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끈이 긴 사람들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 일단 공부는 하고 볼 일이라던 아버지·어머니 말씀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포털 사이트에 ‘가방끈’을 검색해보시라. 해맑은 아이들이 가방끈을 길게 늘여 물에 빠진 강아지를 구출하는 눈물겹도록 훈훈한 사진을 볼 수 있다. 끈은 그렇다 치고 많이 배워서 끈이 긴 가방 속에는 뭐가 있을까. 많이 배우신 외교통상부 관리들 가방 속에는 일단 약이 들었을 것 같다. 가장 잘 팔리는 건 ‘모르는 게 약’이다. 본인이 드시기보다 주로 골치 아픈 데 관심 많은 국민에게 처방하는 약에 해당한다. 가령 외국어에 경제학, 국제관계 등 가방 100개에 담아도 모자랄 책들을 공부한 외교관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따위에 관심을 쏟는 국민이야말로 이 약을 먹어야 할 사람들이다. 외교부는 답답하다. 이해도 못할 자료를 공개하라고 행정소송까지 내는 민변이 이상하다. 약 먹일 시간이다.
‘모르는 게 약’발이 자꾸 떨어지는 게 큰일이다. 일반약 슈퍼 판매 논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모르는 게 약’ 판매가 위기에 처했다. 최근엔 약장수들 사이의 엇박자도 벌어졌다. 한때 같이 약을 팔던 약장수들이 지금 약의 처방전 여부를 두고 다툰다.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9월28일 법정에서 외교부 통상교섭본부가 4년간 존재를 부인했던 미국 전문직 비자 쿼터 관련 외교서한 2개를 공개했다. 외교부가 국민에게 ‘모르는 게 약’ 처방을 4년간 내려왔던 문서다.
“첫 번째 외교서한은 토니 에드슨 당시 미국 국무부 비자담당 부차관보가 김종훈 현 통상교섭본부장(당시 협상 수석대표)에게 보낸 것으로, ‘한국이 전문직 비자 쿼터를 취득하도록 협조하겠다’는 내용이다. 이에 통상교섭본부는 발신자 명의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로 격상하고 한국에 더 유리한 내용으로 바꿔달라고 미국 쪽에 수정서한을 요청하며 초안을 보냈다. 이것이 김현종 전 본부장이 공개한 두 번째 외교서한이다.”( 2011년 9월29일치 참조)
현직 약장수들은 고개를 휘휘 젓는다. 그런 건 없단다. 약장수가 약 먹은 것 아니냐는 투다. 통상교섭본부는 외교서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 “전문직 비자 쿼터와 관련해 양측의 합의가 도출되지 않아 외교서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외교부의 공식 견해다. 무역규모로 세계 10위 안에 드는 대한민국 통상교섭본부의 가방끈 긴 현직 약장수들과 전직 약장수가 문서 존재 여부를 두고 다툰다. 가방끈이 길고 가방이 크면, 가방이 엉킨다?
김현종 전 본부장의 주장대로라면, 한-미 FTA의 핵심 외교서한 원본을 퇴임한 통상 관료가 갖고 있고, 통상교섭본부는 그 존재에 대해 모르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황망히 약상자에서 눈물 닦을 솜을 찾았다. 가방끈 긴 고위 관리들이 가방끈 짧은 학사 나부랭이 기자와 같은 수준의 논쟁을 벌이는 사실이 눈물겨웠다. 보낸 사람은 있고 받은 사람은 없는 예비군 훈련 통지서 공방과 닮았다. 아아, 문득 가방끈 긴 분들의 가방 검사를 하고 싶어진다. 마감시간 까먹도록 편집장에게 ‘모르는 게 약’ 처방 좀 하게시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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