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15일로 쌍용자동차가 정리해고한 노동자들의 항의투쟁이 1천 일이 됐다. 1천일이 흐르는 사이 지난 2월13일 민아무개(49·희망퇴직자)씨를 비롯해 9명이 사망하고, 1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음의 행렬’이 언제 끝날지 가늠하기 어렵다. 남아 있는 이들은 극심한 트라우마(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 회사의 태도는 변함이 없고, 쌍용차 해고자들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APG자산운용 “마힌드라 이미지 훼손 우려”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지자 APG자산운용 등 세계적 기관투자자들이 움직이고 있다. 2010년 삼성전자 백혈병 산업재해 논란에 대해 삼성 쪽에 진상 규명을 요구한 그들이다. APG자산운용을 비롯한 8곳의 기관투자가가 당시 삼성전자 최지성 사장(현 부회장) 앞으로 공동 질의서를 보내, 백혈병 사망자에 대한 삼성의 투명한 조사와 사실관계 규명을 촉구한 바 있다.
세계 3대 기금운용사 가운데 하나인 네덜란드 APG자산운용이 먼저 움직였다. 지난 2월20일 쌍용차의 대주주인 인도 마힌드라그룹에 쌍용차 사태에 대한 우려와 함께 해결 의지를 묻는 질의서를 보냈다.
APG자산운용은 우선 쌍용차 사태의 장기화에 대해 투자자로서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 내용은 이렇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장기화할 경우 대주주인 마힌드라그룹의 책임이 거론될 수 있다. 그 경우 마힌드라그룹의 투자자로서 기업 이미지와 영업에 끼칠 영향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주주로서 마힌드라그룹이 그동안 사회와 소비자에게 쌓아온 신뢰를 높이 평가하는 상황이어서 더욱 우려된다.” 아울러 마힌드라 경영진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마힌드라그룹 경영진은 쌍용자동차 노사분규의 성격과 경과, 그리고 사안의 복잡성에 대해 대주주로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지”, “대주주로서 기업 이미지 훼손 등을 사전에 막기 위해 쌍용차 경영진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추궁했다.
조만간 다른 기관투자자들도 APG자산운용의 움직임에 동참할 전망이다. APG자산운용 관계자는 “그동안 다른 기관투자자들도 (쌍용차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먼저 마힌드라그룹에 쌍용차 사태에 대한 견해를 물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후 다른 기관투자자들도 쌍용차 사태에 대한 논의를 계속 진행해 비슷한 질의서를 보낼 예정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런 움직임은 사회책임경영(CSR)을 중시해온 마힌드라그룹에 상당한 압박이 될 수밖에 없다. 마힌드라그룹은 2010년 10월 쌍용차를 5225억원에 인수했다. ‘먹튀’ 논란에 휩싸인 중국 상하이차에 이어 쌍용차 주식 70.4%를 가진 새 주인이 됐다. 마힌드라그룹은 자동차 및 농기계 부문 파완 쿠마 고엔카 사장을 등기임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 앉히는 등 쌍용차 경영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CSR에도 적극적인 마힌드라그룹
마힌드라그룹은 농기계·스포츠실용차(SUV)·트럭 등을 생산하는 것은 물론, 금융·정보기술(IT)·부동산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100여 개국에 14만4천여 명을 고용하고 있으며, 지난해 세계에서 144억달러 규모의 매출을 올렸다. 규모만큼 사회적 책임 경영에도 적극적이다. 지난해 세 번째로 발간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살펴보면 인권경영에도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고 적어놨다. 마힌드라그룹은 보고서에서 “2009년 5월 경제적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인권을 고려하도록 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경영활동 중 투자 계약서를 작성할 경우 반드시 인권 항목을 포함시키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런 노력으로 기관투자자들에게 마힌드라그룹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 기관투자자 관계자는 “마힌드라그룹은 인도 타타그룹과 함께 사회적 책임 경영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쌍용차 사태로 인해 마힌드라그룹의 이미지에 먹칠을 입을 수 있는 상황이 됐다. 특히 볼보·랜드로버·다임러·르노 등에 자동차 부품을 공급하는 등 유럽 시장의 비중이 높아 기관투자자들의 압박에 민감한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회사는 아직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쌍용차 관계자는 “기관투자자가 마힌드라그룹에 보냈다는 내용을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라며 “공식적인 입장은 아직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반면 쌍용차 노조는 기대감을 표시했다. 쌍용차 노조 이창근 전 기획실장은 “인도 타타그룹이 인수한 전북 군산의 타타대우자동차의 경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등 사회책임경영에 나서 기업 이미지가 좋아졌다”며 “인도에서 타타그룹만큼 평가를 받는 마힌드라그룹도 쌍용차 사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전 실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는 더 커질 수밖에 없고, 마힌드라그룹의 이미지를 훼손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 기관투자자들이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세계적 기관투자자들이 삼성전자에 이어 2년도 안 돼 다시 한국 기업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겨레경제연구소의 이원재 소장은 “한국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글로벌 자본이 국내 기업을 인수하는 상황에서 사회책임경영을 잘하는 게 점점 필수 요소가 되고 있다”며 “앞으로 유럽계 연기금 투자자를 중심으로 이런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국내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비롯한 많은 단체들도 인도 마힌드라그룹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국제민주연대를 비롯해 천주교인권위원회, 문화연대, 다산인권센터 등 49개 단체는 2월24일 마힌드라그룹 경영진 앞으로 ‘한국의 노동·인권·시민·사회 단체들이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서한을 보냈다.
49개 단체 “사태 해결 위한 대화 나서야”
이 단체들은 편지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고통은 스무 명이 넘는 죽음에 이르고 있다”며 “한국의 인권·시민·노동·사회 단체들은 마힌드라가 쌍용차 인수 후에도 성실히 책임져야 할 사안들에 대해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아울러 “사태 해결을 위한 대화에 적극 나설 것”과 “무급자, 해고자, 비정규직 노동자, 희망퇴직자의 복직” 등을 촉구했다.
민주통합당 정동영 의원도 이런 흐름에 힘을 보탠다는 계획이다. 정 의원실 관계자는 “2월 말 혹은 3월 초에 인도 마힌드라그룹의 최고 경영진에게 사태 해결을 위한 서한을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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