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이 56년 만에 술을 끊는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 맥주를 끊더니 세계적 불황의 터널에 접어든 지금 ‘금주 목록’에 소주까지 포함시켰다. ‘OB 라거’와 ‘처음처럼’을 함께 제조할 ‘주당 기업’이 나온다면 주류 업계 판도를 뒤흔들 폭탄주가 될 수도 있다.
두산은 주류 사업 부문을 팔기로 했다. 업계에선 사정이 다급해진 두산이 매각 자금으로 ‘미국산 스라소니’(밥캣·BobCat)를 또다시 지원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밥캣은 두산인프라코어가 51억달러에 인수한 미국 건설장비 업체로, 두산그룹의 재무 안정성에 대한 시장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킨 발화점이었다. 이에 대해 두산은 “주류 사업 매각은 밥캣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올해 말로 예정된 지주회사 전환을 위한 절차”라고 해명했다. 배경이야 어쨌든 두산의 주류 매각 방침은 주력 상품인 ‘처음처럼’이 처음 같지 않다는 현실을 드러내주고 있다.
진로·두산 소주시장 점유율/ 맥주시장 점유율/ 최근 3년간 주요 소주 제품 시장점유율 추이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두산은 1952년 동양맥주(OB맥주의 전신)로 주류 사업을 시작한 뒤 1994년 경월소주를 인수해 소주 사업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1998년 OB맥주를 외국 회사에 매각한 뒤 이제 소주와 와인 사업도 팔기로 해 주류 업계의 전설로만 남게 됐다. 두산의 소주 승부수는 2006년에 던져졌다. 1998년 이후 계속된 소주의 저도화 추세 속에서 두산은 2006년 2월 세계 최초의 알칼리 환원수 소주라는 야심작 ‘처음처럼’을 내놨다. 그해 9월에 월 판매량 100만 상자를 돌파하며 시장에 선풍을 일으켰다. 확고한 브랜드 포지셔닝과 함께 타깃 소비자층인 25~35살 직장인과 여성층에 대한 마케팅이 적중한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진로의 진노가 이어졌다. 수도권에서 절대적인 시장 지위를 확보하고 있던 진로는 그해 8월 업계 최초로 설탕을 빼고 핀란드산 순수 결정과당을 사용했다는 ‘참이슬 후레쉬’로 맞불을 놓는다. 지방 소주회사들도 경쟁적으로 저도주 제품을 출시해 2007년 이후 두산은 더 이상 약진을 하지 못했다. 주류 도매상에 대한 교섭력 약화와 수도권·강원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방의 유통망 미비도 시장점유율 정체의 원인으로 자체 분석했다.
반면 진로는 출시 5개월 만에 3억 병 판매를 돌파한 ‘참이슬 후레쉬’와 리뉴얼된 ‘참진이슬로 오리지널’ 소주에 힘입어 국내 소주 시장 50%를 점유하게 됐다. ‘J’ ‘일품진로’ 등 지속적인 제품 출시와 대대적 마케팅으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해갔다. 하이트 자회사로 편입된 진로는 내년 상반기 중 증시에 재상장하는 감격도 누릴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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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12일 마감된 두산그룹 주류 사업 입찰에 국내외 사모펀드는 물론 롯데 그룹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이르면 이번주에 선정될 우선협상 대상자가 누가 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입찰 제안서를 낸 업체는 두산 계열의 포장용기 생산업체인 테크팩을 인수한 MBK파트너스, 2005년 진로 인수전에도 참여했던 미국계 어피니티(AEP), JP모건 계열의 CCMP, 씨티그룹 계열의 CVC, 국내 사모펀드인 한국H&Q, 맥쿼리, 보고펀드, KTB네트워크와 롯데 등으로 알려졌다. 유력한 후보였던 GS그룹과 딤플로 유명한 디아지오코리아는 인수전에서 발을 뺐다. 두산이 인수 참여 업체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현재로선 두산과 밀접한 관계를 선점하고 있고 HK저축은행 인수 등 막강한 자금력을 과시하고 있는 MBK와 역시 현금이 풍부하고 주류 사업을 갖고 있는 롯데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두산은 매각 금액으로 7천억~1조원 정도를 제시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인수 후보들은 그 가격엔 힘들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우선협상자가 결정되더라도 실사 과정에서 인수 금액을 둘러싼 실랑이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인수 가격이 비싼 만큼 한 기업이 가져가기엔 무리라는 평가도 나온다. 사모펀드와 롯데가 컨소시엄을 이루거나 롯데가 다른 사모펀드에 투자하는 시나리오도 거론되고 있다. 차재헌 동부증권 연구원은 “사모펀드가 경영권을 인수해 2~3년 뒤 재매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쳤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높은 가격에 되팔아 차익을 노리는 사모펀드가 인수한다면 당장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적을 것이지만 롯데가 인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내친김에 롯데가 OB맥주를 함께 인수해 국내 최대 주류 업체인 하이트-진로 그룹과 일합을 겨뤄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소주 업계 재편이 전체 주류 시장의 전쟁으로 번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차 연구원은 “진로가 수도권을 기반으로 51%대의 탄탄한 시장점유율을 지키고 있는 반면, 두산은 7월 이후 점유율이 10%대로 하락하고 있다”면서 하이트-진로와 진검 승부를 하려면 두산주류와 OB맥주를 동시에 인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맥주 업계는 하이트-두산-진로의 3자 구도였다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벡스로 유명한 세계적 맥주회사인 벨기에의 인베브가 OB와 카스를 인수함에 따라 지금은 하이트와 OB가 58% 대 42%로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그런데 인베브가 미국 맥주 업체인 ‘안호이저-부시’를 인수하면서 OB맥주의 지분을 매각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외신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현재 OB맥주 인수 의사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업체는 어피니티, MBK, 롯데 등이다. 두산주류 인수 후보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산주류 매각이 성공할 경우 OB맥주 매각 작업에도 연쇄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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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업계 관계자는 “인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주류 시장에 또 다른 공룡이 탄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증권사 음식료 부문 분석가들은 만일 롯데가 두산주류와 OB맥주를 순차적으로 인수하게 된다면 진로-하이트 그룹에 위협적 존재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이트 관계자도 “OB가 지금은 외형 확대보다는 수익성 위주의 전략을 유지하고 있어 경쟁이 치열하지 않지만 대형 식음료 업체가 OB맥주를 인수해 신제품을 내놓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친다면 상당한 파장이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롯데는 계열사인 롯데칠성이 주류 사업을 병행하고 있어 대기업 중에서도 가장 파괴력 높은 후보로 평가되고 있다. 롯데칠성은 양주 사업뿐만 아니라 지난 11월19일에는 증류식 소주도 출시하는 등 발빠른 행보로 주류 사업에 강한 집념을 보이고 있다. ‘롯데 라거’ ‘롯데 처음처럼’이란 브랜드가 나온다면 술의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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