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다. 새내기 인터넷 쇼핑몰엔 그럴싸한 홍보 문구 하나 없다. 소비자의 눈을 붙잡기 위한 현란한 할인 광고도 없다. 상품 가짓수 역시 단출하다. 쌀·곶감·김·미역 등 농수산물과 친환경 세제 몇 가지가 전부다. 찬찬히 살펴보니 빨갛게 잘생긴 경북 문경의 사과가 눈에 들어온다. 유난히 사과를 좋아하는 부모님의 설 명절 선물로 딱이다. 가격은 5kg 한 상자에 3만4천원. 얼른 인터넷 가격 비교 사이트를 보니, 다른 쇼핑몰에서 파는 상품과 가격이 비슷하거나 2천~3천원 비쌌다. 머뭇거리다가 사진 몇 장에 마음이 끌렸다. 새재초록사과작목반이 지난 1년간 직접 퇴비와 약재를 만들어가며 친환경 사과를 길러낸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주문하기’를 꾹 눌렀다. 평범해 보이던 주문 과정의 마지막에 비밀이 있었다. 내가 치른 사과 가격에서 생기는 수익금으로 후원할 곳을 꼭 선택해야 했다. ‘해고노동자 자녀의 장학금’을 골랐다. 그제야 조금은 특별한 주문이 완료됐다.
고 이호일 지부장이 오랜 직장 동료1월7일 문을 연 인터넷 쇼핑몰 ‘진보마켓’(www.jinbomarket.com)은 이렇게 장사를 한다. 소비자가 농·어업인들과 중소기업이 정성껏 기르고 제작한 상품을 제값에 사주면, 수익금의 대부분을 회사의 불법 해고와 부당행위에 맞서 오랫동안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나눠준다. 후원 대상은 소비자가 직접 정하면 된다. 소비자가 생활용품을 사며 자연스레 해고노동자에게 ‘소비 기부’를 할 수 있게 플랫폼 구실을 해주는 것이다. 최장기 투쟁 사업장인 코오롱 정리해고철회투쟁위원회, 서울시청 앞 등에서 5년째농성 중인 재능교육 노조, 동료 23명을 떠나보낸 쌍용차 노조, 철탑 위에 올라 매서운 칼바람을 견디는 현대차 노조 비정규지회, 2007년부터 회사 쪽 정리해고에 맞서온 콜트·콜텍 노조가 후원 대상이다. 하나같이 노조원들이 장기간의 해고나 휴직으로 수입이 끊긴데다, 회사 쪽의 무지막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따른 가압류 등으로 자산까지 묶여 심각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 투쟁 사업장이다.
진보마켓은 김은주 대표(전 진보신당 대표 권한 대행)의 고민에서 시작됐다. 그도 2년 전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21년 동안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노조활동을 하며 세 차례나 해고와 복직을 반복한 노동자였다. 지난해 12월25일 오랜 투쟁 활동 끝에 남은 생활고 등을 비관해 세상을 등진 이호일 전국대학노조 한국외대 지부장이 그의 오랜 직장 동료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이 겪고 있는 경제적 고통에 대한 걱정이 컸다. “해고자들이 경제적 문제로 정말 힘들다. 수입이 없어 신용불량자가 되면서 가족과의 갈등도 커진다. 그 와중에 회사는 가압류까지 걸어 압박한다. 고 이호일 지부장이나 고 최강서 동지(2012년 12월21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 조직차장) 등도 경제적 타격이 없었으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은 안 했을 거다. 그런 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6개월 전 온라인 쇼핑몰을 떠올렸다.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데다 판로가 없어 고생하는 농·어업인과 중소기업의 물건을 팔아줄 수도 있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뜻을 세우자 사람은 금세 모였다. 다른 인터넷 쇼핑몰에서 상품의 기획·섭외 일을 하는 현직 MD(Merchandiser)와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웹 운영자 등이 합류했다. 모두 과거에 학생·노동 운동을 했지만 지금은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30~40대 직장인이다. “힘겹게 투쟁하는 노동자에게 힘을 보태고 싶어 하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러나 모두 희망버스를 타거나 집회에 나올 수는 없다. 매번 생활비를 아껴서 후원을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소비 기부’를 생각했다.”(김은주 대표)
판매 가격의 60~70%를 생산비로 지급진보마켓의 최대 목표는 다른 인터넷 쇼핑몰과 똑같다. 수익 극대화다. 수익이 많아질수록 노동자들의 경제적 부담을 더 많이 덜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익 창출 방식은 조금 다르다. 진보마켓은 생산자의 제품 원가를 쥐어짜지 않는다. 농업인이 질 좋은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판매 가격의 60~70%를 생산비로 지급한다. 대신 세금·카드수수료 등 최소한의 운영경비를 제외하곤 악착같이 아낀다. 한 달 100만원가량의 임대료가 아까워 별도의 사무실을 두지 않았다. 인건비도 짜다. ‘재능 기부’를 내걸어 운영진들은 기본 임금을 받지 않되, 일정 이상의 수익이 나면 그 비율에 따라 조금씩 나눠 갖기로 했다.
물론 운영경비 절감은 곁가지에 불과하다. 많은 수익을 내려면 무엇보다 광범위한 소비자가 지속적으로 쇼핑몰에 들러 물건을 주문하게 만드는 게 기본이다. 지금껏 민주노총이나 시민단체 등에서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판매해 투쟁기금 또는 후원금을 마련하려고 종종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한 이유도 일반 소비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 탓이었다. 김 대표는 “민주노총도 지역본부마다 비슷한 방식으로 수익사업을 하지만 잘 안 됐다. 내부에서 안방 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민주·진보 진영과 직접 연관된 사람은 5%도 안 된다. 95%의 일반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진보마켓이 다양한 기획 사업을 통해 소비자의 눈과 마음을 잡아두려는 건 이 때문이다. 자신이 보탠 후원금이 노동자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지 여러 방식으로 알려주며 소비 기부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예컨대 ‘장기 해고자 ○○○씨 가족 힐링 투어 보내주기’ 등과 같은 사업을 내걸어 소비자의 ‘십시일반’ 욕구를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이렇게 모인 수익금이 투쟁 사업장에 그대로 전달되는 건 아니다. 후원금 사용에도 분명한 원칙이 있다. 일단 개별 노동자를 직접 지원하기로 했다. 소비자의 후원금이 노조의 투쟁 기금이 아니라 해고노동자 자녀의 학비나 가족의 생활비 등에 쓰여 실제 가계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후원이 특정 사업장의 노조원들에게 몰리더라도 사업장 간에 적당하게 분배해 ‘후원금 양극화’가 벌어지지 않게 할 계획이다. 김 대표의 설명이다. “노동자 개인에게 지원할 때 재무 상담도 받게 할 것이다. 곪아서 터지기 직전인 가계 재무 상태를 드러내 개선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다.”
100명이 찾아와 3명이 구매일단 출발은 좋다. 개업날 ‘마수걸이’로 50만원어치를 팔았다. 이후 매일 조금씩 매출이 늘고 있다. 홈페이지에 하루 100명이 찾아오면 3명은 구매를 하는 꼴이다. 일반 쇼핑몰에 평균 100명이 들어 0.7명만 구매하는 것과 비교하면 소비자의 ‘충성도’가 높은 편이다. 무엇보다 “내 농산물도 팔고 싶다”든가, “내 쇼핑몰도 플랫폼에 실어달라”며 진보마켓에 연대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게 고무적이다. 이런 바람을 담아 앞으로 ‘11번가’ ‘지마켓’ 같은 진보 진영의 오픈마켓으로 진화해나가는 게 진보마켓의 또 다른 꿈이 됐다. 장이 섰으니 이제 놀러갈 일만 남았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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