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은 친일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전쟁 참여를 글과 말로 숱하게, 독하게 주문했다. “나라를 위해 쌀도 나무도 옷도 다 아끼십시오. 그러나 나라를 위해 우리의 목숨만은 아끼지 맙시다.”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에서 한 연설이다. 여기서 목숨 바쳐 위해야 할 나라는 물론 조선이 아니다.
해방 직후에도 그는 아낄 것을 주문했다. 이번에는 김치였다. 1947년 11월, 모윤숙은 에 글을 썼다. “나는 요새 가끔 (배추)김치 없이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본 사람들처럼 소금에 절인 무쪽으로만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하고 절약적일까?” 세상은 바뀌었지만 일본에 대한 흠모의 마음은 어쩌지 못했다. 그는 조선의 습속이 봉건적이라 생각했다. “조선 아낙네들은 (중략) 옷을 못 입고 밥을 굶을지언정 김장을 안 하고는 못 산다. 이것은 습관 때문도 있겠으나 (중략) 봉건적 습성에도 달렸다. 김장을 할 형편이 못 되면 못 되는 대로 살 줄 아는 주부가 필요하다.”
배추김치가 비싸면 무짠지를 먹으면 된다고 모윤숙은 생각했다. 배추김치가 비싸면 양배추김치를 먹으면 된다고 대통령은 생각한다. 역설적인 방식이지만, 이들은 배추김치의 계급성을 정확히 표현했다. 그것은 누구나 먹기를 바라는 음식이지만, 결국엔 아무나 먹는 음식이 아니다. 한국의 김치, 특히 배추김치에는 계급이 있다. 배추김치는 봉건적 습속이 아니라 계급적 문화다. 서민의 섭생을 위해 탄생했으나, 귀족의 섭생을 위해 변신하고 있는 음식이다.
1924년 11월7일, 는 당시 조선 궁궐과 서울 정신여학교 기숙사의 김장김치를 비교분석한 자료를 실었다. 수량의 단위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포기’ ‘접’ ‘바리’ 등으로 계산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는 ‘개’로 통일해 인용한다. 여학교 기숙사는 김장으로 모두 53개를 담았다. 섞박지가 25개로 가장 많다. 섞박지는 무와 배추를 섞어 만든 간단한 김치다. 이 밖에 깍두기 13개, 동치미와 짠지를 각 7개씩 담았다. 통배추김치는 1개에 불과했다. 반면 궁궐에선 통배추김치를 많이 담갔다. 모두 176개의 김장김치 가운데 48개가 통배추김치였다. 섞박지도 49개였으나, 여학교 기숙사와 비교해 통배추김치의 비율이 훨씬 높다. 그 밖에 동치미 23개, 무김치 22개, 깍두기 19개 등을 담갔다. 왕족은 배추김치를 먹고, 서민은 섞박지·깍두기 등 무김치를 먹은 것이다.
배춧값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통배추김치를 담글 만큼 품질 좋은 배추가 많지 않았다. 주요 재배 지역은 서울 4대문 주변에 있었다. 4대문 안 부잣집의 수요와 관련이 깊었다. 훈련원(동대문 부근) 배추와 방아다리(종로구 충신동) 배추가 최상품이었는데, 100통에 8~9원을 받았다. 그다음이 섬말(종로구) 배추, 구리안뜰(동대문 부근) 배추 순이었다. 부자들만 그 배추를 샀다. 개성 배추 등 중하품은 100통에 4~6원 정도로 반값이었다. 그마저도 서민들은 엄두를 못 냈다.
‘김치사업단 순천대센터’가 펴낸 (푸른세상)에서 연구자들은 “당시 배추김치를 먹는다는 것 자체가 서민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분석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배추김치는 왕족과 부호들만 먹는 ‘고가 첨단식품’이었다. 김치의 역사는 길지만, 오늘날 한국인이 주로 먹는 배추김치의 역사는 짧다. 19세기 중반에야 통배추에 마늘과 고추로 양념한 배추김치가 본격 등장했다.
절인 채소를 먹는 문화는 세계를 통틀어 보편적이지만, 한국의 김치 문화는 특이하다. 중국에는 배추·오이를 식초에 절인 ‘파오차이’가 있다. 일본에도 다쿠앙을 비롯한 신맛의 ‘즈게모노’가 있다. 서양 사람들은 식초에 채소를 담가 만든 ‘피클’을 먹는다. 신맛 채소 절임 음식들은 기름진 음식들은 먹을 때, 청량감을 더하는 구실을 한다.
한국의 절인 채소 음식은 이들과 다르다. 무·오이가 아닌 배추를 주로 쓴다. 신맛이 아니라 매운맛을 낸다. 밥과 함께 언제나 주식처럼 먹는다. 이 세 가지 특성이 한국 배추김치의 계급성을 설명한다. 한국인은 왜 매운 배추김치에 열광해 중독되었는가.
매운 김치맛의 원형은 짠맛이다. 육식을 주로 하는 문화권에선 소금을 많이 먹지 않아도 된다. 동물의 살과 피를 먹는 일 자체가 소금 섭취와 연결된다. 소금을 구하기 어려웠던 원시 문화에서 짐승의 피를 신성시한 것은 그 피가 곧 소금물이자 생명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육식을 주로 하는 서양인들은 한국인의 절반 이하 수준의 소금만 섭취한다.
반면 곡물과 채소를 주로 먹으면, 소금을 따로 먹어야 한다. 모든 동물은 소금 없이 신진대사를 유지할 수 없다. 사람도 살아남기 위해 소금이 필요하다. 불교를 숭상한 고려시대에는 임금이 직접 나서 육식을 말렸다. 조선시대에는 먹고 싶어도 먹을 고기가 부족했다. 이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는 동안 줄기차게 (식초가 아닌) 소금에 절인 ‘짠맛의 채소 절임’ 식품이 발전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부터 ‘짠맛 채소 절임’을 먹는 일에 문제가 생겼다. 소금이 귀해진 것이다. 소금 광산 등이 따로 없던 조선시대에는 서해 일부에서만 천일염을 생산했다. 산출은 언제나 제한적이었고, 유통은 왕실 일족이 장악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을 겪은 조선 후기 민중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특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는 거의 매년 기근이 들었다. 당시 구황식품의 대표 격은 소금이었다. 굶주리는 백성이 생기면 나라에서 소금을 내렸다. 소금이 있으면 들판의 억센 초목을 절여 먹을 수 있었다. 을 보면, 함경도의 기근을 조사한 관리의 보고서가 나와 있다. “소금이 가장 긴요하다. 곡물이 없더라도 채소에 섞어 먹으면 명을 이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심해지고 잦아지는 기근을 소금의 물량이 따라가지 못했다. 게다가 조선 후기, 양반의 수가 늘고 상민까지 유교식 제례를 치르면서 새로운 소금 수요가 생겼다. 제수용품의 으뜸인 생선의 수요와 함께 생선을 절일 소금의 수요도 높아졌다. 부자는 부자대로, 빈자는 빈자대로 소금 쓸 일이 많아진 것이다.
빈자는 짠지를, 부자는 양념 김치를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8~19세기 사회·문화의 혼란이 매운 음식맛을 요구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주 교수는 고추의 캡사이신이 소금 대체효과를 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을 거쳐 들어온 고추는 원래 독성물질로 여겼었다. 1590년대에 한반도에 전래한 고추는 무려 200년 동안 식품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다 기근과 격변이 집중된 19세기 초반부터 김치를 담글 때 고추를 쓰게 됐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유학자들이 지은 문헌에 고추·마늘·파·젓갈 등의 양념을 김치에 많이 쓰라는 적극적인 권유도 등장한다. 소금에만 절이지 말고, 다른 ‘대체물’을 찾으라는 이야기다.
이 방식은 가난한 조선 민중에게 먹혔다. 고추·마늘·파 등 소금의 대체물인 양념 채소는 원래부터 가난한 자의 음식이었다. 서양에선 마늘을 “가난한 자의 강장제”라 불렀다. 5천 년 전 지어진 피라미드 벽화를 보면, 당시 노예들이 먹은 마늘의 양을 기록해뒀다. 마늘을 먹여 일을 시킨 것이다. 보리밥과 팟국을 가리키는 ‘총탕맥반’이란 동양의 고어가 있다. 가난한 상차림이라는 뜻인데, 파 역시 빈자의 음식으로 통했던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아말 나지는 “잘사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맵게 먹는다. 농부와 노동자는 매운 고추 덕에 매일 먹는 밥의 단조로움을 이겨낸다”고 말했다. 고기를 주식으로 삼는 부자들은 매운 고추를 즐겨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금의 대체물로 등장한 고추·마늘·파 등 김치 양념은 주린 배로 일해야 하는 서민을 위한 채소였다. 가난한 이의 몸을 덥혀 겨울을 견디게 했다.
매운 김치가 서민들의 음식으로 자리잡을 무렵,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배추다. 원래 김치의 주재료는 오이·무·가지·순무 등이었다. 과거에도 야생 배추가 있었으나, 그 생김이 무와 다르지 않았다. 속이 꽉 찬 배추는 1850년대 한반도에 들어왔다. 중국 산둥 지역의 배추를 들여와 오늘의 서울 왕십리 지역에서 키워 ‘조선 배추’를 육종했다. 누가 어떻게 그 작업을 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20세기 초반까지도 배추 재배 면적은 충분치 않았다. 통배추는 완전히 새로운 상품이었다. 오늘날 먹는 통배추 김치의 제조법을 처음으로 본격 소개한 문헌은 1917년에 출간된 이다. 빈부격차가 더욱 벌어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배추김치는 말 그대로 ‘귀족의 반찬’이 됐다. 1940년, 경성제대 의학부 학생들이 서울에 사는 103가구의 식단을 상·중·하 계층으로 나눠 조사한 적이 있다. 계층을 막론하고 모두 김치를 반찬으로 먹었다. 다만, 하층 서민들은 양념 없이 소금물에 절인 김치를 먹었다. 빈자는 짠지를 먹고, 부자는 매운 양념 김치를 먹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경제 상황이 다소 나아지면서, 상류 문화가 중하층에 스며들었다. 통배추김치를 너도나도 먹게 된 것이다. 잡곡밥과 배추김치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1960~70년대 한국 서민들의 일상이 됐다. 부자 김치가 서민 김치로 ‘진화’한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언론은 매년 김장철 기사를 썼다. 1980년 10월21일 를 보면, 5인 가족의 김장김치 양으로 배추 25~30포기가 적당하다고 추천했다.
그리고 이제 배추김치의 계급적 표지가 다시 한번 뒤바뀔 조짐이 보인다. 최근 배춧값 파동이 이를 웅변한다. 20세기 초반에 그러했듯, 21세기 초반 들어 다시 배추가 귀해지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가 2009년 발표한 ‘농림수산식품 주요 통계’를 보면, 국내 배추 재배 면적은 2000년 5만1801ha에서 2009년 3만4321ha로 크게 줄었다. 그 추세의 역전은 기대하기 힘들다. 농업 전체가 붕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가을 배추 품귀 사태의 직접적 원인은 기상이변이다. 다만 몇몇 학자는 ‘4대강 공사’를 또 다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기왕의 채소 재배 기반까지 허물고 있다는 것이다. 장상환 경상대 교수(경제학)는 지난 4월, ‘4대강 사업에 따른 농경지 축소와 식량 문제’를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추정에 따르면, 2008년 현재 농경지 총면적 175만여ha의 1.56%인 2만7천여ha가 4대강 공사로 사라진다. 특히 배추를 비롯한 전체 채소 재배 면적의 12.3%가 4대강 공사로 경작을 중단하게 됐다.
이는 사라지는 경작지만 계산한 결과다. 장 교수는 4대강 공사로 인해 강물이 고이고, 안개가 더 많이 발생하고, 수질이 오염되면, 그만큼 채소의 품질이 나빠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품질이 좋지 않은 채소의 판로가 막히면, 농사를 그만두는 농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2·3차 경작 중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자료를 보면, 2006년 전국 김치 수요량은 150만t 안팎이다. 이 가운데 배추김치는 100만t 정도다. 국내 배추 생산량은 2005년 260만t 정도였다. 모든 배추를 배추김치에 사용한다고 가정하고, 사용한 배추 중량의 절반이 김치 중량이라고 보면, 한국 배추 생산량은 김치 배추 수요량을 겨우 맞추고 있다.
경작지가 줄어도 외국에서 수입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까지 중국산 배추 또는 중국산 김치에 대한 국내 소비자의 반응은 냉담하다. 장상환 교수는 “배추 등 채소는 신선도를 유지하기 어려워 수입에 기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CJ 홍보팀 관계자도 “중국산 김치의 수입은 몇 년 전부터 정체하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수입한 배추와 김치는 한국 사람들 입맛에 맞지 않는다. 배추김치 자체가 ‘조선 배추’를 육종한 결과였다. 중국·일본의 배추는 수분 함유량 등이 달라 김치를 담가도 같은 맛이 나지 않는다.
물량이 충분하지 못하면, 유통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날 가능성도 커진다. 현재 국내 배추 유통 구조는 ‘중간업자’가 장악하고 있다. CJ 홍보실의 설명에 따르면, 대기업을 포함해 대부분의 김치업체는 배추의 90% 이상을 중간업자를 통해 구매하고 있다. 농장과 직접 거래하는 ‘계약재배’는 △상품의 질이 떨어질 경우 △수요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간업자는 그 아래 ‘산지 수집상’을 통해 농가와 계약을 맺고 물량을 확보한다. 농촌진흥청의 농축산물 소득 통계를 보면, 2008년 고랭지 배추의 경우, 판매액의 39%를 중간 유통상이 가져간다.
다시, 배추김치는 21세기식 귀족의 먹을거리?상황은 20세기 초반을 닮아가고 있다. 배추가 귀해지고, 가격이 높아진다. 갖은 양념을 곁들인 배추김치는 돈 많은 사람만 먹을 수 있다. 2009년 현재 국내 김치시장은 1조767억원 규모다. 거대한 시장을 유통업자가 일단 장악하면, 상품가격은 소비자와 생산자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본은 시장을 장악했고, 국가는 농지를 줄이고 있다. 생산자·소비자의 입지는 동시에 줄어들고 있다.
일제의 수탈로 궁핍이 더해가던 1926년 11월12일, 에 이런 기사가 나왔다. “쌀이 없어서 밥을 짓지 못하는 형편으로 어찌 김치 생각까지 하겠는가. 먹을 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배춧값은 날마다 올라 끝을 모른다. 조물주에 대한 원망이 생긴다.” 지금이라고 그 원망이 다르겠는가.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문헌 속 김치 변천사
<font size="3"><font color="#C21A8D">신맛·짠맛에서 매운맛으로</font></font>
김치의 조상은 절인 채소다. 첫 기록은 중국 문헌에 있다. 3천 년 전에 쓰인 에 “밭두둑에 외가 열렸다. 껍질 벗겨 저(菹)를 담가 제사 지낸다”는 구절이 나온다. 2천 년 전 중국 문헌 를 보면 “‘저’는 신맛의 채소로 오이를 초에 절인 것”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1500년 전 중국 식품서 에는 30여 종의 ‘저’ 제조법이 나오는데, 채소를 식초·술지게미 등에 담가 삭히는 방식이었다. 신맛이 대세였던 셈이다.
우리 문헌에는 와 등에 ‘저’가 등장한다. 고려 중기 문헌 을 보면 “순무를 소금에 절여 담그면 한겨울을 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짠맛 중심의 김장이 고려시대부터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조선 세종 때 발행된 는 “나라가 주관하는 제사에 부추·미나리·죽순·무의 ‘저’를 항상 올려야 한다”고 적었다.
김치는 침채(沈菜)에서 비롯한 말이다.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 음식이라는 뜻인데, 팀채-딤채-김채-김치 순으로 변화해 오늘에 이른다. 1766년 발행된 는 고추를 김치 양념으로 사용한다고 적은 첫 문헌이다. 1809년 발행된 는 김치 10가지를 소개하면서 “밥 반찬의 으뜸”이라 적었다.
배추김치에 대한 언급은 등 18세기 후반 문헌에서부터 등장한다. 다만 이때 배추는 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품종이었다. 1917년 발행된 은 최초의 근대 조리서다. 배추 잎 사이에 갖은 양념을 넣는 오늘날의 통배추김치 제조법을 처음 정리해 소개했다. 한국의 전통 상차림은 3·5·7·9·12첩으로 구분하는데, 밥·국·김치는 반찬 가짓수에서 제했다. 김치는 언제나 기본이었다.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font color="#A48B00">참고 문헌(디자인하우스), (푸른세상), (유한문화사), (한울), (도서출판 공간), (커뮤니케이션북스), (사계절), (교문사), (도서출판 효일), (이화여대출판부)</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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