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의 복귀에 이어 전략기획실의 부활은 다시 한번 후진적 경영 형태를 보인 것이다. 이런 식의 경영이 지속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심화되고 결국 외국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세계 최대 투자기관 관계자)
법률적 책임 없는 ‘영구 회장직’
삼성그룹이 옛 전략기획실과 같은 그룹 컨트롤타워를 만들겠다고 밝히면서, 2008년 발표한 경영쇄신안의 원점 회귀에 대해 외부 투자자들이 우려하고 있다.
이미 지난 3월 이건희 회장의 복귀 때도 이런 우려가 확인된 바 있다. 미국의 세계적 기업지배구조 평가사인 GMI(www.gmiratings.com)는 지난 7월 보고서에서 이건희 회장의 사면 및 경영 복귀에 대해 “투자자들이 걱정하는 것은 이건희 회장(Mr. Lee)이 미국이나 유럽 회사들의 이사회 회장(chairman)과 전혀 다른 회장 자리를 다시 차지한 것”이라며 “새 회장에 취임한 그는 삼성전자 이사회에서 일하지도 않고, 임원으로서 지위도 없다. 외부 투자자들은 이 회장이 법률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 ‘영구 회장직’(chairman-for-life)을 맡게 된 것을 걱정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삼성전자 누리집에는 디지털카메라, 휴대전화, 노트북 등을 선전해 최신 경영의 표본처럼 보인다”면서 “하지만 기업지배구조는 전혀 현대화되지 않았다. 지난 20년 동안 수차례의 스캔들과 벌금, 악명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지배구조가 ‘탈이건희 시대’로 현대화하지 못한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후진성은 삼성 차원을 넘어 한국 기업 전체의 지배구조에 대한 평가를 후퇴시켰다.
최근 프랑스계 증권사인 크레디리요네증권(CLSA)과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는 아시아 11개 국가에 대한 ‘기업지배구조 분석보고서’(CG WATCH 2010)를 펴내, 한국은 이명박 정부 취임 이후 기업지배구조가 후퇴했다고 밝혔다. 2007년에 이어 3년 만에 펴낸 이번 보고서에서 한국은 기업지배구조 점수(100점 만점)가 49점에서 45점으로 떨어졌고, 순위도 네 단계 추락한 9위를 기록했다. 싱가포르·홍콩·일본·대만·타이·말레이시아·인도·중국 등이 우리보다 앞섰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만이 우리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이건희 회장의 사면·복권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렸고, 이에 따라 평가 점수도 떨어졌다.
보고서는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해 △제도와 적용 △법적 집행 △정치 및 규제 환경 △문화 △회계와 감사 등의 분야를 검증했다. 우선 ‘법적 집행’ 분야는 39점에서 28점으로 크게 후퇴했다. 그 이유로 이건희 전 회장의 복귀를 예로 들며 “많은 재벌 총수들이 심각한 범법행위를 했는데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복귀했다”며 “(정부의) 선별적이고 정치적인 사면권 행사로 상당한 감점을 받았다”고 밝혔다. ‘기업지배구조 문화’ 분야 점수도 43점에서 33점으로 크게 떨어졌다. 그 이유로 “주주총회 안건의 표결 처리를 의무화하거나 주총의 의결권 행사 내역을 공시하는 기업이 거의 없다”며 “기업의 비리 사건과 관련한 언론의 대응 역시 문제”라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는 김용철 변호사가 쓴 가 베스트셀러가 됐음에도 이를 다룬 언론이 거의 없었다고 밝혔다.
재벌가 문제성 주식거래도 늘어‘제도와 적용’ ‘정치 및 규제 환경’ 분야도 점수가 각각 43점과 44점으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 이유로 각각 “경영 전망 및 분석, 이사보고서 등 비재무항목에 대한 정보가 다른 아시아 국가나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해 부실하다”는 점과 “정부가 지배구조와 관련해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새 입법 시도도 없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반면 ‘회계와 감사’ 분야는 자산 2조원 이상의 기업이 국제회계기준(IFRS)을 2011년부터 도입하는 점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아 68점에서 78점으로 올랐다.
보고서는 지배구조가 후퇴한 것을 이명박 정부와 결부시켰다. 이번 평가 결과와 관련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친재벌’(pro-big business) 정책을 펼치면서 지배구조와 관련한 사안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며 “기업과 관료들의 인식이 지배구조와 관련해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는 것이 이윤과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된다는 과거의 인식 수준으로 후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2009년 법개정을 통해 재벌의 은행 소유 한도를 4%에서 9%로 상향 조정해 경제력의 집중을 가져왔다”며 “최근에는 ‘포이즌필’(poison pill)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많은 외국 투자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고 덧붙였다. 포이즌필은 기업이 적대적 인수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으로, 회사가 보유하는 주식과 나머지 주주가 보유하는 주식에 대해 차별적으로 지분을 조정할 수 있는 장치다. 기업이 투자사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맞서 신주를 발행한 뒤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저렴하게 넘김으로써 투자사가 적대적 인수를 포기하도록 하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총수 일가가 기업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위한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처럼 지배구조가 후퇴하는 사이 재벌들은 ‘문제성 주식거래’를 통해 부를 쌓았다. 경제개혁연대는 11월2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재벌의 부당거래 실태와 규제방안’ 토론회를 열어 재벌 총수 일가의 문제성 주식거래가 과거보다 크게 늘었다고 밝혔다. 채이배 연구위원(회계사)은 “올해 문제성 주식거래 의심 사례는 107건으로 2008년보다 30건이나 늘어났다”며 “유형별로는 회사기회 유용 46건, 지원성 거래 41건, 부당 주식거래 20건이었다”고 밝혔다. 기업집단별로는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이 각각 9건으로 가장 많았고, GS그룹이 7건, SK·CJ·효성그룹이 각각 6건으로 뒤를 이었다. 또 회사기회 유용으로 설립되거나 지원성 거래로 혜택을 입은 회사 가운데 지배주주의 자녀 등이 그 지분을 보유한 경우가 65건으로, 지배주주가 보유한 경우(44건)보다 많았다. 부를 상속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셈이다. 조사 대상은 4월 기준으로 자산 5조원 이상인 35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이다.
“재벌 구조 바로잡으면 민주주의도 발전”이에 대해 김석연 변호사는 “외환위기 이후 회사기회 유용이나 물량 몰아주기 거래와 같이 정상적인 거래를 가장해 회사의 부를 총수 일가에 유출하는 배임적 비리들이 성행하고 있다”며 “장부외거래를 통한 비자금 조성과 횡령, 차명계좌를 이용한 불법자금 관리와 탈세 등 전통적 비리들도 지속돼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안으로 상법상 회사기회 유용 금지 조항 도입, 이중대표소송제도 도입, 소액주주도 주주대표소송을 낼 수 있는 제도 등을 꼽았다. 김 변호사는 또 “재벌이라는 민간 거대 조직의 비정상적 지배구조를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구조로 변화시킨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고 국가적 부의 증대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재벌 지배구조의 합리화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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