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정지로 이동통신 시장이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었다. 30만 소상공인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규제 일변도의 방송통신위원회 정책이 낳은 참극이다.”(안명학 사단법인 전국이동통신유통협회장)
지난 4월9일 오후 서울역 앞 광장. 이동통신 대리점과 판매점 사장 및 직원 600여 명이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촉구’라고 쓰인 빨간 종이 팻말을 손에 들고 모여앉았다. 이들은 “정부가 때려야 할 이동통신사들은 못 때리고 애먼 유통업자들만 때리고 있다”며 ‘영업정지 철회’를 요구했다. 이통사 영업정지가 처음 시작된 지난 3월13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렸던 집회에 이어 두 번째 집회다. 서울에서 판매점 2곳을 운영하는 이종천 협회 이사는 “판매점 매출은 지난 1~2월과 비교해 KT와 LGU+가 영업을 정지했던 지난 한 달여간 6분의 1로 줄었고, 지난 4월5일부터 선두업체인 SKT 영업정지가 시작되면서 10분의 1로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겉은 잠잠, 속은 날카로운 신경전
요즘 이동통신 시장은 ‘정중동’이다. 표면적으로는 가라앉아 있다. 정부가 불법 보조금을 쏟아붓는 과열 경쟁을 식히겠다며 이례적으로 이통 3사에 각사 45일씩 영업정지를 내리는 ‘초강수’를 둔 탓이다. 2개사가 동시에 영업이 정지되고, 돌아가면서 1개사만 영업하는 식의 제재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렇게 5월19일까지 이통 3사가 돌아가면서 신규 가입자 모집, 번호이동, 기기 변경 등이 금지된다. 통신시장은 움츠러들었다. 올해 1월~3월12일까지 하루 평균 6만1천여 건에 달했던 번호이동 건수가 1만 건 아래로 내려가는 등 눈에 보이는 경쟁은 잦아든 상태다. 그런데 속사정은 다르다. 이통사들끼리는 “SKT가 상대 회사에 대해 보조금 파파라치를 운영한다” “LGU+가 영업 재개를 앞두고 불법 사전예약제를 시행했다”고 상대편을 공격해대며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인다. 대리점·판매점 등 유통업자들은 휴대전화를 못 팔아 굶어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이게 다 기형적인 한국 이동통신 시장 구조 때문이다. 일단 휴대전화 단말기 값이 너무 비싸다. 삼성, LG, 팬택 등 휴대전화 제조사 출고가가 100만원을 훌쩍 넘는다. ‘거품’은 단말기 유통시장을 거치면서 꺼진다. 제조사가 이동통신사에, 이동통신사가 계약을 맺은 대리점(대리점 위탁 판매를 하는 판매점 포함)에 장려금과 수수료 등 명목으로 ‘보조금’을 주는 방식을 통해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단말기 보조금 한도를 1인당 27만원으로 제한했지만, 실제 보조금은 70만~80만원에 이른다. 제값 주고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소비자만 ‘호갱님’(만만한 고객을 뜻하는 은어)이 되는 판이다. 이통 3사가 보조금을 포함해 시장에 뿌리는 마케팅 비용만 1년에 6조~7조원이다.
이통사들은 대신 비싼 통신요금으로 손해를 만회한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 가구당 월평균 통신비 지출액은 15만7579원이었다. 1년에 200만원 안팎을 꼬박꼬박 통신사에 바치고 있는 셈이다. 가계의 통신비 부담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이통사들은 국내 고객의 사용량이 많은 탓이라고 항변한다. 이유가 어디에 있든 이통 3사는 10~16%의 영업이익률(연 4조~5조원)을 얻고 있다. 국내 대기업 연평균 영업이익률의 갑절에 해당한다.
사실 이동통신 시장 자체는 레드오션이다. 휴대전화 가입자가 이미 전 국민 수보다 많은 5500만 명(2월 기준)이나 된다. 기존 가입자를 서로 뺏고 뺏기는 ‘제로섬게임’이다. 내부 경쟁은 치열하지만 시장점유율은 몇 년째 5:3:2(SKT:KT:LGU+) 구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파이는 커지지 않는데 먹이사슬 안에 있는 휴대전화 제조사, 이동통신사, 유통업체들끼리만 피 튀기는 꼴이다. 정부는 싸움이 심해질 때마다 불법 보조금 지급 책임을 물어 이통사와 제조사에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영업정지로 엄포를 놓아왔다. 하지만 뜨거운 냄비는 잠시 식었다가 금세 다시 달아올라 달그락거린다.
영업정지로 영업이익이 는다?“지금이 휴대전화 유통 구조를 정상화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다. (판매업자 등) 단말기 보조금 경쟁의 먹이사슬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고통스런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그동안의 고질적인 보조금 경쟁에서 벗어나 차별화된 요금제 등 서비스 경쟁으로 접어드는 계기가 돼야 한다. 서비스 경쟁 없이 무조건 가입자 뺏어오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유통 환경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미래창조과학부에서 통신요금 정책을 담당하는 류제명 통신이용제도과장의 말이다.
그러나 판매업자들은 이통사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꼴이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전국 6만여 개의 판매 매장에서 사상 최대 영업정지로 인한 피해가 수조원대에 이르고, 휴업과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부는 앞서 이통 3사에 대리점 수익 보전 방안을 강구하라고 권고한 상태지만, 법적으로 이를 강제할 권한은 없다. 이통사들은 오히려 느긋하다. 보조금 경쟁이 줄어들면 마케팅 비용이 절감되기 때문이다. 증권업계는 영업정지 ‘덕분’에 이통 3사의 2분기 영업이익이 전 분기보다 오히려 6천억원가량 늘어날 것으로 내다본다.
정부는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 제정을 추진 중이지만 국회에 발이 묶여 있는 상태다. 이통사들이 대리점이나 판매점에서 파는 단말기 종류별로 출고가와 보조금, 판매가 등을 사전에 공시해 투명하게 내역을 밝히는 내용이 뼈대다. 정치권에서는 단말기 유통과 이동통신 서비스 자체를 분리하는 ‘단말기 자급제’ 도입도 논의되고 있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단말기 유통 과정이 투명해지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엄격한 규제로 인해 요금 폭리가 제거되지 않고 소비자만 손해를 본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안 사무처장은 2011년 정부를 상대로 이통사들이 제출한 통신요금 원가 및 요금 산정 근거 자료 등을 공개하라는 정보공개 청구소송을 내어 1·2심에서 일부 승소한 뒤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이통사들은 과연 이번엔 보조금이 아닌 요금 경쟁으로 돌아설까? 그리고 이것이 소비자 이익으로 이어질까? 지난 4월2일 LGU+는 월 6만2천원 기본료에 음성통화·데이터통신을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새로운 요금제를 내놨다. 이른바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다. 바로 SKT와 KT도 비슷한 요금제를 내놓으며 따라왔다. 앞서 LTE 음성통화 무제한 요금제, 3G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 때도 양상은 비슷했다. 한쪽이 치고 나가면, 다른 업체들이 뒤따라오는 식이다. 혜택을 받는 대상은 10% 이내의 ‘헤비 유저’들이다.
요금 구조 공개가 우선오히려 낮은 요금제를 쓰던 고객들이 ‘조삼모사’식 마케팅 전략에 걸려들어 과도한 통신비를 지출할 위험도 있다. 이동통신 요금 원가 공개 소송을 진행 중인 조형수 변호사는 “통신사가 기본료를 임의로 정하고 요금 구조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게 근본적인 문제다. 정부가 제대로 된 감독 권한을 행사해서 소비자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요금제를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6월에 요금제 개편 로드맵을 내놓을 예정이다. 과열 경쟁과 영업정지, 비싼 휴대전화와 높은 통신요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낼 뾰족수가 절실한 때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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