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외풍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남유럽의 재정위기가 유럽 핵심국으로 확산되고, 그 여파가 역내 대형 금융권에 번져 국제 금융시장이 출렁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리먼브러더스 파산 쇼크의 ‘유럽판’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위기의 정점에 놓인 그리스가 부도 처리될 경우, 세계경제가 핵폭탄을 맞을 수 있다는 논리다.
미국에서 이른바 ‘더블딥’(Double-dip·경기침체 뒤 잠시 회복기를 보이다가 다시 침체에 빠지는 현상)의 망령이 거듭 나타나는 점도 골칫거리다. 그동안 미국의 경기회복을 견인해온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이하 연준)의 ‘돈 풀기’(양적 완화)가 일단락되고 정부의 ‘마중물 붓기’(경기부양책)도 바닥을 드러내, 세계 최대 경제국에 대한 신뢰가 다시 실추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흔들리는 이유
아이러니한 것은 지구 반바퀴는 돌아야 하는, 먼 곳에 위치한 우리나라가 이 충격에 크게 휘둘린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세계화됐고 세계경제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문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강 건너 불’일 수 있는 일 아닌가?
대외 불안에 국내 금융시장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단적인 예다. 사실 우리나라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와 관련한 노출이 미미했다. 하지만 위기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전염되고 증폭됐다. 대규모 자산 손실로 유동성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돼 있던 외국 금융기관들이 우리나라에 빌려준 돈을 무차별적으로 회수했다. 외화유동성 위기가 촉발됐다.
우리 경제에 무슨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워낙 자기네 사정이 다급했던 탓이지만, 그 여파는 참혹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를 조소하며 이른바 ‘탈동조화’ 기대에 고취돼 있던 우리 경제가 심각한 경기침체에 내몰린 것이다. 특히 국내 금융권에서 달러의 씨가 말라 정상적인 수출입 거래에 큰 차질이 일어났다.
지금도 사정은 유사하다. 지난 8~9월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빠져나간 외국인 투자가 6조원이 넘는다. 최근에는 채권에서도 외국인의 매도가 확산되고 있다. 외화유동성 위기의 주범인 외화 단기차입은 이미 6~8월 76억달러나 빠져나갔다. 이런 가운데 국내 경제의 성장 전망도 연이어 하향 조정되고 있다.
대외 충격에 우리 경제나 금융시장이 취약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우리 경제의 높은 대외의존성, 특히 수출의존성이 문제다. 우리나라 명목 국내총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60%에 육박한다. 2000년대 초만 해도 30%를 겨우 넘었으나, 이제는 ‘수출 아니면 죽음’이라고 할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한때 내수 부양을 통해 경제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논리는 ‘카드 대란’의 참혹한 충격을 거치며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대외 경기의 부침에 민감한 속성을 보인다.
국내 금융시장의 대외 개방도가 높다는 점도 문제다. 명목 국내총생산 대비 외국인 총투자로 측정한 금융개방도 역시 2000년대 초반 40% 수준에서 최근 80% 안팎으로 올라섰다. 금융 선진화를 외치며 부지런히 금융 자유화를 도모한 영향이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외국인 투자가 대외 불안을 국내로 전파하는 핵심 고리로 자라났다.
국내 주식시장을 비롯해 금융시장의 뛰어난 환금성도 때때로 취약한 고리로 작용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대외 불안이 심화될 때 차익 실현이나 유동성 확보 차원에서 우리나라를 집중 공략하는 것은 물론, 중국 등 주변 아시아 국가들의 금융시장이 대부분 열악한 상황에서 경제 불안에 대한 대리 변수로서 우리 시장이 활용되기 때문이다.
단기차입 규제해도 사각지대는 남아
외화유동성 위기 이후 정부는 대외 충격에 대한 우리 경제나 금융시장의 취약성을 개선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처음에는 선물환 포지션 규제에 나서더니, 이내 외국인 채권투자에 대한 과세를 부활시키는 한편, ‘은행세’로 불리는 외환건전성 부담금을 도입하는 등 자본유출입 변동성 규제의 ‘삼각 축’을 마련한 것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 발행하는 외화채권, 즉 김치본드에 대한 발행용도 제한 및 과세도 도입했다. 대부분 대외 불안이 국내로 전염되는 데 핵심 고리로 작용하는 단기성 외자 차입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흔히 자본유입을 뭉뚱그려서 보지만, 자본유입이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지는 않다. 주식이나 채권에 대한 외국인의 직접투자는 대체로 국내 금융시스템에 큰 위험이 되지 않는다. ‘과잉’이나 ‘급작스런 중단’(Sudden Stop)과 같은 부작용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기초경제 체력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 수반되지 않는 이상 심각한 문제를 낳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차입, 특히 단기차입이다. 차입 자금이 대부분 금융권의 주요한 자금조달 수단으로 활용되며 국내 신용이나 유동성 여건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자금이 갑자기 대규모로 빠져나가면 국내 금융시스템이 크게 흔들린다. 외화유동성 위기 때 익히 체험한 바다.
단기성 차입을 규제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국내 거시건전성 향상’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규제가 있으면 허점을 뚫으려는 시도가 있는 법이다. 정부의 다각적인 규제 노력에도 아랑곳 않고 여전히 외자가 빈번히 유출입함으로써 국내 금융시장의 혼란은 진정되지 않고 있다. 규제의 사각지대를 노린 투기가 기승을 부리는 탓이다.
“금융의 수레바퀴에 모래 끼얹기”
규제의 가짓수를 늘린다고 해서 우리나라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농락’이 쉽게 꺼질 것 같지 않다. 요는 우리나라 경제나 금융시장의 대외의존성, 대외 충격에 대한 민감성을 완화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단숨에 해치울 수는 없다. 대신에 포괄적인 자본유출입 규제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국제사회에서 논의가 확산되고 있는 이른바 ‘금융거래세’가 좋은 예다. 한때 ‘뜨거운 감자’로 내팽개쳐진 토빈세의 취지를 되살려 국제 투기자금의 흐름을 억제할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토빈세를 창안한 미국의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은 토빈세에 대해 “글로벌 금융의 수레바퀴에 모래를 끼얹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누군가는 “금융의 DNA 개편을 위한 좋은 계기”로 평가하기도 했다. 수익 극대화 원리로 무장한 금융의 전횡을 견제하는 한편, 우리나라 금융시장의 대외취약성을 완화하려면 곰곰이 짚어볼 필요가 있는 쟁점이다.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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