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가족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때마다 미국은 더 강한 나라가 됩니다.” 2004년 10월 재선 운동을 벌이던 조지 부시 미 대통령 후보가 이제 ‘버블 대통령’이란 딱지를 달고 쓸쓸히 퇴장한다. 세계 동반 불황이라는 고통의 긴 터널에 들어선 새해, 미국은 불펜에서 구원투수 오바마가 부지런히 몸을 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명박 선발투수가 이변이 없는 한 완투해야 하는 상황이다.
2009년 세계경제는 2차 대전 이후 최초로 미국·유럽·일본이 모두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데다 중국, 인도 등 신흥 개도국마저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어둠의 시기를 맞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무제한으로 돈을 퍼붓는 국제 공조 시스템 역시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외국계 투자은행과 국내 일부 경제 연구기관은 한국 경제도 올해 마이너스 성장을 겪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한국은행이 내놓은 올 2% 성장이라는 전망치도 일부 경쟁력 있는 부문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실상 제로 또는 역성장을 한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급변하는 경제 환경과 세계적 경기 후퇴기에 성장률을 예측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에 내몰린 서민들은 그 희생의 대가로 해고 없는 역성장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성장률 같은 숫자놀음보다는 정말 1930년대식 대공황이 엄습할 것인지, 경기 회복은 언제쯤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만 있을 뿐이다.
미래에셋증권은 국민총생산이 -15%까지 추락했고 실업률은 25%에 육박했던 대공황 시기는 현재와 큰 차이가 있지만 경기 하강 속도가 빠르다는 점은 닮았다고 평가했다. 현재의 위기가 장기 불황으로 번질 뇌관은 디플레이션이다. 30년대는 산업생산이 20% 넘게 급감했고 소비자물가는 -15% 가까이 급락했다. 미래에셋증권은 지금도 디플레이션 징후가 부분적으로 관찰되고 있지만 오바마의 신뉴딜이 급격한 경기 위축을 막아낼 것으로 판단했다. 현대경제연구원도 금융과 실물의 복합 불황은 대공황과 유사하지만 지금은 미국 경제 의존도가 분산됐고 경기 사이클 변화로 하강 기간이 단축돼 장기 불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악몽의 재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금융 시스템이 고장나 사실상 ‘L자형’의 장기 침체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LG경제연구원은 부실을 근본적으로 수술하지 못하면 대규모 재정적자가 시한폭탄이 돼 개도국 경제까지 마이너스 성장에 빠지는 대공황 수준의 위기를 맞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대공황과 현재를 비교하는 색다른 잣대를 소개했다. 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악화된 미국의 소득분배는 지금 역사적으로 최악이다. 충격적인 것은 최상위 10%가 차지하는 소득이 전체의 50%에 달한 최근의 상황은 대공황 직전인 20년대 말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라는 것이다(그래프 참조).
대공황 막아도 L자형 장기 침체 우려금융 부실과 실물경기 하강이 동시에 진행되는 불황은 일반적인 경기 침체 때보다 기간이 길고 폭도 깊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한다. 과잉 부채가 금융기관의 신용 창출 여력을 위축시켜 실물경기 회복을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1960~2007년 동안 발생한 경기 침체를 분석한 결과, 이번 경제위기는 최소한 내년 말이 돼야 회복될 것으로 관측됐다. 기획재정부는 과거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 하강이 회복되기까지에는 3~4년 정도가 걸렸다고 밝혔다.
또 다른 ‘검은 백조’ 출현 경계령월가에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처럼 또 다른 ‘블랙 스완’이 출현할 가능성은 없을까? 검은 백조는 실제론 찾아낼 수 없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변종인 ‘그레이 스완’을 주로 거론한다. 일본의 ‘닥터 둠’(비관적 예측가)으로 불리는 경제학자 가네코 마사루 교수는 파생상품 거래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은 ‘그림자 금융 시스템’을 의심하고 있다. 그림자 내부에 빚으로 돌려막는 ‘폰지 금융’ 같은 거대한 부실이 숨어 있는 위험을 지목한 것이다. 서브프라임이 검은 백조였다면 회색 백조는 프라임 모기지일 수 있다. 이제는 별로 우량하지 않은 이 모기지 증권은 미국 상업은행이 잔뜩 움켜쥐고 있다. 서브프라임으로 투자은행이 몰락했듯 프라임에 상업은행이 취약한 구조인 것이다. 신영증권은 미국의 대형 상업은행이 구제금융이라는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지만 불안 요인은 상존하고 있다고 봤다.
카드론, 오토론 등 소비자 신용 부문 전반도 회색 백조로 지목되고 있다. 신용카드는 20%만 지불해도 되는 리볼빙이 대부분이라 서브프라임처럼 물밑에서 부실이 진행될 확률이 크다. 오토론은 이미 제너럴모터스(GM)를 포함해 자동차 빅3를 식물회사로 결박해놓았다. 미국의 자동차 리스는 3년간 임대가 끝나면 중고차를 파는데, 중고차 가격 급락으로 담보가치가 떨어져 부실해졌다. 신규 리스 판매가 전면 중지됐고 자동차 3사의 매출은 급감했다. 제로금리와 달러 윤전기가 부를 유동성 함정과 미국 국채가격 추락도 위험요인이다.
한국의 회색 백조는 어디에 숨어 있을까? 최대 뇌관인 부동산 거품과 가계부채는 회색 백조로 오래전부터 찍혔다. 부동산 개발사업에 따른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화도 마찬가지다. 삼성증권은 여전히 외화 유동성에 혐의를 두고 있다. 원화 약세는 경상수지 문제가 아니라 자본수지 탓이라는 것이다. 경상 흑자액이 외국인 자금 이탈로 인한 자본수지 적자액을 메우고도 남을 정도가 되어야만 원화 절상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미래에셋도 지금은 무역수지보다는 훨씬 큰 규모로 움직이고 있는 자본수지에 유의해야 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정부 개입 실패 땐 한국도 마이너스 성장한국만의 고유한 정책 리스크를 회색 백조에서 빼놓으면 안 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더이상 지정학적 리스크가 아닌 정부 리스크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해 11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이 외환보유고를 18%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비꼬았다. 이명박 정부의 공공 부문 투자는 전체적인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오히려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금융연구원은 감세보다는 재정확대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고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업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안전망 확충은 기본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경제위기 때 정부의 개입은 당연하지만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동성은 신속하게 지원하되 엄격한 제재를 가해야 하고, 지불불능 상태에 빠진 부실 금융기관은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교수는 한국경제의 위기를 이명박 정부의 빈곤한 철학에서 찾는다. 박정희식 관치와 레이건식 방임이라는 ‘섞어찌개’를 빨리 폐기할 것을 권고한다.
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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