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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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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 못 따라가는 실물경제

성장률 상향 등 경기회복론 속 기업 투자 안 늘고 고용 문제도 심각
등록 2009-07-10 11:50 수정 2020-05-03 04:25

경기회복론이 솔솔 새어나온다. 상반기 한국 경제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선전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쪽에서는 통화·재정 정책의 축소를 뜻하는 ‘출구 전략’을 검토할 때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출구 전략은 경기가 회복세로 들어갈 때의 부작용을 차단하는 게 목적이다. 시중에 풀린 돈을 회수해 재정 건전성을 높이고, 물가 급등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출구 전략을 언급할 만큼 한국 경제는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는 것일까?

지난 6월25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열린 하반기 경제운용 방향 설명회에서 이영희 노동부 장관이 노동 관련 정책기조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연합

지난 6월25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열린 하반기 경제운용 방향 설명회에서 이영희 노동부 장관이 노동 관련 정책기조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연합

시장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낙관론과 비관론으로 엇갈린다. 그러나 한결같이 경기회복으로 가는 길목에 수많은 ‘지뢰’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지적을 빠뜨리지 않는다. 서울 강남의 부동산 거품, 고용 불안 및 임금 삭감에 따른 소득 양극화 심화, 미국·영국 등지에서 여전한 금융 불안 등이 지뢰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정부가 쏟아부은 돈의 힘

상반기 한국 경제의 성적표는 일견 나쁘지 않다.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1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전분기 대비 플러스(0.1%)를 기록했다. 2분기에는 이 수치가 2%를 넘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까지 나온다. 정부는 지난 6월 말 발표한 ‘하반기 경제운용 방향’에서 올해 성장률을 기존 -2.0%에서 -1.5%로 상향 조정하는 자신감을 보였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6월30일 한국방송의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해 “올 연말이나 내년 초쯤이면 경기회복이 가시화되지 않겠나”라고 내다봤다.

낙관론자들의 목소리를 좀더 들어보자. 세계은행의 저스틴 린 부총재는 지난 6월22일 서울에서 열린 ‘개발경제 콘퍼런스’에서 “한국 경제는 이미 회복 단계”라고 말했다.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3~-3.5% 정도로 봤지만, 정부의 시의적절한 경기 부양책과 튼튼한 거시경제 구조에 힘입어 2010년 2%, 2011년 4~5% 성장을 거둘 것이라는 전망도 덧붙였다. 올 초 한국 경제가 평균 -4% 성장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놨던 글로벌 투자은행(IB)들도 최근 성장률 수치를 대폭 상향 조정하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기존의 -2.8%에서 -1.8%로, 씨티그룹은 -4.8%에서 -2.0%로, 도이체방크는 -5.0%에서 -2.9%로 바꿨다.

통계에서도 경기회복 신호가 감지된다. 통계청이 지난 6월30일 내놓은 ‘5월 산업 동향’을 보면, 광공업 생산은 4월보다 1.6% 늘었다. 지난 1월부터 치면 5개월째 증가세를 이어간 셈이다. 개별 경제지표들을 묶어 현재의 경기 상태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경기동행지수(순환변동치)는 지난 2월(92)에 바닥을 찍은 뒤 5월까지 석 달 연속 올랐다. 앞으로 경기 국면을 예고하는 선행지수(전년 동월 비)도 다섯 달째 상승했다. 제조업체들의 체감경기도 나아졌다. 지식경제부와 산업연구원이 같은 날 발표한 기업경기실사지수(BSI)를 보면, 3분기 경기 전망치는 108로 기준치인 100을 올 들어 처음으로 넘겼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한국 경제의 ‘볕 들 날’은 멀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설비투자, 고용 등 실물경제 지표들을 뜯어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외면한 채 현금을 쟁여놓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기업들의 설비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25.3%까지 내려앉았다. 반면 자산총액 기준 10대 그룹의 상장 계열사 65곳이 영업활동과 자본거래로 얻은 잉여금은 3월 말 기준으로 233조원에 이른다. 일자리 문제도 심각하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올 1분기 취업자 감소폭은 14만6천 명에 이른다. 4월에는 18만8천 명, 지난 5월에는 21만9천 명이나 줄었다. 취업자 수가 이렇게 줄어든 것은 1999년 3월 이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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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력 약화로 내수 침체 지속 우려

상반기 일부 경제지표들이 개선된 것은 정부가 엄청나게 돈을 쏟아부은 탓이 크다. 정부는 지난 4월 경기 부양을 위해 28조4천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다. 간병·요양 사업 등에 대규모 재정을 투입했고, 공공건설 부문 발주를 크게 늘렸다. 본예산의 60%도 상반기에 조기 집행했다. 돈을 끌어다 쓴 만큼 하반기에 ‘실탄’이 달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국외의 ‘지뢰밭’도 여전하다. 영국과 미국을 포함해 주요 선진국들의 실업률이 계속 오르고, 주택담보대출과 신용카드 연체율은 떨어지지 않는다. 송태정 우리금융그룹 수석연구위원은 “유럽발 제2의 금융위기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데다, 미국의 금융 불안도 신용카드사, 보험사 등 비은행 쪽으로 확산될 우려가 크다”면서 “더구나 세계 각국이 경기 부양을 위해 엄청난 재정을 쏟아부었는데, 발등의 불을 끄려고 동원한 소방호스가 너무 많은 물을 뿌린 까닭에 오히려 익사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고 진단한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닥칠 수 있다는 경고다. 오상훈 SK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달러화 약세 현상을 경계한다. 달러화는 6개국 통화기준 지수로 볼 때 지난 3월4일 고점 대비 12% 정도 하락한 상태다. 달러 약세 압력이 본격화되면 한국처럼 수출 주도형 국가들은 급격한 환율 하락의 영향으로 수출 경기가 위축될 우려가 크다.

이렇게 낙관론과 비관론이 팽팽하지만, 시장에서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컨센서스가 이뤄져 있다. 정부가 막대한 재정지출과 감세, 규제 완화를 시행했지만, 아직 실물경제가 본격적으로 살아났다고 보기는 이르다는 것이다.

일단 정부의 ‘믿는 도끼’인 대기업들은 투자에는 소극적이면서 제 몫을 챙기는 데 적극적이다. 제조업 대기업의 여러 지표들이 개선되고 있음에도, 재계는 최근 내년 최저임금을 결정하면서 “경기회복이 아직 멀었으므로, 최저임금을 삭감하거나 동결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최저임금은 2.7%만 상승한 시간당 4110원으로 결정됐는데, 이런 최저임금 인상률은 1998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오석태 한국씨티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수준의 최저임금 결정은 근로자 계층의 구매력을 약화시켜 내수 침체라는 악순환을 불러올 것”이라며 “더구나 현재의 임금 삭감을 통한 고통 분담 또는 고통 전가 방식은 내년 초엔 심각한 노사관계 불안을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강남 부동산 거품 시한폭탄

대기업들의 투자 부진이 계속되자 정부는 7월2일 사회적 논란의 소지가 큰 재계의 요구사항을 거의 대부분 수용하는 기업 투자 촉진 대책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경영권 방어를 돕기 위해 포이즌필(신주를 낮은 가격에 살 수 있는 콜옵션을 기존 주주에게 부여하는 제도)을 도입하고, 고령자들은 최저임금에서 예외로 두겠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일종의 극약처방이다. 지난해 고환율과 감세정책을 폈는데도 기업들이 따라주지 않자, 남아 있는 ‘카드’를 모두 동원한 셈이다. 이런 대책은 기업들의 투자를 불러오는 ‘약발’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경영권 과보호로 시장경제를 해치고 노인 빈곤율을 악화시키는 등 심각한 부작용만 남기게 된다.

꿈틀대는 강남 부동산 가격도 시한폭탄이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6월11일 금융통화위원회가 2.0%의 금리를 동결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직후 “최근 몇 달 새 아파트를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다”며 “관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 강남권 재건축 물량은 올 들어 가구당 평균 1억원 이상 뛰어올랐다.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서민층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데 일부에서 ‘잔치’를 벌인다면 사회불안과 갈등이 폭발할 수밖에 없다”면서 “지금 정부가 강남 집값을 잡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경제운용 자체를 그르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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