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토해양부 직원 17명은 2011년 3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국하천협회 연찬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4대강 사업 관련 업체들도 참여했다. 연찬회가 끝난 뒤 국토부 직원들은 룸살롱에서 업체 관계자들로부터 접대를 받았다.
#2. 조아무개씨가 운영하는 건설사는 2003년 경기도 분당 로얄팰리스 주상복합상가 건설 현장에서 미장공사를 맡았다. 당시 삼성물산에서 하도급계약 업무를 담당한 엄아무개 과장에게 500만원을 제공했다.
비정상적인 거래, 핵심 라인 보고됐을 것
건설업은 갑을 관계가 분명하다. 관급 공사에서는 발주처인 정부부처가 갑이고, 이를 따내려는 건설사들이 을이다. 다시 공사 현장으로 가면 사업권을 따낸 대형 건설사가 갑이 되고, 이들에게서 하청을 따내려는 중소업체가 을이 된다. 그리고 여러 차원의 갑과 을 사이에서 많은 비리가 발생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국내에서 발생하는 부패 사건의 절반 이상이 건설 부패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삼성물산을 협박했다며 3년6개월의 형을 받은 조씨는 이런 먹이사슬에서 을 중의 을이었다. 을은 갑 앞에서 죽는 시늉이라도 한다. 그런데 회사가 망하자 을의 태도가 돌변했다. 조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물산 본사 앞에서 시위를 하며 돈을 요구했다. 갑의 약점을 잡고 협박한 것이다. 조씨는 그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5억9천만원의 돈을 받고도 다시 삼성물산 쪽을 협박하다 감옥 신세를 지고 있다.
삼성물산은 공갈범으로 돌변한 협력업체 사장을 달래는 데 또 다른 을을 내세웠다. 되도록 직접 나서려 하지 않았다. 공갈범의 요구 사항을 파악하고 무마하는 데 또다른 협력업체인 ㅇ건설 이아무개 대표를 동원했다. 삼성물산 쪽은 “회사가 직접 돈을 건네면 이것이 약점이 될 수 있어 하청업체에 부탁했다”고 해명했다.
중소기업들은 삼성물산 쪽이 악성 민원을 해결하려고 힘없는 다른 하청업체를 이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동반성장·상생을 외친다고 해도 갑을 관계인 원·하청업체 간의 문화를 개선하지 않고는 이런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다른 문제는 삼성물산이 협박당한 내용이 아직도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판결문에 적시된 삼성물산의 잘못은 한 과장이 500만원을 받은 것뿐이다. 하지만 건설업체들은 한 직원의 비리 때문에 삼성물산이 5억9천만원을 내놓았으리라 보지 않는다. 한 10대 건설사 관계자는 “5억9천만원은 보통 직원의 10년 연봉에 해당되는 금액”이라며 “그 돈을 내줄 때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약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정상적인 거래 상황에서 수억원의 돈이 지급되는 것이라면 실무 라인에서 끝나지만 삼성물산의 시스템을 고려하면 비정상적인 돈이 빠져나간 것은 핵심 라인까지 보고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윤리경영·상생은 어디로 갔나
이런 업계 관행과 사정 탓에 조씨가 틀어쥔 삼성물산의 약점은 ‘허위계약서를 통한 비자금 조성’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가짜 계약서를 만들어 공사를 준 것처럼 꾸민 뒤 그 돈을 지급하지 않고 삼성물산이 비자금으로 축적했으리라는 의혹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건설사 관계자는 “삼성물산을 비롯한 다른 대형 건설사들이 나도 모르는 계약서를 만들어놓고 그 돈을 준 것으로 위장한 경우를 경험한 바 있다”고 말했다. 조씨에게 돈을 건네는 것을 주도한 박기성 전 삼성물산 전무는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에서도 차명계좌로 비자금을 갖고 있어 소환조사를 받은 바 있다.
이에 대해 삼성물산 쪽은 “비자금 조성 의혹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대신 5억9천만원을 지급한 이유에 대해 “조씨로부터 향응·접대를 받은 (삼성물산) 직원들의 명단을 건네받아 퇴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 감사를 해 접대받은 사실이 드러난 일부 직원에 대해 퇴직 등 조처를 취했다”며 “그 사실을 인정해 돈을 건넨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조씨의 계속된 1인시위 등으로 회사를 방문하는 부동산 재개발 조합원 등 발주처 관련자들에게 회사 이미지가 실추돼 공사 수주에 끼칠 불이익, 회사 직원들의 비위 사실이 언론에 공개될 경우 삼성물산의 ‘래미안’ 브랜드에 끼칠 부정적 영향, 조씨의 불특정 삼성물산 직원들을 상대로 한 무차별 폭언으로 인한 직원들의 사기 저하 등을 염려했다”고 해명했다.
삼성물산은 국내 건설사 가운데 상생에 신경 쓰는 기업으로 꼽힌다. 2009년에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2년 전 체결한 하도급 공정거래 협약을 잘 이행해 우수(A) 등급을 받았다. 삼성물산이 협력사와의 공정거래 및 상생협력을 잘 이행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건설업계에서는 드물게 2008년과 2010년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도 펴냈다. 윤리경영도 강조한다. 경영 원칙으로 △법과 윤리 준수 △깨끗한 조직문화 유지 △고객·주주·종업원 존중 △환경·안전·건강 중시 △글로벌 기업시민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 등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번 조씨 사례를 보면 삼성물산이 강조하는 ‘윤리경영’ ‘상생’ 뒤에는 하청업체의 눈물이 서려 있을 개연성이 크다. 더욱이 삼성물산이 국내 최대 건설사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다른 건설사들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이런 비리는 손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번 사건도 조씨가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면 삼성물산의 비리 혐의는 미궁으로 빠질 공산이 크다.
이에 대해 삼성물산 관계자는 “최고경영자(CEO)가 바뀌면서 더 이상 협박에 시달릴 수 없다고 판단해 고소를 하게 된 것”이라며 “삼성물산이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과거 관행을 끊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차원에서 소송 등의 조처를 취한 것”이라고 밝혔다.
불공정 거래 강력 제재해야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뚜렷한 조처가 나와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경실련 김건호 국책사업감시팀장은 “국내 건설시장은 소수 대기업이 원청업체로 자리잡고 나머지 중소 건설사들은 이에 종속된 하청업체인 상황”이라며 “그런 상황에서 허위계약서, 이면계약서 등을 통해 하청업체를 쥐어짜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또 “정부는 대기업으로부터, 대기업은 중소기업으로부터 접대를 받는 등의 먹이사슬 구조에서는 늘 피해자는 제일 아래의 중소기업이 될 수밖에 없다”며 “이런 불공정 거래를 끊으려면 우선 그런 사실이 드러날 경우 지금처럼 단순 벌금형에 그치지 않고 훨씬 강력한 제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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