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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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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위기, 여성 배제가 불씨

첫 여성 노벨상 수상 계기로 본 실태…
남성 중심 연구로 주제 편향되고 여성 학자 급증에도 강단 푸대접 여전
등록 2009-10-23 16:16 수정 2020-05-03 04:25

지난 10월12일 올리버 윌리엄슨 미 UC버클리대 교수와 함께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엘리너 오스트롬(76) 미 인디애나주립대 교수는 노벨경제학상(1969년부터 시상) 사상 첫 여성 수상자다. 40년 만의 첫 여성 수상에 경제학계는 놀라워하고 있다. 경제학은 전통적으로 ‘남성 지배적인 학문’으로 인식돼왔기 때문이다. 마크 블록이 1983년에 쓴 을 보면, 1700년부터 1981년까지 세계를 움직인 경제학자로 꼽힌 1천 명 가운데 여성은 31명에 불과하다.

‘젠더 경제학’ 연구 위해 여성경제학회 설립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 미 인디애나주립대 교수. 사진 REUTERS/JOHN SOMMER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 미 인디애나주립대 교수. 사진 REUTERS/JOHN SOMMER

이와 관련해 도로시 램펜 톰슨은 “경제학 역사에서 그동안 여성 경제학자들의 기여가 무시돼왔다”면서 경제 사상에 탁월한 기여를 해온 8명의 여성 경제학자를 소개하고 있다. 그가 (1973)에서 꼽은 8명은 로자 룩셈부르크, 비어트리스 웨브, 조앤 로빈슨 등이다. 조앤 로빈슨은 1세대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로, ‘노벨상을 받지 못한 가장 위대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라는 농담이 붙어 있다. 그는 1972년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위기에 빠진 당시 “쓸모없는 경제학자들이 넘쳐나고, 경제이론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제2차 위기’를 맞고 있다”고 설파한 바 있다. 조앤 로빈슨 이후 경제학 내부에서는 “남성의 경제학을 넘어서자”는 슬로건을 내건 페미니스트 관점의 젠더 경제학이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경제학이 오랫동안 남성 편향적 영역으로 간주돼왔다는 사실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팔린 경제학 교과서인 폴 새뮤얼슨의 초판 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교과서에 ‘여성’에 관한 언급은 단 두 차례 등장할 뿐이라고 한다. 노동력 인구에 속하는 여성의 과반수가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여성은 노동자 및 소비자로서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경제 연구의 대상에서 ‘여성’과 ‘가족’은 늘 소외돼왔다. 남성 경제학자가 제기한 문제와 그들이 도출한 결론, 그리고 거기에 기초한 정책이 경제학 영역을 지배해온 것이다. 사실 여성의 행동과 경험은 남성의 행동·인식과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경제학은 남성의 행동과 문제에만 집중하고 이를 더욱 공고화했을 뿐 ‘노동하는 여성’이나 ‘가계생산’에 대한 연구는 빈곤하기만 하다.

국내 최초의 여성 경제학 박사(미 하와이대)로 1997년 한국여성경제학회를 설립한 김애실(63)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남성이 지배하는 경제학 분야에서 페미니스트적 접근을 통해 ‘젠더 경제학’을 연구하고, 고립된 상태에서 연구하는 국내 여성 경제학자들이 교류하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학회를 설립했다”며 “이 학회를 통해 가사노동의 가치와 여성의 생산성 등 그동안 남성 경제학의 틀 안에서 배제되거나 왜곡돼온 여성 관련 주제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학 연구의 주체가 누구고, 또 연구 대상이 무엇이냐는 점은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우리 사회의 많은 영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부의 각종 정책자문위원회에 참여하는 상당수 교수들이 경제학자다. 이명박 정부 초대 내각 장·차관급 이상(국무총리·감사원장·국정원장 포함) 총 65명 가운데 박사 학위자가 총 21명인데 이 중 8명이 경제·경영 전공자였다. 또 석·박사 학위자(37명) 중 경제·경영 전공자는 14명으로 다른 전공에 비해 가장 많았다. 주로 남성이 남성의 관점에서 연구한 결과를 활용해 각종 정책을 결정하고 있는 셈이다.

경제학 공동학술대회 제3차 정책포럼 ‘외환위기 10주년: 우리는 무엇을 배웠으며 어디로 가고 있나?’ 토론회가 2007년 2월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에서 열렸다. 학술대회 참가자가 남성 일색이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경제학 공동학술대회 제3차 정책포럼 ‘외환위기 10주년: 우리는 무엇을 배웠으며 어디로 가고 있나?’ 토론회가 2007년 2월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에서 열렸다. 학술대회 참가자가 남성 일색이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국내 여자대학에서 대학원 경제학과 박사과정이 설치된 건 1980년 이후다. 숙명여대 경제학과에 1980년 박사과정이 설치됐고, 1954년 경제학과가 개설된 이화여대에서는 1994년에야 박사학위 과정이 신설됐다. 성신여대는 1981년 경제학과가 신설돼 2008년에야 박사과정이 만들어졌다. 한국여성경제학회장은 김애실·이인실(서강대·현 통계청장)·차은영(이화여대) 교수에 이어 지금은 정진화 교수(서울대)가 맡고 있는데, 모두 한국여성경제학회가 창립된 1997년에 란 책의 공동 번역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만큼 국내에서 여성 경제학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한국여성경제학회에 가입한 여성 경제학 박사학위 보유자는 50여 명에 불과하다.

석·박사 취득자 남성이 1.9배, 전임교원은 30배

정진화 교수는 “1990년대 중반 국내 여성 경제학자가 10여 명에 불과했다. 지금 젠더 경제학이나 페미니즘 경제학이 어느 정도 인기를 얻고 있지만, 상당수 여성 경제학자들도 주류 경제학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며 “대학으로 진출한 여성 경제학자가 워낙 적어 연구하는 데 다소 제약을 받는 측면이 있긴 하다”고 말했다.

경제학을 전공하는 여성이 적은 현상과 관련해 여성은 수학에 대한 준비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등 여러 가지 설명이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미국에서 1985~86년 수학 학사 학위 수여자의 47%, 수학 석사학위 수여자의 35%가 여성이었다. 권위있는 여성경제학자인 퍼버는 1980년대 중반에 한 연구를 통해 학자들은 자신과 동성인 학자의 글을 인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제학 분야가 남성들에 의해 지배되는 한 여성에게는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또 기존 경제학이 일반적으로 ‘분리된 개인과 개별 기업’, 그리고 ‘(남성적인) 일’에 논의를 집중하다보니 ‘관계’나 ‘공동체’같은 여성적 관점은 주변으로 밀리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에서 미국의 여성 경제학자 줄리 넬슨은 “수학과 여학생들의 높은 성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남성 교수 일색인 경제학과에서 여성에 관한 진부하고 경멸적인 언급이나 강의실 분위기 등이 여학생에게 비우호적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학 공부에 대한 여성의 동기부여 측면에서 볼 때, 경제학에서 여성에 관한 주제를 무시하거나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은 여성의 ‘과소대표’ 문제를 더 심화한다. 1998년 8월부터 2009년 2월까지 국내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총 794명이고, 여성은 98명이다. 남성 중심 경제학이 확연하다. 그러나 2009년 국내 경제학과 석·박사 취득자는 남자 297명, 여자 157명으로 여성 경제학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학의 여성 경제학 박사 푸대접은 여전히 강고하다. 2009년 현재 전국 대학 경제학과에서 남자 전임교원(정교수·부교수·조교수·전임강사)은 798명인 반면, 여성 전임교원은 26명에 그친다.

김애실 교수는 “나는 학위를 받고 바로 대학에 와서 남성 경제학자들 사이에 빨리 적응했지만 국책연구기관 등에 간 다른 여성 경제학자들은 연구와 성취에서 많은 불이익을 받아왔다”며 “남성 박사들은 정부기관들로부터 쉽게 자료를 확보한 반면 여성은 똑똑해도 제약을 받고, 연구기관마다 한두 명밖에 없어 고립된 채 흩어져 있었다”고 말했다.

엘리너 오스트롬 수상은 다양성 확대 계기

미국경제학회(AEA) 안에는 여성경제학자지위위원회(CSWEP)가 설치돼 있다. 경제학계에서 여성의 낮은 지위를 개선하고 여성차별을 없애기 위해 1971년에 만들어졌다. 이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설립 목적을 표방하고 있다. “경제학은 남성 독점 영역이 아니다. 남성 못지않게 여성의 영역이다. 학계·기업·금융 등 각 영역에서 여성의 과소대표 문제를 개선하고, 여성의 학문적 탐구를 지원해야 한다. 연구비 등 재정적 지원과 승진 등에서 성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여성 경제학자란 점이 수상의 한 배경으로 작용한 건 아니지만, 엘리너 오스트롬의 올해 노벨상 수상은 경제학에서 남성의 독주를 견제하고 학문의 다양성을 확대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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