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가 아니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해명이다. 지난 3월10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단회의에 앞서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한 직설적 비판과,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이 낙제점을 겨우 면한 수준이라는 뉘앙스의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데 대한 진화용이 아니다. 1995년 4월13일 중국 베이징 주재 한국 특파원과 가진 간담회에서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뒤 나왔던 해명이다.
16년 뒤인 2011년 3월16일에도 그의 해명은 이어졌다. “발언의 진의가 그게 아니었다. 당혹스럽다.” 김순택 삼성 미래전략실장이 사장단회의 중에 이 회장의 말을 전하는 형식이었지만, 표현은 16년 전과 판박이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청와대와 정부
“경제학을 공부했지만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들은 적이 없고, 사회주의 용어인지, 자본주의 용어인지, 공산주의 용어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정부 정책이 과거 10년에 비해 상당히 성장을 해왔으니 낙제 점수는 아니겠죠. 흡족하다기보다는 낙제는 아닌 것 같다.”
이건희 회장의 전경련 발언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초과이익공유제를 제기한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은 “색깔론이나 이념 등의 잣대로 매도하지 말라”고 맞받아쳤다. 대기업들이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중소기업 협력사의 납품단가를 후려치고, 그 결과 이익이 애초 목표치보다 더 나오면 이를 직원 성과급이나 사내 유보금으로만 쓰는데, 그 일부를 협력사의 기술개발과 고용안정에 활용하면 결국 혜택이 대기업에도 돌아오니,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위해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는 삼성의 긴급 진화로 다소 누그러진 듯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3월14일 국회 답변에서 이 회장의 낙제점 발언에 대해 “실망스럽다”고 불쾌감을 드러내며,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서도 “취지를 살려야 한다”고 ‘지원사격’에 나섰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친기업,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걸고 규제 개혁과 법인세 인하, 저금리·고환율 정책으로 기업들을 지원해왔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어 “일부 기업들이 정부의 물가관리 방식이 기업 팔 비틀기라고 불만을 얘기하는데, 물가 상승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소수 대기업이 지배하는 독과점 구조 아니냐”면서, “재벌들이 눈앞의 이익만 좇을 게 아니라 사회와의 상생을 생각하는 쪽으로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부에서는 비판 여론을 무릅쓰고 사면·복권을 해준 이 회장이 이럴 수 있느냐며 배신감을 내비친다. 김순택 삼성 미래전략실장은 “그동안 정부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걸어 규제를 해소하고, 기업 하기 좋은 환경과 정책을 펴와서 기업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면서, “정부 정책에 적극 협조하고, 특히 동반성장에 대해 이건희 회장의 뜻도 강하니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적극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청와대는 재계 1위인 삼성 회장의 발언은 ‘엎질러진 물’처럼 이미 정부에 큰 흠집을 냈다며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삼성과 전경련은 공식적으로 이번 사태가 재벌 총수들 특유의 어법이 부른 오해라고 해명한다. 전경련의 한 임원은 “(총수들은) 웬만히 잘한 것은 눈에 차지 않고, 실제 잘했더라도 자칫 방심으로 이어질까봐 칭찬에 인색하다”면서 “낙제점을 면했다는 말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지난해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멀티미디어 가전 전시회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그는 일본의 큰 전자회사 10개보다 삼성전자가 낸 이익이 더 많은 상황에서도 “10년 전만 해도 삼성이 지금의 5분의 1 크기에 구멍가게 같았는데 까딱 잘못하면 그렇게 된다”면서 칭찬보다 위기감을 강조했다.
하지만 삼성이나 재계 내부에서 이런 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이 회장이 평소 소신을 밝힌 것으로 보는 이가 많다. 삼성의 한 임원은 “이 회장은 밑에서 적어주는 대로 읽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얘기하는 스타일”이라면서 “전경련 발언은 그룹 차원에서 미리 준비된 발언이라기보다는, 이 회장이 평소 생각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초과이익공유제 ‘싹 자르기’ 시도?그럼 이건희 회장이 초과이익공유제와 이명박 정부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명박 정부가 지난해 동반성장 드라이브를 걸면서 주 타깃이 된 삼성은 항상 바늘방석 위에 앉은 것 같은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부에서는 청와대와 정부가 앞장서서 삼성을 양극화의 주범으로 몰고 있다는 불만이 흘러나왔다. 정권 실세로 불리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2010년) 2분기 삼성전자가 5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이익을 냈는데 가슴이 아팠다”고 말하자 삼성 내부는 크게 술렁였다. 한 임원은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한국이 가장 빨리 회복한 것은 대기업이 수출시장에서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라며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번 것이 과연 죄냐”고 반문했다.
[%%IMAGE2%%]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은 총리 시절 “2009년 말과 2010년 초 사이에 몇몇 중소기업 사장들을 만났는데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 횡포가 너무 심해 차라리 이민 가고 싶다’며 한숨을 쉬더라”는 일화를 여러 자리에서 소개했다. 전경련의 한 임원은 “정 총리가 예로 든 중소기업이 삼성전자의 협력사인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삼성으로서는 큰 부담과 불만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정 위원장이 제기한 초과이익공유제는 삼성이 임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는 초과이익분배제와 거의 흡사하다. 분배 대상을 임직원 외에도 협력사로 늘린 것만 차이가 난다. 삼성으로서는 초과이익공유제 이슈가 확산되는 것에 다른 기업보다 훨씬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 회장의 정운찬 위원장 공격은 일종의 ‘싹 자르기’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은 또 초과이익공유제를 정 위원장의 개인 의견으로 폄하하면서, 가급적 정부 또는 청와대와 분리하는 작전을 쓰고 있다. 삼성 미래전략실의 한 고위 임원은 “정운찬이 혼자 앞서간다”면서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도 반대 의견을 분명히 하지 않았느냐”고 강조했다. 정 위원장이 지난 3월16일 초과이익공유제에 반대하는 최 장관을 겨냥해 “장관으로서 적절치 않은 발언이며, 이명박 정부의 동반성장 의지를 의심케 한다”고 직격탄을 날린 배경에는 이런 물밑 신경전이 깔려 있다.
자본이 대통령 레임덕 부추겼던 과거 경험재계에서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평가에 관해 대체로 할 말을 했다는 의견들이다. 그동안 재계가 갖고 있던 불만을 대변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재계는 정부 초기 친기업 정책에 따른 규제 완화 등으로 수혜를 받은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지난해 이후 정부가 변심했다고 말한다. 대통령이 친서민을 내걸고 직접 대기업을 비판하는 것은 공약 위반으로, 국민의 반기업 정서만 자극했다는 것이다. 삼성의 한 임원은 “이건희 회장은 철학이나 원칙을 중시하는데, 현 정부는 그런 게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보수 언론에서 정부의 친서민·동반성장 정책을 경제논리를 무시한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로 공격하고, 재계에서 이명박 정부를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하는 차’에 비유해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재계에서는 훨씬 더 심한 얘기도 들린다. 재벌그룹의 한 임원은 “기업들 실적이 좋은 것은 기업이 노력해서 그런 것이지, 정부가 잘해서 그런 게 아니지 않으냐”면서 이명박 정부와 큰 시각차를 보였다. 10대 그룹에 속하는 한 대기업의 고위 임원은 “물가관리만 놓고 보더라도 현 정부의 경제 운용 방식은 수십 년 전 과거로 회귀한 느낌”이라고 꼬집었다. 아직은 보수 진영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비판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보다는 낫다는 의견이 다수지만, 일부에서는 아예 노무현 정부 때보다 못하다는 독설까지 흘러나온다.
삼성과 재계 주변에서는 이건희 회장의 발언 파문을 경영 복귀 이후 보여준 행보와 연관짓기도 한다. 이 회장은 3월24일로 경영 복귀 1년을 맞는다. 삼성은 이 회장의 복귀 이후 1년간 큰 변화를 겪었다. 그룹의 컨트롤타워(미래전략실) 새 단장, 이학수 전 부회장을 포함한 핵심 경영진 물갈이, 이 회장의 자녀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부사장의 사장 승진과 경영 전면 포진 등이 대표적이다. 그룹 지배구조 및 승계 구도와 관련된 사안들은 모두 이 회장의 결단을 필요로 한다. 삼성이 지난해 미래 신산업 발굴에 향후 10년간 23조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올해 투자·고용을 사상 최대 규모로 늘리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 회장은 경영 복귀 이후 지속적으로 “지금이 진짜 위기다. …앞으로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그 자리에 새로운 사업과 제품이 자리잡아야 한다”며 미래 신수종사업 발굴을 강조했다.
과거 이건희 회장은 일상 경영은 그룹 컨트롤타워에 맡기고 자신은 큰 경영 화두를 제시하는 스타일을 고수해 ‘은둔의 황제’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이 회장은 삼성 경영에 어느 때보다 주도적으로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전자도 지난해 매출과 순이익이 각각 154조원과 16조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하며, 이 회장의 적극적 행보에 힘을 실어줬다. 삼성의 한 임원은 “이 회장이 죽기 전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경영을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면서 “올해로 69살인 이 회장의 나이와 2세들의 경영 전면 부상을 감안해 경영 승계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요즘은 오히려 승계까지는 상당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얘기가 더 많다”고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이학수 부회장을 대신한 김순택 미래전략실장 체제도 애초 3년 정도를 수명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으나 좀더 길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회장이 4년여 만에 전경련 회의에 참석해 정부를 상대로 재계의 대변자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지난 1년간 일종의 자숙 기간으로 삼성의 내부 정비에 진력했다면, 앞으로는 그룹 외부로 보폭을 더욱 넓힐 것이라는 신호로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정권 초기에는 정치권력이 자본권력에 우위를 보이는 듯하지만 임기 중반을 넘기면 힘의 관계가 역전돼 자본권력이 대통령의 레임덕을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온 과거 경험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이도 많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과 삼성의 잠재적 위험 요인에 대한 경고도 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삼성이 지난해 후발주자로서 여전히 뛰어난 추격 능력을 보여주며 좋은 실적을 거뒀지만, 애플과 같은 시장 선도자로서의 능력은 아직 보여주지 못했다”면서 “이런 사업적 리스크와 이건희 회장의 경영 의욕이 강할수록 커지는 지배구조 리스크가 서로 중첩될 때 삼성이 진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추된 대외적 신뢰 회복 노력해야비자금 사태 이후 실추된 대외적 신뢰 회복이 미진한 것도 위험 요인으로 꼽힌다. 김순택 미래전략실장이 삼성 사장단회의에서 “앞으로 사랑받고 존경받는 삼성이 될 수 있도록 사회와 함께 간다는 자세로 겸손하고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경영에 전념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를 의식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동반성장을 둘러싼 정부 및 사회와의 갈등이나,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삼성전자 노동자 백혈병 산재 의혹 사건은 사회책임경영이 강화되는 국제적 추세와 맞물려 삼성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 정운찬 위원장은 최근 “이건희 회장이 20년 전부터 동반성장을 해왔다고 하는데, 지금 삼성이 동반성장 잘한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의 진정한 쇄신 없이 이건희 회장의 전경련 발언 같은 일들이 되풀이될 경우 자칫 ‘삼성=오만한 자본권력’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만 강화될 수 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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