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튀.’
‘먹고 튀기’의 줄임말이다. 국어사전에도 등장하지 않는데 어느새 익숙한 말이 돼버렸다. 흔히 몸값을 많이 받았지만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프로스포츠 선수를 가리킨다. 여기에 ‘자본’이라는 한 단어가 붙으면 뜻은 더욱 오묘해진다. ‘먹튀자본’은 기업의 성장보다는 단기 이익에 눈먼 투기성 자본을 가리킨다. 최근의 예로는 쌍용자동차를 인수했던 중국 상하이자동차, 외환은행을 사들였던 론스타 등을 들 수 있다.
‘무늬만 국산’으로 시장 2위 한 BAT코리아여기, 또 하나의 먹튀 논란을 낳을 만한 자본이 있다. 2002년부터 우리나라에서 담배를 생산·판매하고 있는 브리티쉬아메리칸토바코(BAT)코리아. BAT코리아의 영업 행태를 보면, 먹튀의 차원이 약간 다르다. ‘한 건’으로 이익을 챙겨 국외로 튀는 다른 자본과 달리, 해마다 ‘먹튀’를 되풀이한다는 쪽에 가깝다. 도대체 어떻기에? 사연을 보자.
지난 2001년은 우리나라 담배업계에서 오래 기억할 만한 해였다. ‘던힐’ ‘켄트’ 등으로 유명한 세계적 담배회사인 BAT가 10년 동안 1조4천억원을 투자해 경남 사천시에 담배공장을 건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공장은 지어졌고, 해마다 4억 갑의 던힐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포장에는 ‘Made in Korea’라는 문구도 붙었다. 말하자면, 더 이상 외제 담배가 아니라 국산 담배였다. 세련된 디자인의 던힐 등이 인기를 끌자 생산은 꾸준히 늘었다. 업계 통계를 보면, BAT코리아는 한국 담배시장의 17.6%(7억9800만 갑)를 차지한다. 지난해 한국에서 누군가의 입에 물렸던 담배 6개비 가운데 1개비는 BAT코리아의 제품이라는 뜻이다. ‘말버러’로 유명한 한국필립모리스나 ‘마일드세븐’을 앞세운 JTI코리아 등 다른 외국 담배업체들을 따돌렸다. 토종업체인 KT&G에 이어 시장 2위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그런데 BAT코리아의 이득이 쏠리는 방향이 야릇하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원료 구입, 둘째 사회공헌, 셋째 자금 흐름 문제다.
먼저, 담뱃잎 구입의 문제는 200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BAT코리아의 존 테일러 사장은 기자회견장에서 “BAT코리아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담배 제조에 필요한 원부자재를 최대한 한국 내에서 조달할 방침”이라며 “특히 한국 잎담배 농가로부터 원료를 사들이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외국인 사장의 약속은 공염불로 끝났다. BAT코리아는 이후 국산 담뱃잎을 사지 않았다. 그 뒤 10년 동안 BAT코리아는 원료 담뱃잎을 모두 외국에서 들여왔다. 말하자면, BAT코리아의 담배는 국내에서 조립만 된 ‘무늬만 국산’이었다. BAT코리아가 사천에 공장을 설립한 것은 2001년부터 완제품 담배에 부과되는 고율의 관세(40%)를 피하려는 목적이 컸다. 돌이켜 보면, 2001년 당시 테일러 사장의 발언은 양담배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에 물을 타려는 ‘여론 무마용’ 성격이 짙었다.
사회 기부 ‘짠돌이’, 주주배당 파격적그 뒤에도 회사의 ‘립서비스’는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2006년 부임한 데즈먼드 노턴 사장도 기자간담회에서 “담뱃잎을 국산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이 약속도 ‘검토’로만 끝났다. 물론 업체의 처지에서 약속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었다. 특히 우리나라 담뱃잎은 수입품보다 가격이 2~3배 비싸다. 비용 부담이 큰 국산 담뱃잎을 굳이 사들여야 할 도덕적 의무를 업체들이 져야 할 까닭도 없었다. 토종 담배업체인 KT&G는 국산 담뱃잎을 사고 있지만, 이곳은 국산 담뱃잎을 구매해야 한다는 ‘국민정서법’에 묶여 있는 탓이 크다. 외국 담배업체가 그 법을 따라야 할 까닭은 없다. 국내에서 잎담배를 경작하는 농민들이 심심찮게 BAT코리아 본사를 찾아 수매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지만, BAT코리아사가 이를 계속 거부하는 배경이다. ‘국민정서법’을 어겨도 BAT코리아의 판매는 꾸준히 늘었다. BAT코리아 담당자는 “2001년 회사의 약속은 과거의 일이라 확인되지 않는다. 2006년 사장의 발언은 언론 보도 과정에서 내용이 와전된 것이며, 담뱃잎 구매를 약속한 바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으로서는 국산 담뱃잎을 살 계획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약속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졌다.
둘째, BAT코리아의 사회공헌 기부액이 민망한 수준이다. BAT코리아의 올해 감사보고서를 보면, 매출액 대비 기부금액 비율은 2009년 0.04%(2억7천만원), 2010년 0.05%(3억700만원)이다. 경쟁사인 KT&G의 지난해 기부금 비율인 1.18%(294억원)보다 크게 낮다. BAT코리아의 사회공헌 기부액은 이 회사의 접대비용인 4억9천만원(2009년)~5억5천만원(2010년)보다도 훨씬 적다.
BAT코리아는 사회 기부에는 ‘짠돌이’였지만 주주배당에는 파격적으로 용감했다. 감사보고서를 보면, 7만원짜리 주식 하나에 2009년 404만원, 2010년 153만원씩 배당했다. 배당률로 치면 각각 5778%(324억원), 2189%(123억원)였다. 대박의 주인공은 ‘브라운앤드윌리엄슨홀딩스’(B&W)라는 긴 이름의 미국계 회사였다. 이 회사가 BAT코리아의 주식 8천 주를 모두 가지고 있다. B&W의 대주주는 영국에 있는 BAT 본사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배당된 액수는 고스란히 외국으로 옮겨간 셈이다. 물론 회사가 장사를 잘해서 주주에게 높은 배당을 주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회사의 수익을 나눌 때 지역사회와 주주가 나누는 몫이 이렇게 차이 나게 되면 문제가 있다. 국내 기업에서 사회공헌 관련 업무를 보는 한 관계자는 “담배산업이 흡연자의 건강이나 환경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점을 생각하면 BAT코리아의 기부금 행태는 이상한 정도를 넘어 비도덕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BAT코리아 쪽은 전자우편을 통해 “BAT코리아는 이른바 사회적 기부를 영국의 가이드라인을 기준으로 보고하며, 이는 국내 다른 회사들이 사회적 기부를 계산하는 방식과 차이가 있다”고 답해왔다. 그렇다면 ‘한국 기준’으로 바꾼 기부금 액수는 얼마일까. BAT코리아의 임원에게 직접 물었다. 그는 “확인해주기 곤란하다. 다른 기업보다는 좀 낮을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옹색한 논리를 헤친 실상은 더욱 옹색했다.
탈세 의혹으로 국세청 수차례 세무조사셋째, BAT코리아의 자금 흐름이 묘하다. 감사보고서를 보면, BAT코리아는 매출액(5870억원) 가운데 매출원가(5802억원)의 비중이 무려 98.8%나 된다. 다른 담배업체들의 매출원가 비중과 비교해도 무척 높다. KT&G가 40.1%, 한국필립모리스가 37.0%, JTI코리아가 66.5% 정도다. BAT코리아만 유독 원가 비중이 높았다. 까닭은 무엇일까. BAT코리아의 지배구조와 수익흐름도를 보면 수수께끼는 풀린다(표 참조). BAT코리아는 법적으로 따지면, 공장과 유통 부문이 다른 법인으로 따로 영업한다. 그런데 BAT코리아의 공장은 생산한 담배를 유통 부문에 바로 넘기지 않고, 굳이 로스먼스라는 회사의 한국 지사를 한 번 거쳐 판매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로스먼스가 폭리를 취한다는 점이다. 로스먼스는 담배를 2200억원에 사들여 5830억원에 되팔아, 차액인 3630억원을 쉽게 번다. 결국 BAT코리아는 높은 가격에 담배를 사들이며 영업손실을 1105억원이나 떠안았다. 크게 보면, ‘재주는 BAT코리아가 부리고, 돈은 로스먼스가 가져가는’ 구도다. 왜 이렇게 복잡한 거래를 하는 걸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해 보인다. 투기자본감시센터 공동대표인 이대순 변호사는 “BAT의 수법을 보면, 탈세를 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로스먼스가 조세피난처에 만든 페이퍼컴퍼니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로스먼스사의 정체는 무엇일까. BAT코리아에 문의했다. BAT코리아 쪽은 “확인해줄 수 없다”고 답했다.
국세청도 냄새는 맡았다. BAT코리아의 탈세 의혹에 대해 2000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세무조사를 벌였다. 2003년에는 BAT 등 외국계 담배업체 3곳에 원가 조작 등의 수법으로 탈세를 했다며 132억원을 추징했다. 2005년~2006년에도 BAT코리아에 법인세와 주민세 483억원과 부가세 123억원 등 606억원을 부과했다. 당시 탈세 시비는 2009년 조세심판원이 BAT코리아의 손을 들어주고 국세청이 부과액을 모두 돌려줘 마무리됐다. 2008년에는 BAT코리아 쪽이 세금 추징을 무마하려고 국세청에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올해 2~3월에도 BAT는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았다. 아직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다. 탈세의 ‘정황’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는 뜻이다.
BAT코리아가 최근 담배 가격을 올리기로 결정해 다시 한번 구설에 휘말리고 있다. 이 회사는 4월28일부터 담배 가격을 한 갑 2500원에서 2700원으로 올려받는다고 지난 4월21일 발표했다. BAT코리아는 “지난 5년 사이 담뱃잎 가격이 약 60%, 인건비가 30% 늘어서 경영이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이유를 들었다. 잎담배 경작 농민들이 바로 들고일어섰다. 농민 50여 명은 지난 4월26일 대전 엽연초생산조합중앙회 앞에서 집회를 열고 BAT코리아를 성토했다. 이들은 논리는 간단하다. “BAT코리아가 국내산 잎담배를 사겠다는 약속은 어기며 가격만 올리고 잇속을 챙기고 있다. 외국산 담배의 국내 점유율이 오른 만큼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담배업계의 한 관계자는 “BAT코리아의 재무제표를 보면, 한국 종업원에게 주는 임금을 제외하고는 기업이 창출하는 대부분의 수익을 고스란히 외국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말로만 하는 책임 있는 기업 경영BAT코리아의 누리집(www.batkorea.com) 초기창에는 아예 ‘책임경영’ 부분이 따로 마련돼 있다. 여기에는 회사 직원들이 연탄을 옮기며 자원봉사를 하는 사진이 큼지막하게 나와 있다. 옆에는 이런 글도 함께 실렸다. “담배산업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은 만큼, 브리티쉬아메리칸토바코는 책임 있는 기업 경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BAT의 행태를 안다면, 이 말에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color="#1153A4">국산 담배 가격도 오르나?</font>
<font size="4"><font color="#008ABD">올해보다 내년에 오를 수도</font></font>
BAT코리아가 담뱃값을 200원씩 올리자 다른 담배 가격도 함께 올라갈지 궁금해하는 애연가가 있을 법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적어도 올해에는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낮다. 내년에는? 물가 수준이 변수지만, 가능성이 큰 편이다.
우리나라 담배 가격을 내다보려면, 먼저 가격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담배 가격 2500원 가운데 1550원(62%)은 담배소비세 등 온갖 세금으로 돌아간다. 나머지 950원이 KT&G와 유통업자가 나눠가지는 몫이다. 담배 가격은 담배소비세, 교육세 등의 세율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일단 KT&G에 물어봤다. 관계자는 “정부가 담배 관련 세율을 올리지 않는 한 지금으로서는 값을 올릴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 세제실의 관료도 “담배 관련 세제를 높이자는 논의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소비자물가 인상률이 4%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정부가 담배 가격을 올리는 ‘눈치 없는’ 수를 둘 가능성은 크지 않다.
내년으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정부는 2009년부터 담배 가격 인상을 꾸준히 추진했다. 부처 간의 이해도 맞아떨어진다. 기획재정부는 세수 확보, 보건복지부는 흡연율 감소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2009년 기획재정부는 담배와 주류에 부과되는 세금인 이른바 ‘죄악세’(sin tax) 인상을 추진하다 여론의 싸늘한 반응 때문에 포기한 바 있다. 그해 말 기획재정부의 한 고위 관료는 기자들과 함께한 사석에서 “담배세에 죄악세라는 별명이 붙는 바람에 정부가 음주와 흡연을 죄악시한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샀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지난해에도 정부가 담배세 인상을 추진한다는 말이 계속 오갔지만, 올해 들어서는 소비자물가가 고공행진을 하면서 얘기가 쑥 들어갔다. 물가 사정이 풀리면, ‘담뱃값 인상론’은 언제든 다시 봄날 개구리처럼 튀어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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