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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1차 책임은 이통사에”

7월 말 다시 한번 ‘산소호흡기’를 단 팬택… “이통사 영업정지 때 수익성 악화,

제조사 보조금도 이통사 마케팅비로 흘러가는 구조에선 항상 ‘을’”
등록 2014-08-05 15:51 수정 2020-05-03 04:27
채권단이 팬택의 워크아웃을 재개하기로 결정한 7월31일, 팬택 협력업체 대표들이 서울 을지로 SKT 본사 앞에서 집회를 열어 “팬택 신제품을 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21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채권단이 팬택의 워크아웃을 재개하기로 결정한 7월31일, 팬택 협력업체 대표들이 서울 을지로 SKT 본사 앞에서 집회를 열어 “팬택 신제품을 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21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정·재계) 높으신 양반들의 휴대전화 한번 봐라. 다 삼성 아니면 LG다. LG유플러스는 계열사라고 LG전자 제품 밀어주지, 이동통신사들도 다 대기업 편이다.” 지난 7월28일 만난 팬택의 전직 고위 임원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팬택이 왜 또 법정관리 위기에 몰리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다.

팬택이 휘청이고 있다. 1997년부터 휴대전화를 생산해온 팬택은 삼성전자, LG전자에 이은 국내 휴대전화 3위 제조업체다. 팬택은 지난 3월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워크아웃(기업 재무구조 개선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3천억원가량의 채무를 쥔 채권단과 1800억원의 채권을 가진 SKT·KT·LG유플러스 등 이동통신사들 사이에 입장이 엇갈리면서 워크아웃 과정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채권단은 이통사에 채권 출자전환과 팬택 제품의 최소 물량 이상 구입을 요구했지만 이통사들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통 3사는 출자전환 대신 팬택이 갚아야 할 채무를 2년 동안 상환 유예해주기로 지난 7월24일 결정했다. 이에 따라 7월31일 KDB산업은행 등 채권단의 75% 이상이 중단됐던 팬택의 워크아웃을 재개하는 데 찬성했다. 팬택에 다시 한번 ‘산소호흡기’가 달린 셈이다.

<font size="3">협력업체 550여 곳의 “살려주십시오”</font>

하지만 겨우 한숨 돌린 것에 불과하다. 경영 정상화까지는 첩첩산중이다. 채권단이 워크아웃 재개시 결정을 내린 7월31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SKT 본사 앞. ‘팬택을 살려주세요! 그래야 우리도 살 수 있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100여 명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팬택 협력업체 대표와 직원들이다. 팬택의 협력업체는 550여 곳에 이른다. 홍진표 팬택 협력업체 협의회 회장은 “어음을 막지 못한 협력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할 위기다. 워크아웃이란 기업이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건데, 운영자금이 당장 한 푼 없는 워크아웃은 채권단과 이통사의 생색내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왜 이동통신사 앞에서 ‘살려달라’고 읍소한 걸까? 팬택도, 금융기관도, 정부도 아니고. 그건 이통사들이 팬택의 현금 고갈을 해결할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채권단이 신규 자금 지원을 하지 않기로 한 터라, 당장 팬택은 이통사에 제품을 팔아야만 현금이 도는 상황이다. 지난 1분기 팬택 국내 매출의 93%는 이통 3사에서 나왔다. 소비자들이 이동통신사나 대리점을 통해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국내 유통 구조상, 팬택 같은 제조사는 ‘을’이고 이통사는 ‘갑’일 수밖에 없다. 팬택이 굴욕적일지라도 이통사에 900억원 규모의 휴대전화 13만 대를 새로 사달라고 요청한 이유다. 그래야 협력업체에 대금도 지급하고, 7월분 급여를 받지 못한 팬택 임직원 1800여 명의 밥벌이도 해결할 수 있다. 이날 집회 참석자들이 SKT를 향해 “팬택의 베가폰, SKT용 베가 팝업노트 신제품을 사주세요”라고 호소한 까닭이다.

<font size="3">이통사 영업정지 불똥이 튄 것</font>

그런데 현재 이통사와 팬택 김포공장에 잠자고 있는 베가폰 등 팬택 제품의 재고 물량이 60만 대 이상이라는 게 문제다. 이통사들은 추가 구매에 난색을 표한다. 시장 논리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SKT 관계자는 “베가폰이 한 달 평균 6만~7만 대 팔리는데 현재 석 달치 재고 물량을 갖고 있는 정도라 적정 수준이다. 이보다 물량을 더 풀어버리면 실제 휴대전화를 팔아야 하는 대리점의 재고 물량이 늘어나 자금 압박이 가해진다”고 말했다. KT 관계자도 “지난 6월 20만 대 수준이던 재고 물량을 현재 15만 대까지 낮췄다. 하지만 여름휴가철 비수기인데다 우리가 떠안아야 하는 손실도 걱정돼 추가 구매할 여력이 없다”고 밝혔다. 채권단이 이통사에 신규 구매나 팬택 의무 구매를 강제할 권한은 없다.

그렇다면 팬택 휴대전화는 왜 팔리지 않는 걸까? 최근 판로가 막힌 상황에 대해 팬택 협력업체의 공장장인 전용석씨는 “일선 대리점에서 베가아이언폰을 찾아볼 수도 없다. 팬택이 돈이 없어서 휴대전화 보조금을 못 주니까, 이통사들은 팬택이 망해서 나중에 보조금을 못 받아낼까봐 재고 물량을 안 푸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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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택 쪽에서 이통사를 곱게 보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올 3월부터 경영 사정이 급격히 나빠진 것에 정부와 이통사들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탓이다. 팬택 관계자는 “회사가 1~2월만 해도 흑자를 냈는데 3~5월 적자로 돌아섰다. 이통사들 영업정지 탓에 휴대전화 시장이 얼어붙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 3~5월 이통사의 휴대전화 보조금 지급 과열 경쟁을 바로잡겠다며 이통 3사에 각각 45일간 영업정지라는 초강수를 뒀는데, 그 불똥이 팬택에 튀었다는 것이다. 반면 이통 3사는 영업정지 덕분에 오히려 마케팅 비용이 줄어들어 2분기 영업실적이 개선됐다. 팬택의 한 직원은 “공짜 스마트폰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통사들은 고액의 LTE 요금제를 통해 휴대전화 보조금을 소비자한테 다시 받아낸다. 반면 제조사의 보조금은 이통사 마케팅비로 흘러들어가는 불공평한 구조다”라고 꼬집었다.

<font size="3">“중국 제품과 싸울 수 있도록” </font>

이에 대해 한 이통사 관계자는 “팬택은 불량률 등 제품 경쟁력이 떨어져서 소비자가 많이 찾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인터넷에선 팬택의 기술력이나 애프터서비스(AS)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베레기’(팬택 스마트폰 모델명인 ‘베가’와 ‘쓰레기’를 합쳐 부르는 은어)라는 비아냥마저 떠돈다. 사실 팬택의 워크아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6년 12월에도 워크아웃을 신청했다가 5년 만에 졸업한 바 있다. 당시 팬택은 20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했지만, 2012년 3분기 이후 적자 행진은 다시 시작됐다. 채권단과의 갈등으로 인해 팬택 창업주인 박병엽 부회장이 2013년 9월 물러났고, 지난 2월 팬택은 또다시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다른 이통사 관계자는 “팬택이 번 돈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다. 채권단이나 이통사 입장에서도 마냥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만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중견기업 팬택은 지금까지 ‘공룡’ 이통 3사와 삼성·LG라는 거대한 경쟁사들 틈바구니에서 악전고투해왔다. 브랜드 파워에서 밀리는 바람에, 휴대전화 옆면에 금속 테두리를 두르는 기술 등 제품 자체의 기술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측면도 있다. 14~15%대를 유지하던 국내 시장점유율은 최근 10%대 밑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국내 상황을 ‘탓’만 할 수는 없다. 미국의 시장조사기관인 인터넷데이터센터(IDC)에 따르면, 지난 2분기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1위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25.2%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1%포인트 하락했다. 샤오미폰 등 중국 저가 휴대전화 업체들이 치고 올라와서다. 팬택은 매출의 80%를 국내 시장에 의존한다. 독자 생존을 하려면 해외 시장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이준우 팬택 대표는 “이제부터는 원가 경쟁력이 낮더라도 중국 제품들과 싸울 수 있는 차별화된 제품으로 해외 시장에 도전할 생각이다. 국내에선 전략 차별화를 통해 시장점유율을 지켜가겠다”(7월10일 기자회견)고 경영 정상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1차 워크아웃 시기 동안 팬택은 스마트폰을 삼성전자와 동시에 내놓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번에 팬택의 도전은 무엇이 될까.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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