신은 “삼성의 승리는 한국의 패배”( 7월19일 칼럼), “골리앗(삼성)은 늘 이긴다”( 7월18일 칼럼)며 삼성과 한국 자본시장을 비판했다. 삼성을 응원하던 국내 언론 가운데 일부도 엘리엇과의 싸움이 끝나자마자 삼성을 준엄히 꾸짖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 경기의 최종 승패는 삼성이 이해관계자와 한국 사회, 해외 투자자를 얼마큼 이해시키고 설득하느냐에 달려 있다.
두 번째는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이다. 통합 삼성물산이라는 지주회사를 만들긴 했지만 계열사 간 순환출자 고리는 아직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표 참조). 경영권을 승계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여전히 삼성전자 지배력이 낮다. 계열사 합병, 인적분할 등이 계속될 전망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도 이해와 설득이 필요하다.
사실 시범경기도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여러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개혁연대는 합병 찬성표를 던진 국민연금을 향한 공세 수위를 높였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 11.2%를 보유해, 합병안 통과에서 일종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다. 경제개혁연대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투자위원회가 합병 ‘찬성’ 의결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하기까지 내부적으로 논의했던 자료와 회의록, 참고한 자료 등을 모두 내놓으라고 지난 7월21일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국민연금이 의결권 자문을 의뢰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서스틴베스트는 ‘합병 반대’를 권고했지만, 국민연금은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전문위)에 안건을 넘기지 않은 채 자체 판단만으로 ‘합병 찬성’을 결정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지침에는 “기금운용본부가 찬성 또는 반대하기 곤란한 안건은 주식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에 결정을 요청할 수 있다”고만 돼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삼성 합병 건에 대한 기금운용본부 자체의 의사결정이 외부 압력이나 로비에 따른 것임을 의심케 하는 충분한 정황이 있다”고 주장했다. 삼성물산 주주총회가 한 달도 남지 않았던 6월22일, 전문위가 소집됐다. SK C&C와 SK(주) 합병 건에 찬성할지 반대할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총수 일가가 많은 지분을 보유한 회사(제일모직·SK C&C)라는 점에서 삼성과 SK 두 합병 안건을 판단하는 기준은 사실상 동일했다. 전문위가 SK 건에 ‘반대’ 표결을 행사하기로 정하자, 국민연금은 삼성 건에 대해선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전문위에 결정을 요청하지도 않은 것이다. SK는 일종의 ‘간 보기’였던 셈이다. 전문위의 한 민간 위원은 “국민연금이 자체적으로 의사결정한 내용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삼성물산 소액주주연대 인터넷 카페에서는 우선주 주주총회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삼성물산 우선주를 6개월 이상 보유한 주주 1.5%(7만 주)가 모이면 주총을 다시 소집할 권리가 생긴다. 가능성은 낮지만 막판 변수도 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했던 주주들이 8월6일까지 주식매수청구권(보유한 주식을 정당한 가격에 사달라고 요구할 권리)을 행사하는 액수가 1조5천억원을 넘으면 합병 계약이 해지된다. 삼성물산 주식매수청구권 가격은 1주당 5만7234원으로, 7월24일 종가는 5만8천원이다. 삼성물산 주가가 더 떨어지면 주주들이 권리를 행사할지 모른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앞장서 반대했던 엘리엇은 다음 공격 카드를 저울질 중이다. 주주총회 무효 소송을 내거나, 각각 1% 지분을 갖고 있는 삼성SDI·삼성화재 경영진을 배임 혐의로 고발하는 방안 등이 가능하다. 엘리엇 쪽은 합병안이 통과된 삼성물산 주주총회 직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 쪽은 주주 달래기에 나섰다. 제일모직은 7월23일 이사회를 열어 다음날부터 자사주 250만 주를 매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전날 종가(1주당 17만6천원) 기준으로 4313억원 규모다. 합병 뒤 떨어지고 있는 주가를 안정시켜 주주가치를 높이겠다는 게 회사 쪽 설명이다. 합병 주총 전날인 7월16일과 견주면, 제일모직 주가는 11%, 삼성물산 주가는 14.7% 하락했다(7월23일 기준). 자사주 매입이 끝나면, 제일모직의 자사주 지분율은 기존 14.1%에서 15.95%로 높아진다. 통합 삼성물산이 출범하면 자사주 지분율도 기존 11%에서 12.33%가 된다. 주가가 떨어져 주식매수청구권이 행사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삼성물산도 추가로 자사주를 매입할 가능성이 있다.
향후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 가능성도 여러 가지 시나리오로 나온다. 하이투자증권 이상헌 연구원은 7월20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삼성전자가 인적분할을 통해 지주회사를 세운 뒤 통합 삼성물산과 다시 합병하는 시나리오를 예상했다. “삼성전자 시가총액이 커서 통합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지분을 확대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원은 “삼성전자가 7월30일 실적 발표에서 주주 환원 정책을 강화한다면 삼성전자 인적분할이 가시화할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고 내다봤다. 예를 들어 통합 삼성물산을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인적분할한 다음에 지주회사를 삼성전자 지주회사와 다시 합병하면, 이 지주회사는 삼성전자를 포함한 삼성그룹 계열사 지분 대부분을 확보할 수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남매가 지분 19.1%를 보유한 삼성SDS는 본경기를 뛸 ‘핵심 선수’다. 통합 삼성물산이 삼성SDS 지분 17.1%를 갖고 있어, 두 회사 간 합병도 점쳐진다.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목적에서 삼성전자를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인적분할한 뒤에 지주회사와 삼성SDS를 합병할 것으로 예상된다.”(KDB대우증권 7월20일 보고서) 이 합병안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방식이다. 총수 일가의 그룹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한편, 삼성전자 사업부문을 떼냄으로써 삼성전자 주주들이 삼성SDS와의 합병을 반대하는 저항감을 희석시킬 수 있어서다. 전자 계열사를 묶는 사업 개편 방식의 하나로, 삼성전자와 삼성SDI의 합병설도 나온다.
경영진 지분에 다수 의결권 부여?‘시범경기’에서 나타난 여러 제도적 문제점을 개선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7월23일 자료를 내어 외국 투기자본의 경영권 위협을 방어할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 경영진이 소유한 지분에 1주당 다수 의결권을 부여하는 ‘차등의결권’ 등을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경제개혁연대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삼성 지배구조의 문제점, 국민연금 등 한국 자본시장 주축의 민낯이 그대로 노출된 사건”이라 규정하고, △자본시장법에 정한 합병 비율 계산 방식 개선 △자사주 매각·매입을 경영권 강화에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상법 개정 등을 제안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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