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한국 사회는 세금을 둘러싼 정치학의 속살을 다 드러냈다. 정부가 세제개편안을 발표하자마자 민주당은 ‘세금폭탄론’을 꺼내들었고, 여러 언론매체의 논조도 여기에 휩쓸려 들어갔다. 그러자 월소득 4천만~7천만원의 ‘월급쟁이’들도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이에 화들짝 놀란 여당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애초에 법안을 꺼낸 정부의 ‘머릿부분’인 청와대가 스스로 원점 재검토를 지시했고, 결국 다시 나온 수정안에서는 위의 ‘월급쟁이’들의 위 절반 부분만 몇만원 더 내는 선으로 조정됐다. 그리고 가대됐던 세수 증가분은 4400억원이 줄어들고 말았다.
애초의 정부 개편안에 비판할 만한 대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기업의 법인세를 건드리지 않고 고소득 구간에서의 증세가 미흡한 점 등 한계가 뚜렷하다. 이는 현 정부의 공약 이행 재원이 무려 135조원에 이르는 점에 비춰보면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세제개편안에서 분명히 평가해야 할 점이 있다. 조세 기반을 확대해 정부의 재정 구조를 합리화하고 현대화하려는 방향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조세 구조는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는 고사하고 현대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도록 낙후돼 있다. 소득 하위 34%, 즉 근로소득자의 3분의 1과 자영업자의 4분의 1은 사실상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 64%의 소득세 납부자 가운데에서도 큰 부담은 대개 상위 10%에 집중돼 있는 구조다. 이는 국가가 복지라든가 전반적 사회정책의 책임 같은 것은 지지 않고 그저 사회 관리의 기구로만 여겨지던, 즉 ‘유산계급’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옛날 시절의 조세 구조를 보여준다. 이 구조를 개선하고 21세기형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월급쟁이’들의 세 부담 확대는 당연하고 시급한 과제다. 애초의 정부 개편안은 이 올바른 방향으로 어려운 발자국을 떼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평가받아야 했다.
17세기와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개인적 시민’들은 국가의 조세를 ‘수탈’로 여겼으며 이에 저항하는 것을 자신들의 신성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몇백 년 전 농경사회에서나 유의미한 이야기다. 고도로 발달된 산업사회에 살아가는 ‘사회적 시민’들은 조세를 ‘갹출’ 혹은 ‘공동출자’로 받아들인다. 이번 법안으로 촉발된 세금 문제의 논쟁은 우리가 스스로를 이러한 ‘사회적 시민’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단순히 자기가 몇만원 더 내게 되나라는 좁은 시야의 이익 계산을 떠나서, 이러한 조세 기반의 확대가 옳은 방향인가 그리고 그 원칙이 고소득층과 사회 전반에 합당하게 적용되는가를 침착하게 토론해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지는 조세 부담과 또 새로이 얻게 되는 복지와 여타 권리의 신장을 함께 재보는 논의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사회를 적극적으로 구성해나가는 책임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좀더 뚜렷이 의식할 수 있었다.
의미 깊은 토론의 장 막아버려하지만 지난 며칠간 실제로 벌어진 일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 민주당이 엉뚱하게 세금폭탄론을 들고 나오면서부터다. 살기 팍팍한 월급쟁이들이야 담배 피우다 툴툴거리며 쓸 수 있는 말이지만, 몇만 명이 운집한 대중집회에서 야당 당수의 육성으로 이 말이 공중에 울려퍼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기껏 한 달에 1만 몇천원 내라고 하는 게 ‘세금폭탄’이라고? 요즘 팥빙수 값이 얼마인지 아는가? 그러면 팥빙수 집은 ‘폭탄 제조소’이며 그걸 줄 서서 먹는 사람들은 ‘자폭’의 대열이란 말인가? 민주당은 지난 대선 때부터 자신들이야말로 복지국가 건설의 기수임을 자처하면서 번번이 증세 주장도 펴는 것을 당 노선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보이면 당 노선 따위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민주당의 고질적 악폐가 도지면서 가장 금기시해야 할 어휘까지 마구잡이로 쓴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최악의 ‘포퓰리즘’이다. 앞으로 복지국가 건설 과정에 나올 수밖에 없는 증세 논의의 고비마다 이번에 보여준 경박한 행태는 두고두고 민주당을 따라다닐 것이며, 진정한 복지국가 건설의 정치적 전위 역할은 민주당으로는 무리라는 불신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주었다.
세금폭탄론 덕분에 앞에서 말한 여러 의미 깊은 토론과 논쟁의 장은 보잘것없이 왜소해져버렸고, 우리 머릿속에는 오로지 자기가 내게 될 몇만원, 몇천원의 좀스러운 돈 계산만 들어앉게 됐다. 지난해부터 우리가 받은 무상보육 같은 여러 복지제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등의 성찰은 멀리 사라져버렸고, ‘국가가 내 유리 지갑 털어간다’는 단순한 생각에만 빠져들게 됐다. 그러자 ‘포퓰리즘’이라면 앞뒤를 다투는 정부와 여당은 불붙는 세금폭탄론에 재빨리 편승해 자신들의 세제 법안을 순식간에 백지화해버렸다.
이 한판 헛소동이 끝나자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민주당은 형평성을 내세우며 ‘서민’ 증세 이전에 고소득자 증세부터 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슬며시 옮아간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책임 있는 정당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첫째, 이번 법안은 서민 증세가 아니라 중산층, 그것도 ‘중상층’ 증세였다. 연소득 4천만원은 근로소득자의 상위 4분의 1에 해당하며, 5500만원은 상위 13%, 7천만원은 7% 정도다. 둘째, 더욱 중요한 문제로서, 세제 구조의 전환이라는 과제 앞에서 이러한 부자 증세 선후론은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조세 기반의 확대와 중산층부터 함께 복지 재원의 부담을 공유하는 것은 선후를 따지지 말고 응당 가야 할 길이지 선결 조건을 걸 성격의 일이 아니다. 도대체 부자 증세가 정확히 어느 만큼 이루어지면 중산층 증세에 응한다는 것인가? 그것도 정확히 몇%로? 그런 식의 ‘슬라이드’ 보편 증세가 이루어진 나라가 실제로 있는가? 결국 이 이야기는 ‘좌우지간 못 내겠다’는 소리에 구실을 붙인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남은 선택은 복지공약 재검토?민주당이 던졌던 세금폭탄론은 이리하여 복지국가 건설에 열쇠가 되는 조세 체계 개선을 위한 더 많은, 더 폭넓은 토론의 장을 막아버렸고, 그 토론 과정에서 우리가 복지국가 건설을 책임질 주체인 ‘사회적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막아버렸다. 후과는 또 있다. 아니나 다를까 보수 언론과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복지 공약 전면 재검토론이 터져나오고 있다. 어차피 증세 없는 복지란 현실성이 없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여기에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조세 기반을 확충하려 했지만 이는 세금폭탄론을 앞세운 철벽 같은 조세 저항에 부딪혀 무력화되는 현실이다. 그러니 남은 선택은 복지 공약을 전면 재검토하는 것밖에 길이 없지 않느냐는 논리다.
이는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될 움직임이다. 복지국가 건설의 과정은 그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하는 과정에서 조세 기반의 확충과 부담의 배분에 대한 고민과 논쟁이 항상 따라오게 돼 있다. 여기에서 그 부담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스스로 맡으려는 책임 있는 ‘사회적 시민’이 없다면, 그래서 사회적 합의의 도출이 지지부진해진다면, 언제든 살아나서 복지국가 건설 노력 자체를 잠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을 제어하고 복지국가로의 전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는 대세로 안착시키려면 우리부터 세금에 대한 인식을 ‘수탈’에서 ‘공동출자’로 바꾸고 필요한 비용과 책임의 부담을 당당하게 받아안는 ‘사회적 시민’으로 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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