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2일 밤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에서 열린 기아의 새 차 ‘쏘울’ 발표회.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기자에게 내민 명함 뒷면엔 빨강색 바탕에 ‘’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기아차 브랜드 컬러는 빨간색이다. 영어 ‘DESIGN’(디자인)을 변형한 것인데, ‘S’는 호기심을 나타내는 ‘물음표’로, ‘I’는 창의성을 보여주는 ‘전구’로 각각 표현돼 있었다.
‘DESIGN’이라는 글씨가 회사 이름인 ‘KIA’보다 컸다. 기아차의 디자인 경영 의지와 철학을 명함에 앞세웠다. 물음표는 차를 향한 호기심을 표현했다. 느낌표는 바로 그 해답이다. ‘왜’라는 의문으로 시작해 ‘와’라는 고객 감동을 주자는 경영 의지를 작은 명함에까지 형상화했다고 한다.
정 사장은 2005년 2월 사장으로 부임하자 곧바로 임직원에게 ‘디자인 경영’을 주문했다. 그동안 기아차는 국내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현대차 트렌드를 좇아가는 전략을 선호했다. 그러다 보니 기아차는 개성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기아가 디자인 경영에 액셀러레이터를 밟게 된 것은, ‘로체’의 실패 때문이었다. 2005년 11월 기아차는 옵티마에 이어 5년 만에 야심차게 중형차 로체를 내놨다. 로체는 현대 쏘나타와 같은 엔진을 써 성능에 뒤질 것이 없는데다 가격도 100만원 이상 쌌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정 사장은 뛰어난 성능에도 판매가 부진한 원인을 쏘나타와의 차별화 실패로 봤다. 현대차와 같은 엔진과 차체를 쓰는 기아차는 디자인으로 차별화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로체 실패에 자극받은 정 사장은 2006년 초 “기아차 브랜드 경쟁력을 단시일 안에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디자인 능력부터 끌어올려야 한다”며 세계적인 디자이너 영입을 주문하기에 이른다. 그해 9월 아우디·폴크스바겐의 수석디자이너로 유럽에서 손꼽히는 피터 슈라이어를 디자인 총괄 부사장으로 데려왔다. 회사 안에서는 굳이 외부 디자이너를 수혈받을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 사장은 “디자인 경영엔 그가 꼭 필요하다”며 밀어붙였다. 과감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의 신차를 앞세워 현대차와 겹쳐진 이미지를 벗고, 기아차를 ‘젊은 차’로 포지셔닝(마케팅 기법의 하나로 고객에게 기업 제품과 이미지 등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전략)하게 된다.
슈라이어 부사장이 전권을 쥐고 개발한 ‘로체 이노베이션’은 지난 6월 첫선을 보인 뒤 성공적인 디자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포티’라는 개념으로 차별화한 로체 이노베이션은 석 달 동안 1만7천 대가 팔려 지난해 같은 기간 로체 구형 판매의 2배 가까운 실적을 올렸다. 로체 이노베이션에 이어 8월에 등장한 준중형 ‘포르테’는 모회사인 현대차의 간판인 쏘나타·아반떼와의 판매경쟁에서 속도전을 벌이고 있다.
쏘울도 기존 차량 디자인의 틀을 깼다. 간결하면서도 과감하게 이어지는 캐릭터 라인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쏘울은 유선형 일색의 국내 차량 디자인에서 벗어나 볼륨감 넘치는 강인한 외관을 살렸다.
마의 30% 벽 8년 만에 깨뜨려슈라이어 부사장의 손을 거친 모하비·로체 이노베이션·포르테·쏘울 등 신차는 히트를 치고 있다. 그의 디자인 핵심은 직선의 간결함이다. ‘직선의 단순화’(Simplicity of the Straight Line)로 불리기도 한다. 아우디에 있을 때 그가 디자인한 TT와 폴크스바겐 뉴비틀은 곡선의 풍성한 볼륨감을 강조했다. 하지만 기아차로 옮기면서 곡선이 아닌 직선의 단순화로 디자인을 바꿨다. 남성적이면서도 스포티하게 변신했다. 슈라이어 부사장은 “디자인은 기아차 브랜드 구축의 근간이다. 쏘울의 디자인은 젊은 감각을 지닌 전세계 고객을 겨냥해 개발했다”고 소개했다.
기아차 성장 동력은 디자인이었다. 기아차는 지난해까지 2년 연속 적자를 냈지만, 올 상반기에만 2189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기아차는 이같은 디자인 경영에 힘입어 올 3분기에도 예상을 웃도는 실적을 내며 4분기 연속 영업흑자를 이어갔다. 기아차는 10월24일 서울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에서 열린 기업설명회에서 3분기 영업이익이 537억원으로 지난해 4분기 이후 흑자 행진을 지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3분기 글로벌 시장 판매 대수는 수출 15만여 대를 포함한 22만여 대, 매출은 3조4천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각각 4.6%와 4.9% 늘어났다.
기아차는 9월 내수시장에서 2만4322대를 팔아 시장점유율 31%를 기록하며 현대자동차(40%)에 따라붙었다. 기아차가 ‘30% 벽’을 깬 것은 2000년 12월(32.9%) 이래 8년 만이다.
GM·포드·크라이슬러 등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이 휘청하는 와중에 기아차의 디자인 질주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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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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