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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이사’만 안 하면 되지롱

11월29일부터 임원 보수 공개 의무화됐지만 등기이사로 제한돼 무용론 나와
등록 2013-12-06 14:18 수정 2020-05-03 04:27

한국에서도 기업 임원의 연봉이 화제다. 기업이 개별 등기임원에게 지급하는 보수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11월29일부터 시행되기 때문이다. 야권과 시민단체가 이 제도의 입법화를 추진한 지 7년 만의 성과다. 재벌 총수 일가를 비롯한 주요 임원이 경영 성과에 상관없이 과도한 보수를 챙겨가는 관행을 막자는 게 주된 취지다. 그러나 허술하게 마련된 법안 탓에 벌써부터 무용론이 나오고 있다.

시행 2주 전 등기이사직 물러난 오너 부부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사진)은 지난 11월14일 핵심 계열사인 (주)오리온의 등가이사에서 물러났다. 배우자인 이화경 부회장도 함께였다. 나흘 뒤에는 박성경 이랜드그룹 부회장이 지주회사 격인 이랜드월드의 등기이사직을 내려놓았다. 두 회사는 오너 일가가 등기이사직을 사임한 이유로 전문경영인에 의한 책임 경영 강화를 들었다. 그러나 당장 ‘연봉 공개 회피용’이라는 논란이 일었다. 자본시장법 개정을 앞둔 묘한 시점에 회장·부회장 자리는 유지한 채 등기이사직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번 개정안은 상장사 등 사업보고서를 제출할 의무가 있는 기업(2051개 기업·4월 1일 기준)이 앞으로 5억원 이상의 보수를 주는 ‘등기임원’(등기이사·감사)의 개별 보수(급여·상여금·퇴직금 등 총급여)를 공시하도록 했다. 지금까지는 등기임원이 받는 보수의 합계만 밝히면 됐다. 한마디로 등기임원이 아니라면, 그룹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연봉의 액수와 상관없이 보수가 노출될 위험이 없다는 얘기다. 상장 기업의 경우 등기이사 외에도 연봉 10만달러를 초과하는 상위 임원 3명에 대해선 보수를 밝히도록 한 미국과는 대조적이다. 그룹의 의사 결정에 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으로 등기이사 선임을 꺼리는 재벌 총수 일가의 관행이 더 굳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실제 지금도 그룹 경영 전반에 참여하는 재벌 오너가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리는 비율은 높지 않다. 기업 분석 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500대 기업 가운데 등기이사 평균 연봉이 5억원이 넘는 기업은 176개사(임원은 536명)다. 이 가운데 대주주 일가가 등기이사인 기업은 절반 정도인 96개사(93명)에 불과하다. 예컨대 삼성그룹에선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정도가 등기이사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등은 모두 미등기임원이다. 신세계그룹에선 지난 2월 신세계·이마트 등기이사에서 물러난 정용진 부회장을 비롯해 이명희 회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역시 등기이사가 아니다. 덕분에 이들은 등기이사가 져야 할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뿐더러, 앞으로는 연봉이 세간에서 회자되는 불쾌함을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 등기이사직을 맡지 않거나 거꾸로 내놓는 재벌 총수 일가가 더 많아질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강정민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원의 설명이다. “좋은 경영 성과를 내서 연봉을 많이 받아가는 재벌 총수 일가라면 상관없겠지만, 경영 성과와 무관하게 고액의 연봉을 지급받아온 일가는 (연봉 공개에) 상당히 부담을 느낄 것이다.”

“가십성 기사 이상의 의미 없어”

또 다른 구멍도 있다. 금융위원회가 11월14일 발표한 ‘임원 개인별 보수 공개 세부 시행방안’을 보면, 기업은 앞으로 보수가 5억원 이상인 등기임원의 보수 규모와 구성 내역 정도만 밝히면 된다. 세부적인 산정 기준이나 방식까지 공개할지는 기업의 자율에 맡긴다. “기업에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금융위의 원칙에 따라서다. 기업이 임원의 성과를 측정하고 이를 보수에 반영하는 기준을 투명하게 개선해야 한다는 기존 입법 취지가 퇴색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경제개혁연대는 이에 대해 “이 제도가 사실상 (기업 임원의 연봉 액수 정도를 공개하는) 가십성 기사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는 형태가 됐다”고 비판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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