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현대·기아차, 삼성 등 우리나라 1~3위 그룹들이 지주회사라는 새판 짜기에 골몰하고 있다. 지주회사는 1999년 외환위기 뒤 기업의 문어발식 경영을 끊기 위해 도입됐다. 지주회사 체제는 지분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순환출자 체제와 달리 자회사 등이 수직 계열화돼 지배구조가 투명한 게 특징이다.
재벌들이 지주회사로 변신을 시도하는 것은 그룹의 지배구조 개선 및 후계자 승계 작업과 관련이 있다. 이명박 정부가 금산분리 원칙 등 기업 규제를 허물면서 지주회사로의 전환도 탄력을 받고 있다.
하지만 지주회사로의 변신 과정에서 막대한 주식 상장 차익, 노골적인 계열사 몰아주기 등의 우려도 나온다.
SK그룹은 지주회사 전환에 급물살을 타고 있다. SK그룹은 9월21일 “지주회사 요건을 갖추고 순환출자를 끊기 위해 SK C&C를 연내 상장하고 SK텔레콤과 SK네트웍스가 가진 SK C&C 지분을 일반 공모로 매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SK텔레콤과 SK네트웍스는 이날 이 같은 내용을 각각 공시했다. 상장의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 공모가 등은 내달쯤 구체화될 예정이다. 계획대로 상장이 추진되면 오는 11월께 증시에 상장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SK그룹은 비상장사인 SK C&C가 그룹 지주사인 SK(주)의 지분 31.82%를 보유한 대주주로 돼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 C&C의 지분 44.5%를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최 회장 → SK C&C → SK(주) → 각 계열사 구도인 셈이다.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 요건은 계열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환상형 출자 구조를 끊고 지주회사 아래에 일직선 구조로 세우도록 하고 있다. 사실 SK그룹은 2007년 7월 공정거래위원회에 SK(주)를 지주회사로 전환 신청했지만 순환출자를 해소하지 못해 아직까지 지주회사 설립을 완료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순환출자 고리를 끊으려면 지주회사의 대주주인 SK C&C는 지주회사에 포함된 자회사들의 주식을 갖고 있어서는 안 된다. 지주회사 아래에 있는 자회사들도 SK C&C의 지분을 가져서는 안 된다.
SK텔레콤과 SK네트웍스는 SK C&C 지분을 각각 30%, 15% 갖고 있다. 두 회사가 보유한 SK C&C 지분을 매각해야만 지주회사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이번에 순환출자의 핵심 고리를 끊게 되면 SK그룹은 최 회장이 대주주인 SK C&C를 정점으로, 지주회사인 SK(주), 그리고 자회사인 SK텔레콤, SK에너지, SK네트웍스 등으로 나뉘는 일직선 구조의 지주사 체제로 마무리된다.
SK C&C는 지난해 6월에도 상장을 추진했으나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시장 침체로 공모 계획을 철회했다. 당시 공모가격은 11만∼13만원이었다. 올해 공모가격은 4만∼5만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지난 4월 500원에서 200원으로 액면분할을 했기 때문이다.
시장에선 SK C&C가 상장될 경우 SK텔레콤과 SK네트웍스의 SK C&C지분 매각 차익을 대략 1조5천억원 규모로 예측하고 있다. 최 회장의 보유지분 평가가치는 1조원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1993년 주당 400원에 3억원어치 주식을 산 최 회장은 4천 배 오른 1조2천억원의 상장 차익을 누릴 것으로 보인다. 일단 최 회장이 이같은 막대한 상장 차익을 어떻게 할지에 관심이 쏠린다. SK그룹은 이에 관해선 함구하고 있다.
사실 SK C&C는 SK텔레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성장했다. 하지만 이 회사의 매출액과 순익은 계열기업 몰아주기 때문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SK C&C는 기업에 필요한 컴퓨터 업무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유지·보수해주는 회사다. 이 회사의 주요 고객은 SK텔레콤을 비롯한 계열회사들로, 이들이 맡기는 전산 용역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한때 SK C&C 매출의 70% 이상은 계열사로부터 수주한 물량이었다.
금산분리 완화로 지주회사 급물살지주회사 전환에 걸림돌이 돼온 SK증권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금산분리 원칙을 허물면서 쉽게 풀릴 전망이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일반지주회사는 금융회사를 보유할 수 없지만 이같은 규제를 완화할 개정안이 정부 입법으로 국회에 계류 중이다. 관련법이 통과되면 SK네트웍스(22.43%)와 SKC(12.26%)가 보유한 SK증권은 매각하지 않아도 된다. 지주회사로 가는 두가지 장애물 중 SK C&C 문제는 증시 상장을 통해 해결되면서 최태원 회장이 1조원이 넘는 상장차익을 누리게 되고, 또다른 골칫거리인 SK증권 지분 처리문제는 현 정부의 지원 아래 간단히 해결되는 셈이다.
현대·기아차그룹도 지주회사 체제로 변신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벌이고 있다. 현대차의 지주회사 전환은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진행 중이다.
지난 8월 말 현대제철은 보유 중인 현대차 지분 5.84%를 팔았다. 현대차 계열인 현대모비스가 이를 모두 사들였다. 1조3천억원 규모다. 현대모비스는 이를 인수해 현대차 지분을 14.95%에서 20.78%로 높였다. 공정거래법에선 지주회사는 자회사 지분을 최소 20% 이상 갖고 있어야 한다. 때마침 정의선 기아차 사장은 현대차 부회장과 함께 현대모비스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시장에선 현재모비스의 지분 매입을 현대·기아차의 지주회사 전환과 정몽구·정의선 부자의 현대모비스 경영권 승계로 연결해 보고 있다.
현대차는 ‘현대차 → 기아차 → 현대모비스 → 현대차’와 ‘현대차 → 기아차 → 현대제철 → 현대차’로 이어지는 두 축의 순환출자 구조가 얽혀 있었다. 이번 현대제철의 현대차 지분 매각으로 두 번째 순환출자 구조는 사라진 셈이다.
하지만 ‘현대차 → 기아차 → 현대모비스’의 순환출자 고리마저 끊어야 지주회사 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이를 위해선 기아차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 16.88%를 처리해야 한다. 기아차가 갖고 있는 현대모비스 지분 가치는 약 2조원에 이른다.
앞으로 관심은 기아차가 갖고 있는 현대모비스 지분을 어떻게 하느냐다. 이는 정몽구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현재 거론되는 시나리오는 3가지 정도다. 우선 정의선 부회장이 기아차 등 계열사에 자신이 가진 글로비스 지분을 팔아 현대모비스 지분을 사는 방법이 있다. 글로비스는 정의선 부회장이 31.88%, 정몽구 회장이 24.36%의 지분을 갖고 있다. 하지만 개인 지분을 계열사가 사들일 경우 대주주를 지원한다는 거센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두 번째로 현대모비스와 글로비스를 합병하는 방안도 가능한 시나리오로 거론된다. 우리투자증권은 ‘현대차그룹이 지주회사로 전환한다면’이란 보고서에서 “정 회장 부자가 보유한 현대차·현대제철·글로비스 주식을 현대모비스에 현물 출자하면 추가 자금을 투입하지 않아도 경영권이 확보된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현물 출자를 통해 현대모비스 주식을 확보하면 두 사람의 현대모비스 지분이 27%로 늘어나고, 현대모비스를 순수 지주회사와 실제 영업회사로 분할할 경우엔 지주회사 지분율이 49%까지 높아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글로비스가 정 회장 부자가 갖고 있는 계열사 지분을 사들여 두 사람이 글로비스를 통해 현대모비스를 지배하는 방안이다. 만약 정몽구 회장이 현대모비스 지분을 자신의 이름으로 더 확보할 경우 정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때 상속 또는 증여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뒤따르게 되는데, 정 회장 부자가 글로비스를 통해 현대모비스를 지배하게 되면 이런 상속증여세 부담을 쉽게 피해갈 수 있다. 글로비스는 SK C&C나 에버랜드처럼 오너 개인과 그룹을 연결해주는 회사가 되는 셈이다.
계열사 몰아주기로 글로비스 급성장이 경우 정 부회장은 현대모비스를 지배하는 동시에 순환출자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 위해선 글로비스가 이 지분을 매입할 자금을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6월 말 현재 글로비스의 현금 보유액은 2천억원이다.
하지만 이 방법을 택할 경우 계열사들이 글로비스에 물량 몰아주기 등 지원을 해야 한다. 채이배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연구위원은 “이 경우 글로비스가 자금을 마련해야 하고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이 글로비스에 내부 거래나 물량 몰아주기 같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8월19일 서울고등법원 제6행정부(재판장 김용헌)는 현대차와 계열사들이 물량 밀어주기로 총수 일가가 최대 주주인 물류회사 글로비스를 부당 지원했다며 시정 명령과 함께 과징금을 부과한 것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특히 법원은 계열사들이 글로비스에 ‘현저한 규모’의 물량을 준 것은 공정한 거래 질서를 해치는 부당 지원 행위에 해당한다고 명시했다.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사장이 2001년 설립한 물류회사 글로비스는 계열사들의 집중 지원으로 급성장한 뒤, 2005년 상장을 통해 이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줬다. 현대차그룹의 전 방위 지원을 받고 있는 글로비스의 성장세는 대단하다. 2005년 매출 1조5408억원, 순이익 800억원의 글로비스는 올 상반기에만 매출 1조3488억원, 순이익 1091억원을 올렸다.
이재용-이부진 역할 분담 ‘에버랜드’ 주목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전환은 그룹의 희망 사항이다. 삼성은 컨트롤타워 부재와 경영권 승계를 해결할 해법으로 ‘지주사 체제’ 전환을 최선책으로 보고 있다. 삼성의 지배구조는 삼성에버랜드를 정심으로 ‘삼성생명 → 삼성전자 → 삼성카드 → 에버랜드’로 연결되는 순환출자 구조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순환 구조를 끊으려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야 한다.
삼성 스스로도 지난해 4월 삼성특검 수사가 끝난 뒤 발표한 경영쇄신안을 통해 지배구조 개선을 약속했다. 하지만 당시 삼성은 지주사 체제 전환에는 약 20조원의 자금이 필요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시간을 두고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7월22일 미디어법과 함께 날치기 통과된 금융지주회사법으로 지주회사 전환이 훨씬 수월해졌다. 그동안 금산분리 원칙으로 금융지주회사는 제조업체를 자회사로 둘 수 없었다. 또 사업지주회사는 금융회사를 자회사로 둘 수 없었다. 그러나 금융지주회사법 통과로 증권회사와 보험회사를 지배하고 있는 지주회사는 제조업 자회사를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참여연대는 날치기 금융지주회사법을 ‘삼성 특혜법’이라고 못박았다. 금융지주회사법이 국회를 통과해 삼성그룹은 삼성생명 등 금융회사와 삼성전자 등 비금융회사를 모두 포함하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됐다.
때마침 삼성그룹은 9월15일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첫째딸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를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 담당 전무로 영입했다. 이 전무가 에버랜드로 입성한 것은, 이 전 회장의 자녀인 이재용-이부진-이서현 간 그룹의 계열 분리를 위한 수순으로 시장에선 보고 있다.
이재용 전무는 에버랜드 최대 주주라는 자리를 통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로 대표되는 삼성의 주력 계열사를 사실상 지배하는 자리에 있다. 이 전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전무의 에버랜드 경영 참여를 단순히 일개 계열사에 대한 경영 참여로만 보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에버랜드라는 회사가 가진 이같은 위상 때문이다. 에버랜드는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노릇을 하는 순수 지주 부문과 리조트·골프장 사업 등을 관장하는 사업 부문으로 나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주 부문은 이재용 전무가, 사업 부문은 이부진 전무가 맡는 식이다.
삼성의 순환출자 구조상 꼭짓점에 있는 회사가 에버랜드다. 개정된 금융지주회사법에 따라 에버랜드를 삼성금융지주회사로 만들 경우, 삼성전자 1대 주주인 삼성생명은 에버랜드 지분 7.26%를 4%대로 낮춰야 한다. 아니면 삼성물산이 삼성전자에 대한 지분율(4.02%)을 7%대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 금융지주회사의 자회사는 손자회사를 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걸림돌 공정거래법 개정 관측도삼성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데 관건은 삼성전자의 처리다. 삼성이 삼성전자의 지분을 낮추면서까지 지주회사로 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삼성은 금융지주사법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민단체에선 삼성이 대정부, 대국회 로비를 통해 공정거래법을 개정한 뒤, 삼성에 유리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것이라는 의혹을 버리지 못한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 교수(참여연대 시민경제위원회장)는 “지주회사 체제가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지만 경영능력 검증 없이 경영권을 합법적으로 승계하는 부작용도 있다. 오히려 지배주주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돼 소액주주의 이익을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미국 최고 의사’ 84살 김의신 “암에 좋은 음식 따로 없어, 그 대신…”
“명태균에 아들 채용 청탁…대통령실 6급 근무” 주장 나와
“대통령 술친구 이긴 ‘김건희 파우치’…낙하산 사장 선임은 무효”
법원, KBS 박장범 임명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기각
탄두가 ‘주렁주렁’…푸틴이 쏜 ‘개암나무’ 신형 미사일 위력은
‘야스쿠니 참배’ 인사 온다는 사도광산 추도식…‘굴욕 외교’ 상징될 판
관저 유령건물 1년8개월 ‘감사 패싱’…“대통령실 감사방해죄 가능성”
‘1호 헌법연구관’ 이석연, 이재명 판결에 “부관참시…균형 잃어”
“회장 자녀 친구 ‘부정채용’…반대하다 인사조처” 체육회 인사부장 증언
꺼끌꺼끌 단단한 배 껍질…항산화력 최고 5배 증가 [건강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