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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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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약세’ 외환보유고 운용 고민

편입 비중 높은 미 국채 가격 하락세… 미 인플레도 부담으로 작용
등록 2009-11-12 15:27 수정 2020-05-03 04:25

10월 말 현재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외환준비금)은 2641억달러다. 지난 1월(2017억달러)보다 624억달러나 늘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주요 회원국 가운데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가장 많이 늘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국은 외환보유액 규모에서 세계 6위다.

지난 10월 외환보유액이 8개월 연속 급증하면서 사상 최대치에 육박했다. 현재 추세가 유지되면 이달 사상 최대치를 경신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11월3일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에서 직원이 달러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

지난 10월 외환보유액이 8개월 연속 급증하면서 사상 최대치에 육박했다. 현재 추세가 유지되면 이달 사상 최대치를 경신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11월3일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에서 직원이 달러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

각국은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끌어다 쓰기 위해 막대한 액수의 기축통화 표시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다. 궂은 날을 대비해 대외 지급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쌓아둔 ‘비상금’으로, 이 준비금은 환율을 안정화하는 데도 사용된다. 더 많은 준비금은 자국 경제와 통화에 대한 신뢰를 키워준다. 특히 1997년 금융위기를 겪은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IMF에 구제금융을 다시 요청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최악의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막대한 준비금을 쌓아두고 있다(표 참조).

우리나라 외환보유액 2641억달러의 구성을 보면, 유가증권(국채·정부기관채·국제기구채·금융채 등) 2361억2천만달러(89.4%), 예치금 232억달러(8.8%), 금 등 기타 48억7천만달러다. 유가증권 중 상당 부분은 가장 안전한 자산이면서 유동성(언제든지 달러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이 뛰어난 미국 국채(미 재부무 증권)로 보유하고 있다. 미 재무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지난 8월 말 현재 각국별 미 국채 보유 규모가 공개돼 있다. 한국의 보유액은 380억7천만달러다. 이중 기관투자가들이 보유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한국은행 보유 금액으로 추정된다.

경제 안정화 위한 기회비용 성격

주목할 대목은 우리나라의 미 국채 보유 규모가 지난해 8월 420억달러에서 올해 1월 310억달러로 줄었다가 다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한국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미 국채 가격의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갈수록 커지고 달러 약세 기조도 확연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미 국채를 포함해 달러화 표시 자산으로 보유 중인 외환보유액의 투자 손익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주요국의 외환보유액

주요국의 외환보유액

준비금 보유가 가져다주는 ‘자국 경제 안전판’ 혜택을 누리려면 그만큼 보험료를 치러야 한다. 우선, 한국 내에 공장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는 등 투자에 쓸 재원이나 한국 내의 소비 수요를 진작하는 데 쓸 재원이 그만큼 감소하게 된다. 준비금에 대한 일종의 기회비용이다. 사실 이 돈은 궁극적으로 한국의 노동자와 납세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중국·일본·한국이 미국 국민의 소비 진작을 위해 미국에 돈을 빌려주고 있는 셈이다. 미국은 이처럼 기축통화국으로서 재무부 증권을 끝없이 수출해서, 즉 부채를 끌어다가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이 흥청망청 소비하고 있다.

외환보유액의 기초는 무역수지 흑자분이지만, 때로는 국고채를 발행하거나 한국은행의 통화안정증권, 기획재정부의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을 발행해 달러를 사들이기도 한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발행한 국고채 이자율 등이 미 국채 이자율보다 더 높으면 외환 보유에서 손실이 발생하게 된다. 이른바 ‘역마진’이다.

미 국채 가격의 변동 역시 외환보유액 중 미 국채 투자분의 수익·손실에 영향을 미친다. 국채는 이자수익률로 할인된 가격에 사고팔린다. 예컨대 100만원짜리 1년 만기 채권의 이자율이 3%라면 채권 가격 97만원에 사들이게 되는데, 몇 달 뒤 이 채권 금리가 4%로 오르면 96만원에 팔리게 된다. 만기일 이전에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1만원의 손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는 10년 만기 미 국채 금리가 3%일 때 금리가 0.5%포인트 상승하면 투자 손실이 -0.8%, 금리가 1.0%포인트 상승하면 손실이 -4.5% 발생할 것으로 분석했다.

국채는 나중에 국민한테서 세금을 걷어 갚을 테니 믿고 돈을 빌려달라는 차용증이다.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면서도 분에 넘치는 소비 생활을 하고 있는 미국의 재정 적자가 갈수록 불어나면서 미국 경제가 쇠락하고 있고, 미국이 경기 부양을 위해 막대한 규모의 국채를 연일 발행하면서 국채 발행 물량 과잉으로 미 국채 가격이 하락(국채 이자율 상승)하고 있다.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10월23일 현재 3.49%다. 2000년대에 계속 4%대 초·중반을 오르내리다 지난해 금융위기가 발발하면서 2% 초반대로 떨어졌으나 지난 5월부터 다시 3%대로 올라섰다. 미 국채의 인기가 떨어지면 국채를 팔기 위해 미국은 국채 금리를 더 높일 것이고, 그러면 국채 가치는 더 떨어지게 마련이다.

금리 오를 때 중도 매각하면 투자 손실

이와 관련해 금융위기가 발발한 지난해 말 이후 한국은행은 미 국채를 대거 팔아 국내 외환시장에 집중적으로 외화유동성을 공급한 바 있다. 이처럼 채권 만기가 도래하기 전이라도 미 국채를 사고팔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때 미 국채 가격이 떨어지면 우리나라 외환보유액 투자분의 손실을 불러오게 된다. 사실 지난해 말 전세계 금융시장 불안으로 미 국채 매입 수요가 커져 재무부 증권의 가격이 급등했으나, 이후 미 국채 발행 물량이 증가하고 경기 회복세가 나타나면서 안전자산 선호 경향이 점차 약화되면서 국채 가격 하락 압력이 다시 커지고 있다.

해외 부문이 보유하고 있는 미 국채는 지난 8월 말 현재 3조4480억달러로, 중국(7970억달러)과 일본(7310억달러)이 1·2위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 압력으로 위안화가 절상되면 중국의 경상수지 흑자가 감소해 미 국채 매입 여력이 줄어들 것이고, 이에 따라 미 국채 가격이 급락할 우려도 제기된다. 사실 달러화 약세와 외환보유액의 투자 손실 우려 때문에 해외 부문의 미 국채 수요가 약화되고 있다.

게다가 출구전략 논란이 말해주듯 미국에서도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면 재무부 채권에 대한 이자 지급 부담이 커지게 된다. 따라서 미국은 이자율을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하되, 대신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달러를 마구 찍어내 재무부 채권 발행분의 상당 부분을 직접 인수하고 있다. 자연히 저금리와 통화팽창 속에서 인플레이션이 급속히 진행될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인플레이션 역시 달러 표시 자산인 미 국채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한국은행 국제국 문한근 차장은 “원화는 부족하면 찍어내면 그만이지만 달러는 구하기 어려워지면 찍어낼 수도 없고 그래서 항상 충분한 외환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며 “외환보유액은 투자 손익 등 수익성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익(경제 안정화 기능)이 더 클 수 있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국가들 고민 속으로

그럼에도 달러화 가치가 추락하고, 미 국채의 가격 하락 압력이 커지고, 미국의 인플레이션 우려까지 가중되면서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가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미 재무부 채권 종이쪽지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외환보유액 중 달러표시 자산 비중을 줄이고 유로화, 엔화 등으로 외환보유 통화를 다변화하는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은 “최근 몇년간 달러화 외환보유액 비중을 연평균 약 0.5%포인트씩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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