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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협력사, 상처만 남은 반란

등록 2008-09-05 00:00 수정 2020-05-03 04:25

지난 5월 임가공 임률 인상·물량 유지 등 내걸고 납품 거부… 일부 업체 문 닫고 노동자들은 상여·퇴직금 못 받아

▣ 구미=글·사진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8월28일 저녁 8시.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렸다. 정 사장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가 가진 2대의 휴대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거나,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뒤 끊어져버릴 따름이었다. 경북 칠곡군 석적면 성곡리.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에도 20여 분을 달려온 참이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간 뒤에야 마을 들머리 당산나무 주변에 시커먼 조립식 공장 건물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공장을 그냥 지나쳐온 것이었다. 주야 2교대로 24시간 돌아가는 휴대전화 조립공장에 전등불이 모두 꺼져 있을 수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시커먼 간판 자국이 남은 벽면 한쪽에 ‘공장 임대’라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마실을 나온 마을 어르신이 “삼성이랑 다투다 지난달에 망한 공장이 거기”라고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건화전자는 지난 6월 초순부터 사실상 폐업에 들어갔다. 이 업체는 지난 5월8~9일 삼성전자 구미 사업장에 대한 납품 거부에 나선 10개 임가공 조립 협력업체 중 하나였다. 당시 삼성전자 구미 사업장은 생산라인의 10~20%가 멈춰섰는데, 협력업체들이 벌인 ‘을(乙)의 반란’으로 생산 차질을 빚은 건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한 임가공업체 사장은 “외국인 노동자와 주부사원들을 고용해도 한 달에 100만~150만원씩 인건비가 들지만, 삼성전자의 임가공료는 매년 거의 오르지 않았다”면서 “삼성이 베트남 공장을 지으면서 구미에서 휴대전화 생산 물량을 줄일 것이라는 불안감까지 극심한 상황이라 집단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저항한 업체들이 큰 타격

납품 중단 사태 100여 일이 지난 뒤 만난 임가공업체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을 “위기를 맞은 협력사들이 ‘꿈틀’해봤지만 결국 상처만 남은 꼴”이라고 평가했다. 연초 1만 명을 넘었던 임가공업체 직원들은 6천~7천 명 수준으로 줄었고, 8월20일께에는 고용인원 수로 최대 규모였던 ㈜에스앤유가 폐업에 들어갔다. 퇴직금과 체불임금을 받지 못해 6월11~12일 구미시청 현관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던 건화전자 직원들은 대부분 삼성전자 쪽에서 소개해준 다른 협력사로 이직했지만, 밀린 상여금과 장기근속자의 퇴직급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이들 임가공업체에 납품하던 2차 협력업체의 한성구(가명) 사장은 “마지막까지 ‘저항’한 업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전했다. 구미 전체의 휴대전화 임가공 물량이 연초 700만 대 안팎에서 최근에는 550만 대 정도로 줄었고, 특히 건화전자와 함께 6월 초까지 납품 재개에 나서지 않은 A사와 B사의 작업 물량이 급감했다는 설명이다. 최근에는 제이엔텍, 성희전자 등 임가공업체 3~4곳이 잇따라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세무조사 받을 때가 됐으니 받았다” “납품 중단과 관련해 경영 현황이 알려지면서 탈세 정황이 잡혔을 거다” “삼성에 대든 괘씸죄 아니겠냐” 등 협력사 관계자들의 해석은 분분했다. 또 다른 임가공업체 임원은 “예전엔 삼성전자 임가공업체들의 은행 신용등급이 1등급이었다면 요즘은 5등급 정도로 떨어졌다”면서 “곧 망할 회사라고 생각하는지 은행돈을 빌리기도 힘들고 이자도 높아졌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 쪽에서는 납품 중단 사태 이후에도 휴대전화 생산 물량 감소가 없다고 밝혔지만, 현장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주부사원들의 설명은 달랐다. 기능설명 매뉴얼과 각종 부자재들을 포장용기에 담는 일을 하는 성현숙(44·가명)씨는 “구미 임가공업체에서는 법정 최저임금만 주는데, 여기 일하는 아줌마들은 통상 임금의 1.5배를 더 쳐주는 야·특근을 해서 생계를 메우는 식”이라며 “요즘은 주말근무 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어쩌다 불러주면 빨리 응답하기 위해 휴대전화 창을 한 시간이면 10여 차례씩 확인한다”고 호소했다.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김혜자(42·가명)씨는 “3년째 야간조에서 일하고 있는데 잔업·특근 때문에 아침 9시에 퇴근하던 게 요즘은 새벽 5시40분으로 빨라져버렸다”면서 “화물차를 모는 남편의 벌이가 요즘 신통치 않아, 오전 나절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야간조를 다니는 주부사원들은 대개 저녁 9시에 출근하기 때문에, 낮에는 집안일과 자녀들을 돌보는 틈새 시간을 활용해 잠을 자야 한다.

‘관리의 삼성’이라 불릴 만큼 협력사나 구성원들에 대한 관리에서 다른 기업들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삼성전자에서, 또 그룹의 모태라 할 경북 구미지역에서 납품중단 사태가 빚어졌던 까닭은 무엇일까. 4월 말 삼성전자와 협력업체들이 주고받은 공문에는 임가공업체들의 생존에 대한 위기감이 잘 드러나 있다. 10개사 사장들은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 앞으로 보낸 이 공문에서 “(임가공업체들의) 재무구조가 날로 열악해져 국세·지방세 체납은 물론 금융거래의 제약 및 상환 압박 등 악순환이 반복되고, 해외시장과의 경쟁력이 대두되면서 구미사업장의 휴대폰 바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라며 “삼성전자가 1분기 어닝서프라이즈(깜짝 실적)를 외칠 때 상여금도 제대로 지급 못하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애초 삼성쪽 요구로 공장 확충

업체 사장들이 경영 악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요구한 사항은 임가공 임률 인상, ‘로스 금액’(불량 제품에 따른 손실) 변상의 불합리 개선, 생산물량 유지 등 5가지였다. 일종의 납품 단가라 할 수 있는 임가공 임률을 35~40% 올리고, 조립 과정이 아닌 부품 자체의 문제로 불량이 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고려해달라는 것이었다. 또 월 700만~800만대에 이르는 구미공장 생산물량을 5년간 유지하고, 해외 공장을 짓게 되면 협력업체 사장들과 협의해 손실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는 회신 공문을 보내 “(협력사의) 입장을 이해하려 해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으며 오히려 강력한 유감의 뜻을 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원가 절감, 생산성 향상 및 관리 효율 등이 미흡하여 해외 주요 경쟁사의 협력업체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져 모기업은 더 이상 제조물량을 유지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고 답했다. 또 1분기 어닝 서프라이즈에 대해선 “주로 해외 생산거점에서 얻은 이익으로 구미사업장은 오히려 경쟁력이 악화돼 채산성이 떨어지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번 사태에는 지역 특유의 서운함도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한 협력업체 임원은 “삼성그룹의 모태였으며 휴대전화 생산기지로서 ‘애니콜 신화’를 쌓는 토대가 된 경북 구미 지역임에도 버림을 받았다는 정서가 ‘반란’의 불쏘시개가 됐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100여 일이 지난 지금 협력업체들의 요구사항 중 일부는 수용됐다. 품목에 따라 다소 편차가 있지만 지난해보다 임가공 임률은 10% 정도 올랐고, 삼성전자가 요구한 생산 시스템 변경도 업체의 자율에 맡기는 것으로 결정됐다. 애초 삼성전자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밀려오는 부품들을 작업자들이 앉아서 조립하던 방식을 버리고, 작업자가 선 채로 여러 종류의 휴대전화를 조립하는 일종의 ‘혼류생산’을 도입하라고 임가공업체들에 지시했다. 그러나 로스 금액 변상 기준을 2~3년 전까지 소급해 적용하고, 물량 유지를 보장해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른바 휴대전화의 가격 인하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글로벌 경쟁환경’에서 임가공업체들의 요구는 무리한 게 아니었을까. 이에 대해 협력업체 C사의 사장은 “3~4년 전만 해도 업체들의 직원 수는 100~200명 정도였지만, 삼성 쪽에서 공장 확충을 요구하면서 500~600명 선까지 늘어나게 된 것”이라며 “당시엔 인원을 확보하지 않으면 기존 물량도 빼겠다고 공공연히 얘기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구미 생산물량을 줄이면 인건비와 설비투자 부담은 고스란히 협력사들이 떠안게 된다”고 항변했다. 또 다른 협력사 관계자는 “애초 ‘갑’의 말만 믿고 투자를 감행한 것이 바보짓이었는지 모른다”면서 “얼마 전 삼성전자가 대대적인 상생협력식을 벌이면서 임가공업체들은 한 곳도 부르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를 협력업체도 못 되는 작업반장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고 돌아봤다.

상생협력 모델 고민할 때

준대기업 규모인 10개 임가공업체들의 반란은 ‘진압’되거나 ‘화해’가 이뤄진 형국이지만, 휴대전화 산업의 원가 낮추기 전쟁은 여전히 구미의 산업환경과 노동시장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인건비가 곧 기업경쟁력이 되는 임가공업체들의 입장에서는 불법파견이나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활용을 감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실제 한 인력파견업체 사장은 “구미 지역에는 유학비자를 받고 들어와 공장에서 일하는 ‘무늬만 유학생’들도 많은데, 이런 불법체류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임금의 일부를 받는 방식으로 영업하는 회사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의 모경순 사무처장은 “최근 4대보험 가입 등을 강제하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이주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불법적인 인력파견업체들을 활용하면서 임금체불과 관련한 책임을 사업장과 파견업체가 서로 떠넘기는 사례도 나타난다”면서 “생산직에서 일하는 분들의 임금이 낮아지고 일자리를 찾기도 힘들어졌기 때문에 지역 서민경제가 좋아질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 최윤규 조사통계팀장은 “구미 등지에서 저임금 구조 탓에 숙련근로자가 형성되지 않고, 대기업들 입장에서는 품질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커지는 악순환 상황이 벌어지는 게 현실”이라며 “임가공을 비롯한 노동집약적 생산분야에서도 근로자·중소기업·대기업이 모두 윈윈하는 새로운 상생협력 모델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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