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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구하려 홀로 몸 푸는 한국


‘글로벌 불균형 해소’ 명분으로 환율 방치 땐 수출 타격… 중국은 콧방귀 뀌고 일본은 개입 시사
등록 2009-10-15 13:35 수정 2020-05-03 04:25

이번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약속한 ‘글로벌 불균형 해소’는 수출이 경기 회복을 이끌고 있는 한국에 큰 도전이다. 한국은 내년 G20 정상회의 의장국이 됐다는 사실에 들떠 흥분하고 있지만, 전세계 각국은 세계시장에서 자국 환율을 앞세워 사활적인 수출 전쟁을 벌이고 있다. 글로벌 불균형 해소는 결국 중국·한국·일본이 달러 약세를 용인해 미국의 수출 증대를 돕고, 자국의 수출이 줄어드는 것을 감내하자는 것이다. 글로벌 불균형 해소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밑바탕에는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추락하는 달러를 구출하고 미국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거대한 프레임이 깔려 있다. 그러나 각국이 금융·경제 위기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는 판에 이런 약속은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

최근의 달러 약세는 수출이 경기 회복을 이끌고 있는 한국에 큰 도전이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1194.40원으로 마감한 9월23일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 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최근의 달러 약세는 수출이 경기 회복을 이끌고 있는 한국에 큰 도전이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1194.40원으로 마감한 9월23일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 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달러 약세 용인 국제 공조 비현실적

물론 미국의 막대한 무역적자 때문에 달러가 폭락하고 미국 내수시장이 붕괴되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수출 감소가 불가피하다. 미국 경제 회생을 위해 한국·중국·일본 등이 국제사회에서 어쩔 수없이 구원투수로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하다. 인위적인 환율 개입을 포기해 자국의 수출 감소를 감수하는 식으로 미국을 돕는 ‘글로벌 공조’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사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G20 체제는 ‘세계 최대 소비시장’ 미국의 지위를 이용해 동아시아를 압박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신대 전창환 교수(국제경제학)는 “중국·일본·한국이 세계시장에서 가격경쟁으로 치열한 환율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자국 통화 절상(달러 약세) 압력을 감내하고 질서정연하게 G20의 국제 공조 약속에 협조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맹목적으로 G20 체제를 추구하는 건 한국뿐이다. 중국도 미국과 유럽의 위안화 평가절상 압력에 꿈쩍 않고 있는데, 한국만이 G20 개최와 의제 설정을 주도하는 데 집착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위안화 가치를 1년째 달러당 6.82∼6.83 위안으로 묶어놓은 채 사실상 고정환율제를 시행하면서 자국 수출기업을 방어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1985년 플라자합의와 1995년 역플라자합의를 통해 거대한 무역적자와 달러가치 붕괴를 막아왔다. 달러와 엔화·마르크화 사이의 국제 환율 조정을 통해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를 지켜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다르다. LG경제연구원 신민영 연구위원은 “글로벌 불균형이 이번 위기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긴 했으나 불균형 해소라는 약속이 선언에 그칠 공산도 크다”며 “일본의 경우 자국 수출기업들이 당장 실적 악화에 직면하면서 달러 약세에 반발하고 있어 엔화 강세를 더 이상 방치하기 곤란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본 외환 당국은 지금 “수출을 줄이고 내수 기반으로 경제가 성장하는 구조로 전환하자”는 G20 합의를 이행하기 어려운 시점이고, 따라서 엔화 강세(달러 약세)를 저지하기 위한 당국 개입 방침을 내비치고 있다.

환율 100원 하락에 10개 기업 4조 손해

수출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에서 경제 회복의 열쇠는 더욱더 수출이 쥐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막대한 재정지출을 이미 대부분 쏟아부은 탓에 더 이상 팽창적 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이에 따라 수출의존도는 더욱 커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최근 원-달러 환율은 1100원대까지 내려왔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가치 급등세(달러 약세)는 엔화와 위안화의 절상 속도보다 훨씬 가파르다.

10월8일 신영증권에 따르면, 환율이 평균 100원 하락하면 삼성전자·LG전자·하이닉스 등 주요 정보기술(IT) 산업과 자동차산업 등 업종 대표 10개 기업에서 영업이익이 총 4조8천억원가량 감소할 것으로 추정됐다. 그동안 고환율(원화 약세·달러 강세) 효과를 바탕으로 한 수출 증가로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의 실적이 대폭 개선됐는데, 환율이 하락하면 막대한 손실이 발생할 것이란 예측이다. 신민영 연구위원은 “금리 인상 등 출구전략은 국제 공조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환율은 달러가 완전 붕괴되는 상황에 이르지 않는 한 공조가 이뤄지기 힘든 상황”이라며 “환율은 한 나라가 이득을 보면 다른 나라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게임”이라고 말했다.

G20 정상회의 개최로 국가의 품격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과연 정상회의 유치를 위해 한국 기업들의 수출 감소를 방치해도 되는 것일까?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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