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5일 아침 8시 서울 강남 포스코센터 18층 ‘스틸(Steel) 클럽’. 2008년 포스코 결산 이사회가 열리는 곳이다. 경비원들이 배치되기 전인 이른 아침이어서 이사회가 열리는 장소까지 갈 수 있었다. 기자는 이구택 회장이 이사회장에 들어올 때 ‘스스로 사퇴하는 것’인지 ‘밀려나가는 것’인지를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기자는 포스코 직원들에 의해 강제로 밖으로 끌려나가야 했다. 끝내 이 회장의 말을 듣지 못했다.
이날 이구택 회장은 이사회에서 사퇴 뜻을 밝혔다. 이 회장은 “최고경영자(CEO)는 임기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며, 현재와 같은 비상경영 상황에서는 새 인물이 새로운 리더십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하루 전인 14일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찾아가 퇴임 인사를 했다.
민영화 기업 흔들기 여론 싸늘이 회장은 1969년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 공채 1기로 입사해, 40년 동안 포스코에서 일한 철강 전문가다. 그는 다음 회장이 선임되는 2월27일 주주총회에서 정식으로 물러난다. 원래 공식 임기는 2010년 2월2일까지다. 앞서 김만제 전 회장은 김대중 정부 출범 뒤, 유상부 전 회장은 노무현 정부 출범 뒤 임기를 못 채우고 중도 하차했다.
포스코는 2000년 민영화됐다. 외국인 주주 지분이 40%를 넘는다. 정부 지분은 단 1주도 없다. 하지만 포스코 안팎에선 이구택 회장 사퇴가 정치권의 끈질긴 흔들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고 흔드는 쪽이 온전한 승리를 했다고도 보지 않는다. 오히려 흔든 쪽이 똘똘 뭉친 포스코의 조직문화에 무릎을 꿇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 회장은 참여정부 때 CEO가 된 인물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이전 정부 시절 CEO가 된 인사들에 대한 숙청이 이어졌다. 한국방송과 한국통신(KT)이 대표적이다. 이 회장을 흔든 쪽에선 KT와 KTF처럼 숙청 대상인 CEO의 비리를 찾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마땅한 비리를 찾지 못했다. 한 철강업계 인사는 “정치권에선 이 회장을 낙마시키고 코드에 맞는 사람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영화 기업 CEO 흔들기에 대해 여론은 차갑다. 결국 그를 흔들었던 사람들은 (후임) 자리도 못 챙길 것이다. 비난만 얻은 셈이 됐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이 회장의 ‘딜’설도 솔솔 나온다. 퇴진 압력을 받은 이 회장이 스스로 용퇴하는 대신 차기는 포스코 후배가 됐으면 하는 뜻을 전했고 정치권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물론 흔든 쪽의 반격도 예상되고 있다. 일단 포스코 내부 인사를 회장으로 선임한 뒤 이 회장의 잔여 임기만을 채우도록 하고 다시 교체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포스코 내부 불만을 잠재울 수 있고, 1년 뒤 다른 회장이 선임되더라도 동요가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누가 이 회장을 흔들었을까? 여러 사람 가운데 포항의 거물 정치인 이름이 오르내린다. 한 철강업체 관계자는 “이 정치인이 이구택 회장에게 포항의 지역개발과 포스코 인사 등 무리한 부탁을 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원칙주의자다. 어떻게 보면 차가울 수 있다. 이 회장은 정치권과 거리를 두기 위해 이러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 정치인은 자신을 홀대한다고 여겨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정권이 바뀌자 대통령에게 이 회장 사퇴를 강하게 요구한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개발·인사 청탁 거부가 화근”사실 이구택 회장 사퇴설은 지난해 말부터 확대재생산됐다. 검찰은 이주성 전 국세청장 재임 시절의 비리 사건을 수사하다 칼날을 이 회장 쪽으로 겨눴다. 검찰은 국세청을 상대로 감세 로비를 벌인 의혹을 잡고 이 회장을 조사해왔다. 이 회장 자택을 압수수색했다는 말이 나올 만큼 강도 높은 수사를 벌였다. 남중수 당시 KT 사장이 검찰 수사 도중 자진 사퇴한 사실이 이 회장 교체설도 부채질했다. 하지만 검찰이 구체적인 혐의점을 밝혀내지 못하면서 이 회장이 임기를 마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이 회장 아들의 병역 회피 의혹 등의 소문도 흘러나왔다.
이 회장 사퇴 배경에는 현 정부와의 코드 불화도 한몫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현 정부의 대선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를 비판해온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를 포스코가 지원한 사실이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스코뿐만 아니라 롯데·대림·SK 등도 환경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를 해왔다. 정치권에선 사외이사에 진보적 인사를 배정한 것도 정부가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난해 말께 청와대가 포스코에 일부 사외이사 교체를 주문했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이구택 회장은 정치권의 흔들기에 맞서야 할지 또는 스스로 물러나야 할지를 고심했다고 한다. 그가 사퇴 전 말했다는 “새 정부의 부담을 덜어주고 조직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서”라는 표현은 이러한 고민을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지난 연말 이 회장과 만난 한 인사는 “이 회장이 ‘연임도 했고 지금 물러나도 별다른 욕심이 없다’는 말을 했는데 자포자기식 답변으로 들렸다”고 전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도 다시 관심이 쏠린다. 이구택 회장 퇴진 과정에서 박 명예회장이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명예회장이 이명박 정부 등장과 함께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면서 이 회장 퇴임설은 지난해 상반기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박 명예회장과 이 회장의 교체를 추진한 정치권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지난해 늦가을 이후 이 회장의 낙마는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게 포스코 핵심 인사들의 전언이다. 포스코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TJ(박 명예회장의 애칭)와 KT(이 회장의 애칭) 관계가 TJ와 유상부 전 회장 때처럼 자꾸 틀어져갔다. 지난가을 이후 두 사람은 더 틀어졌다”고 말했다.
외부에는 알려지지 잘 않았지만, 포스코 고위층들의 관심이 ‘포스트 이구택’으로 본격적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다. 이후 박 명예회장은 차기 회장을 포스코 내부 인사로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박 명예회장이 후임 인선 과정에서 외풍으로부터 포스코를 막아내는 구실까지 할 경우 포스코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박 명예회장과 이 회장은 후임 회장이 포스코 내부 인사여야 한다는 점에선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염두에 두는 사람은 달랐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이 회장이 퇴임 발표를 불과 사흘 앞둔 지난 1월12일 정준양 사장을 집무실로 불렀다. 많은 포스코 고위층들은 적어도 이때, 후임과 관련한 이 회장 쪽의 마지막 의중이 전해졌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한수양 전 포스코건설 사장도 이 회장 퇴진에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전 사장은 지난해 11월 납품업체한테 금품을 받는 등 개인 비리 혐의로 불명예 퇴진했다. 한 전 사장은 검찰 조사에서 포스코 전·현직 경영진에 관한 주요 정보를 검찰에 넘겼다는 설에 휩싸여 있다.
“집권세력 전리품인가” 비판 여론정치권의 흔들기에 대한 외부의 시선은 싸늘하다. 경제개혁연대는 ‘포스코 회장이 집권세력의 전리품인가’란 논평을 내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회장이 교체된다면 지배구조가 불안해지고 세계적인 철강회사로서 포스코의 브랜드 가치도 추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하지만 청와대는 사퇴를 둘러싼 외풍 의혹과 관련해 정치권 압력설을 부인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1월14일 정례브리핑에서 “왜 민간기업의 회장 사퇴에 청와대가 답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외풍 의혹은) 못 들어봤다”고 일축했다.
이구택 회장은 1월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포스코 CEO포럼’에서도 “외풍으로 인한 사임이 아니다”라며 말을 아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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