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오너들의 경영권 집착이었지만, 뒤처리는 국민의 몫으로 남았다. 2009년 12월30일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결정한 금호아시아나그룹 얘기다.
금호그룹이 워크아웃까지 가게 된 건, 대우건설 매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금호는 대우건설을 팔아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대우건설은 끝내 팔리지 않았다. 금호 쪽은 “글로벌 금융위기 뒤 대형 건설사 인수에 나설 만한 회사나 자본을 찾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호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 쪽은 “금호가 대우건설을 지나치게 높은 값에 팔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산은이 대우건설 매각 과정서 발 뺀 이유
하지만 대우건설 매각이 지지부진한 또 다른 이면이 있다. 그룹 오너들이 경영권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사실 산은은 시간이 급했다. 금호 계열사의 부실은 18조원의 돈을 빌려준 금융권의 부실로 번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경제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산은은 2009년 10월 금호에 워크아웃을 제안했지만, 금호는 경영권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해 계속 미뤘다고 한다. 결국 산은은 대우건설 매각 작업에서 발을 빼버린다. 대우건설 매각 절차가 한창 진행 중이던 2009년 11월24일 산은은 대우건설 매각 공동주간사 업무에서 빠지겠다고 발표했다.
산은이 갑자기 주간사에서 물러난 것을 두고, 일부에선 인수금융 능력이 부족한 우선 협상 대상자들을 지원해 매각을 반드시 성사시키려는 의지로 풀이하기도 했다. 당시 자베즈파트너스와 TR아메리카가 대우건설 인수 우선 대상자로 선정됐지만, 인수자금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에 산은이 주간사 역할 대신 자금 지원 역할을 하려 했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산은은 금호가 매각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판단해 손을 떨어버렸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금호의 매각 의지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매각 불발 때 모든 책임을 산은이 져야 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산은은 내부적으로 “더 이상 금호에 끌려다닐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고 한다.
민유성 산은 금융지주 회장은 2009년 12월18일 기자들과 만나 “대우건설 매각 작업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비상대책(플랜B) 등 다양한 대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산은은 계열사의 워크아웃을 뼈대로 한 플랜B를 만들어 정부와 청와대에 보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금호그룹 오너 일가는 경영권 챙기기에 급급했다. 금호는 2009년 12월21일 금호석유화학(금호석화) 이사회를 열고 “금호산업의 아시아나항공 주식 일부를 금호석화에 매각했다”고 밝혔다. 금호산업은 갖고 있던 아시아나항공 주식 33.5% 가운데 12.7%(2227만여 주)를 주당 4275원에 금호석화에 팔았다. 금호산업이 약 952억원 규모의 아시아나항공 주식을 금호석화에 판 셈이다.
금호산업-금호석화 주식 매매도 ‘눈쌀’이번 매각으로 금호석화의 아시아나항공 지분율은 14.0%에서 26.7%로 높아져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이로써 금호의 경영권은 ‘금호석화 → 아시아나항공 → 대한통운’으로 이어지게 됐다. 그동안 지주회사였던 금호산업 대신 금호석화가 지주회사가 된 것이다. 금호는 “계열사 지분을 정리해 금호산업이 1천억원의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워크아웃이 임박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지분 이동은 또 다른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금호가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내놓은 대신 금호석화와 아시아나항공의 경영권은 끝까지 챙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2009년 7월 금호그룹의 ‘형제의 난’ 당시 화학부문 회장직에서 전격 해임당한 박찬구 전 회장은 이사회에서 반대표를 던졌다. 박 전 회장은 “금호석화의 경영 현황이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자금을 투입해 주식을 취득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금호석화는 2010년에 돌아오는 회사채가 4219억원에 이르는 등 자금난이 가중될 것으로 우려되는 실정이다.
금호는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의 워크아웃 정도로 마무리짓고 싶었지만 채권단은 그 이상을 바랐다. 채권단은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을 진행하려면 주요 계열사들의 워크아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채권단 관계자는 “금호석화를 워크아웃 대상에 포함시켜 그룹 전체적으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게 채권단의 의견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금호 쪽은 석유화학은 주력 사업부문이고 경영상태도 건실하다는 점을 들어 경영권을 고집했다. 금호석화만큼은 갖고 가겠다며 끝까지 버텼다. 결국 대주주 일가의 버티기로 금호석화와 아시아나항공은 워크아웃 불똥을 비켜나갔다. 금호석화와 아시아나항공은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어 경영 정상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자율협약은 법적인 구속력이 없다.
채권단은 워크아웃이 시장에서 설득력을 얻으려면 오너 일가의 사재 출연이 뒤따라야 한다고 보고 있다. 사재 출연은 오너 일가의 경영 정상화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채권단은 총수 일가가 금호석화 주식(48.5%) 등 보유 중인 계열사 주식이나 자산을 채권단에 담보로 넘겨 처분을 맡기는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그룹의 ‘형제 경영’ 전통이 사실상 깨어진 뒤, 이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박삼구 명예회장과 갈등을 빚은 동생인 박찬구 전 회장이 선뜻 사재를 출연할 가능성도 높지 않다. 박삼구 명예회장의 경우 금호석화 지분 5.30%와 금호산업 지분 2.14%를 갖고 있는데, 최근 주가가 크게 떨어진 탓에 주식 가치가 380억원 정도에 그친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당국과 산은이 워크아웃 절차를 밟을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에 대해 최대 5년 동안 경영권을 보장해주기로 해 논란을 빚고 있다. 채권단 자율협의로 정상화를 추진하기로 한 금호석화와 아시아나항공도 같은 기간 대주주의 경영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남았다. 직접적인 타격은 주주들이 받았다. 2009년 마지막 거래일인 12월30일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는 개장 직후 하한가로 직행한 것을 비롯해 아시아나항공(-6.90%), 금호석유(-6.35%) 등 대부분의 금호아시아나 계열사 주식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금호산업의 경우 주가는 2007년 고점 대비 10분의 1로 폭락한 상태다. 앞으로 대규모 감자 등으로 추가 하락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금호그룹 관련 여신을 보유한 은행주에도 악재로 작용했다. 가장 많은 여신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우리금융이 4.15% 떨어진 것을 비롯해 하나금융지주(-1.64%), 신한지주(-1.37%) 등이 약세를 면치 못했다. 금호에 물린 채권을 떠안은 은행들의 수익 하락도 불가피해졌다. 은행들이 수익을 올리기 위해 손쉽게 쓰는 방법이 대출금리 인상이다. 이 경우 은행에서 대출받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혈세 들어간 채권은행이 비용 떠맡아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금호그룹 오너의 경영권을 보장해 주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워크아웃은 문제가 많다. 앞으로 채권단의 원리금 상환 유예, 출자전환, 추가 자금지원 등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 비용 상당 부분이 금융기관에게 떠맡겨지는 것이다. 금호의 경우 주 채권은행이 산업은행과 우리은행인데, 공기업이거나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이다. 재벌 오너에 대한 특혜가 궁극적으로 혈세를 낸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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