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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민영화 블랙딜’은 재벌 나눠먹기

영국·아르헨티나·일본 등 7개국의 민영화를 고발하는 영화 <블랙딜>을 공공노조조합장 등과 함께 보니…
등록 2014-07-12 16:29 수정 2020-05-03 04:27
인디플러그 제공

인디플러그 제공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온세역에선 기차가 시속 5km로 운행한다. 보기에 답답할 정도로 거북이걸음이다. 기차가 이렇게 ‘기는 것’은 민영화 때문이라고 영화 은 말한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 철도를 민영화했다. 민영화된 철도 회사는 이익을 재투자하지 않았고 열차와 선로는 노후화됐다. 노후화된 열차는 2012년 온세역에서 51명이 숨지는 대형 참사를 낳았다. 그 뒤로도 온세역에서 사고가 발생하자 아르헨티나 정부는 아예 온세역에선 기차가 속도를 못 내게 법으로 규제해버렸다. ‘수학여행 가다 사고가 나니 수학여행을 가지 말라’는 한국의 경우와 비슷하다.

철도만이 아니다. 7월3일 개봉한 다큐멘터리영화 은 연금, 의료, 물, 전력 등 전세계에서 진행된 민영화 사업의 이전과 이후를 살펴본다. 영국·프랑스·칠레·아르헨티나·일본 등 7개국을 돌며 취재한 결과는 민영화로 인해 시민들이 높은 요금을 내면서도 낮은 서비스로 고통받거나, 재공영화를 통해 민영화에서 탈출하기도 했다.

<font size="3">“흑자 기업을 왜 매각하죠?”</font>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의료 민영화, 철도 민영화, 공항 민영화…. 우리에게도 이미 낯익은 주제다. 의 마지막은 “여러분의 공공재는 어떻습니까”라고 묻는다. 그 답은 이미 민영화 흐름 앞에 가장 많이 노출된 3명에게 절실한 문제다. 현정희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장, 이명한 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 조직국장,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이다.

이들과 함께 7월3일 오전 서울 시내의 한 영화관에서 을 조조로 봤다. 영화관은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수익사업을 위해 역을 리모델링하면서 역사 전체가 상업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한 곳에 있다. “영화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고 말하는 오건호 위원장은 철도 민영화를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인천국제공항은 1년에 8천억원씩 순이익이 발생해요. 세금으로 지은 공항이고, 지분을 매각해도 (계속 벌어들이는 돈에 견줘) 얼마 되지 않는데 왜 굳이 계속 경영 효율성을 내걸면서 매각하려는지 묻고 싶어요.”(이명한)

은 검은 거래다. 아르헨티나나 프랑스에서 기업가와 정치인들이 공공재를 이권처럼 넘겨주며 뇌물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알짜니까요.”(현정희)

“알짜인데 그걸 왜.”(이명한)

“알짜를 팔아야 재벌이나 이걸 사가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현정희)

“흑자 노선(철도)을 파는 게 어디 있나, 상식에 안 맞는다고 하잖아요. 일반 국민도 한계 기업을 매각한다 하면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는데, 알짜만 파니 특혜 매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블랙딜이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거죠.”(오건호)

<font size="3">정부보조금 타다 은쟁반 사는 기업</font>

영화 은 ‘검은 거래’를 추적한다. 프랑스에서 만난 다국적 물산업체 ‘수에즈’의 전 경영자는 쉽게 검은 거래를 인정한다. “현실에는 뇌물을 제공하는 자와 뇌물을 받아 챙기는 이가 있는데, 그건 항상 존재했던 것으로 우린 그렇게 수천 년 동안 살아왔다.” 이렇게 말한 그는 두 차례 감옥에 다녀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수도 사업을 민영화하면서 공무원 등에게 뇌물을 제공한 것이 들통나 유죄를 선고받았다. 회사 수익성 때문이 아니라 뇌물로 줄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민영화 뒤 투자에 소홀해진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상수도 민영화를 통해 200만 가구에 수도관이 확장되는 등 서비스가 개선됐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재공영화를 통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상수도 사업을 맡은 수도공사에 의해 바로 깨진다. 수도공사 관계자는 인터뷰에서 “민영화 기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수도 요금은 계속 올랐다. 또 수에즈가 13년 동안 200만 가구에 수도관을 확장했지만, 우리는 7년 만에 350만 가구에 수도관을 늘렸다”고 말한다.

앞서 얘기한 민영화된 아르헨티나 기차에도 ‘구린내’가 느껴진다. 온세역에서 아들 루카스를 잃은 어머니 마리아 루한 레이는 “민영 기차 회사를 운영하는 형제는 정부의 기차 보조금을 타다가 보석, 자동차, 은쟁반을 사는 데 썼다고 관세청 공무원들이 증언했다”고 고발한다. 정부보조금을 다른 곳에 쓰면서 기차와 선로의 안전장치는 민영화 이전 모습 그대로였다.

이렇게 노후화돼도 사람들은 기차를 이용해 출퇴근을 해야 한다. 영화는 사람들로 가득 차 객차 문을 닫지 못하고 고속으로 질주하는 기차를 보여준다. 루카스는 그 기차를 타고 가다 온세역에서 사고를 당했다. 영화에서 공개된 당시 자료 화면을 보면, 사고 뒤 객차 내부는 사람들끼리 몸이 끼어 탈출하지 못하는 ‘지옥철’이었다.

“루카스의 엄마가 사고 뒤에도 아들의 주검을 못 찾아서 울며 헤매다 3일 뒤에야 찾는 장면이 세월호 사고와 겹쳐져서 눈물이 많이 나더라고요.”(현정희)

1980년대 민영화된 칠레의 국민연금 문제도 영화를 통해 생생히 드러난다. 한때 민영화된 칠레 연금은 초기 수익률이 높아 보수 언론 등으로부터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은 칠레에서 은퇴한 노동자를 만난다. 그는 수십 년간 연금에 돈을 냈지만 은퇴 뒤엔 냉장고에 별로 먹을 게 없는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민영 보험회사가 지급한 돈이 주택임대료를 내기에도 벅차기 때문이다.

은 칠레가 군부독재 시절 국민연금 가입자를 민영 보험회사로 이전시켰다고 설명한다. 이후 민영 보험회사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가입자가 낸 돈은 광고비와 사업비 등으로 더 많이 쓰이게 된다. 그 결과 은퇴 뒤 받는 연금이 보잘것없게 된 것이다. 빈곤 상태에 빠진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군부독재 시절에 누가 민영보험으로 가기 싫다고 거부할 수 있었겠어요?”

<font size="3">국민연금은 넘기고 군인연금은 그대로</font>

그와 달리 칠레의 한 퇴역군인은 은퇴 뒤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 칠레 군부정권은 공공재인 국민연금은 기업에 넘겨주었지만, 자신들의 권력 기반인 군인연금은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놔두었다. 그 결과 퇴역군인들은 일반 국민보다 훨씬 풍족하게 산다. 민영화는 두 사람의 삶을 갈라놨다.

아르헨티나의 지하철 모습. 민영화 이후 시설 투자가 되지 않아 수십 년 된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온세역 모습. 온세역은 노후화된 열차의 잦은 사고로 인해 열차가 진입할 때 시속 5km로 들어온다. 인디플러그 제공

아르헨티나의 지하철 모습. 민영화 이후 시설 투자가 되지 않아 수십 년 된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온세역 모습. 온세역은 노후화된 열차의 잦은 사고로 인해 열차가 진입할 때 시속 5km로 들어온다. 인디플러그 제공

“중남미에서 민영화는 (뒷거래가 있는) 추잡한 범법행위였죠. 그건 1980~90년대 상황이었고, 한국에서는 한국적인 블랙딜이 있을 거 같아요. 다른 나라는 전체 조직을 민영화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이른바 경영 합리화를 위해 적자 사업을 민영화했어요. 우리는 다르죠. 이전 정부들이 전체 조직을 민영화하려다 국민적 저항이 커지니까, 이른바 알짜 노선, 돈 되는 것만 골라서 민영화를 하려고 해요. 그 절차가 공정하더라도 인수 능력이 있는 곳은 재벌 대기업이에요. 한국판 블랙딜일 수 있죠.”(오건호)

“의료 쪽도 영리병원 도입, 건강보험 민영화 등을 시도하다가 저항에 부딪히니까 약간 돌아가는 민영화를 생각해낸 것 같아요. 병원이 사실상 영리 자회사를 설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되고 있죠. 대형 병원은 재벌들이 다 가지고 있죠. 이들이 온천, 호텔, 식품 등 병원을 토대로 전방위적인 사업을 할 수 있는 거예요.”(현영희)

“의사들도 의료 영리화에 일부 반대하는 이유가 지금 의료 영리화가 되면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게 대형 병원이기 때문이에요. 대형 병원들은 전부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죠. 의료뿐만 아니라 철도, 공항, 가스, 발전까지 정부가 하는 딜의 가장 큰 수혜자는 재벌이기 때문에 한국적 블랙딜은 ‘재벌딜’이라고 해도 돼요.”(오건호)

재벌딜의 거래자는 누굴까. 영화 관람 뒤 수다는 그쪽으로 옮겨간다. 인천국제공항은 한때 외국 펀드로의 지분매각설 등 정치권 실세에 의해 민영화가 추진된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민영화는 관료가 아니라 정치인이 하는 거잖아요. 새누리당이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관료 등 낙하산 인사들이 공기업에 내려와요. 업체는 관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권의) 조직원을 맡아준 거죠. 정당이나 정치세력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면 기업이 필요하고, 대기업은 규제를 풀라고 딜을 하죠. 정치권은 법을 개정하거나 정부를 압박하죠.”(이명한)

“영화에서 아쉬운 점이 그거예요. 한국적 블랙딜을 조금 더 꺼내서 보여주면 좋았을 텐데.”(현정희)

“아쉬운 점을 말해도 되나. 영화(흥행)에 타격을 주면 민영화 반대운동에 타격을 주니까, 하하. (웃음) 영화제작비에 노조도 돈 냈잖아.”(오건호)

<font size="3">“영화 흥행 안 되면 반대운동 타격”</font>

한 차례 수다 뒤 이들은 영화관을 떠났다. 영리병원 등 의료 민영화의 현장, 공항·철도 지분 매각 등 교통 민영화의 현장으로 갔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 ‘규제 완화’ 등의 한편에서 민영화를 추진하는 상황이다. 아마 이들의 머릿속엔 영화 속 “지금 한국의 상황을 보면 이른 시일 안에 민간 사업자가 공공사업에 참여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독일 철도 도이체반 대변인)는 말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정리 박선희 인턴기자 starking07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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