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정부, 사회단체 등이 져야 할 ‘사회적 책임’을 국제적으로 표준화한 ‘ISO 26000’이 확정됐다. 국제표준화기구(ISO)는 지난 7월12일부터 두달 동안 진행된 인터넷 투표에서 77개 회원국 가운데 93%의 지지를 받아 표준안을 확정했다고 9월14일 밝혔다. 2000년대 들어 국제사회에서 오랜 논쟁을 낳았던 기업의 사회적 책임 문제를 놓고 처음으로 완성된 국제 표준안이다(800호 초점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글로벌 스탠더드로’도 글로벌 스탠더드로’, 812호 경제 ‘움츠러든 기업 사회공헌에도 볕들까’, 826호 표지이야기 ‘인권경영 없이는 기업도 없다’ 기사 참조) .
결사의 자유·차별 금지 등 구체적 적시새 국제표준은 편집 과정을 거쳐 11월에 발간된다. ISO 26000의 최종안을 보면, 표준은 크게 7개 부문으로 구성돼 있다. △조직 거버넌스 △인권 △노동 △환경 △공정운영 △소비자 △지역사회다. 대상 분야가 매우 포괄적이다.
이 가운데 인권 분야를 예로 들어 보자. 크게 8개 하위 항목으로 구성된 인권 분야는 ‘인권 위험 상황, 시민권과 정치권, 차별과 취약집단, 직장에서의 기본권’ 등을 다룬다. 이 가운데 ‘직장에서의 기본권’ 분야는 다시 네 가지 세부 항목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아동노동 금지, 차별대우 금지’를 내용으로 한다. 이 가운데 다시 ‘차별대우 금지’ 항목을 보면, “기관은 고용 정책이 인종이나 피부색, 젠더, 종교, 민족적 배경, 사회적 배경, 정치적 견해, 나이, 장애로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확인해야 한다”라고 못박고 있다. 또 가족 관계나 개인적 친분 혹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후천면역결핍증(HIV·AIDS) 감염 여부 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다는 조항도 들어있다.
이런 ISO 26000이 국내에는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무엇보다 국내 산업계가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에 시선이 모인다. 이를 두고 국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한쪽에서는 ISO 26000이 상징적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새 국제표준이 강제력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한 근거다. 다른 국제기준인 ISO 14001과 달리 ISO 26000에는 국제적 인증 절차가 마련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환경경영 국제표준인 ISO 14001은 국제적 인증 절차가 있다. 따라서 한 기업이 ISO 14001 인증을 받으면 그 조직은 ISO가 규정한 환경친화적 경영 방침을 실천하고 있다는 국제적 검증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이런 검증 절차가 없는 ISO 26000은 표준으로서 각 기업에 직·간접적으로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적다. ISO 26000의 서문에서도 “국제표준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안내서이며… 국제적 기준이나 가이드라인 혹은 권고 사항으로 해석되려고 기획된 것이 아니다”라며 스스로 역할을 좁게 잡았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다수 회원국의 반대로 ISO 26000 국제 인증 절차는 만들지 않게 됐다”며 “새 표준은 자발적 실천을 요구하는 윤리적 성격이 강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ISO 26000의 잠재력에 주목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ISO 26000이 국제 인증 절차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여러 국가나 시민단체, 기업 등에서 자발적으로 인증 제도를 만들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노한균 국민대 교수(경영학)는 “일부 남미 국가에서는 ISO 26000을 국가 표준으로 설정하는 방식을 고려하고 있고, 기업 등이 스스로 ISO를 준수한다고 선언하는 등의 방식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정부도 비슷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식경제부는 국내 기관이 ISO 26000 준수 여부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도록 자가진단지표를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에서 마련한 자가진단지표가 새로운 기준이 될 가능성이 있다. 지식경제부의 한 관계자는 “사회적 책임 운영 우수 사례를 발굴해 다른 기업 등이 참고자료로 활용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ISO 26000는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일단 중소기업에 미칠 파괴력을 들 수 있다. ISO 26000이 나라 사이 무역에서 비관세장벽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표준화기구는 ISO 26000이 비관세장벽이 되도록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렇지만 ISO 26000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각 나라가 어떻게 활용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서구 선진국의 시민단체나 노조 등에서 ISO 26000의 기준을 근거로 삼아 노동환경이 열악하거나 상품 생산 과정에서 환경파괴적 요소가 있는 수입품에 시비를 걸어올 가능성도 있다. 중국이 꾸준히 ISO 26000에 반대해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국내 중소업체들이 대비책을 준비하는 수준을 보면 아직 걸음마도 떼지 않은 단계다. 중소기업청이 지난해 중소기업 230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니, ISO 26000을 아예 모른다고 답한 기업이 60%를 넘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한 간부는 “ISO 26000에 대해 중기청에서도 달리 준비를 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미칠 영향은 기업의 성격에 따라 다를 것으로 보인다. 전경련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대부분 윤리경영과 사회공헌에 눈을 떴고 오랜 기간 준비해왔기 때문에 ISO 26000의 파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기업 가운데서도 일부 ‘약한 고리’에서 파열음이 들릴 수 있다. 무엇보다 주목받는 대목은 삼성의 ‘무노조 경영’ 정책이다. ISO 26000은 ‘직장에서의 기본권’ 규정에서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 항목을 담고 있다. 국제표준화기구의 국제 전문가 그룹인 ‘ISO 26000 실무위원회’에 오래 참여해온 강충호 전 한국노총 대변인은 “삼성의 무노조 경영 방침이 새로운 국제기준과 어긋나기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더 이상 피하기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 홍보실 관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해 언급을 거부했다.
이 밖에 대기업 창업주 일가의 공금 횡령·비자금 사건은 ISO 26000의 ‘부패방지’ 조항에 어긋나고, 하청업체의 노동여건 문제는 ‘노동관행’ 조항에 걸린다. 강충호 전 대변인은 “ISO 26000이 요구하고 있는 민주적인 지배구조, 투명한 회계, 종업원의 노동기본권 존중, 공동체 기여 등 보다 폭넓은 의미의 사회적 책임의 잣대로 보면, 우리나라 기업들이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상당한 압력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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