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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 뛰고 OPEC도 뛰어놀고

등록 2007-11-02 00:00 수정 2020-05-03 04:25

개도국 석유 소비 급증과 달러 약세로 3차 오일쇼크 우려… 돈 버는 중동 산유국과 다른 국가들의 갈등 커져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고유가 충격이 전세계 경제를 엄습하고 있다. 한국은 석유 수입량 세계 4위, 석유 소비량 세계 6∼7위이다. 유가쇼크에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경제다. 10월25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거래된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WTI) 현물가격은 배럴당 92.79달러로 사상 처음으로 종가 기준 90달러대를 밟았다. 중동산 두바이유 현물가격도 이날 배럴당 80.53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깼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이 11월부터 하루 50만 배럴을 증산하기로 했음에도, 추가 증산 결정이 없을 것이라는 소문만으로도 유가가 다시 폭등하고 있다.

WTI 기준 국제유가는 2000∼2003년까지 연말 현물가격으로 배럴당 20달러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석유 수입국들의 ‘좋았던 그 시절’은 2004년을 기점으로 종언을 고했다. 중국의 석유 소비량이 1년 전에 비해 무려 15% 증가한 2004년부터 국제유가는 고공행진을 시작해 2004년 평균 41.50달러, 2005년 평균 56.46달러, 2006년 평균 66.04달러로 치솟았다. 이제 배럴당 100달러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골드만삭스가 2년 전에 예언했던 국제유가 대급등(Super-spike) 시대에 돌입한 것일까?

생산량 안 줄였는데도 계속 급등세

예전에는 유가가 오르면 산유국의 증산이나 새로운 유전 개발이 이뤄지고, 소비자들도 소형차를 구입하고 대체에너지로 눈을 돌리면서 석유 수요가 줄어 유가가 다시 적정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사이클이 작동하지 않는다. 산유국, 즉 공급자 위주의 시장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요즘 오일 가격 폭등의 배경에는 △펀더멘털로서의 수요·공급 요인 △달러 약세 등 금융시장 측면 △중동 정세 같은 지정학적 위험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한꺼번에 작용하고 있다. 최근의 오일 가격 폭등은 OPEC이 생산량을 줄였기 때문이 아니다. 각국의 석유 비축량도 과거보다 늘었다. 그러나 펀더멘털 측면에서 석유 수급이 워낙 타이트하기 때문에 수요·공급에 미세한 변화만 와도 유가가 치솟고, 저금리와 달러 약세를 피해 투기자금마저 석유시장에 몰려들면서 3차 오일쇼크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선 수요 측면을 보자. 중국, 인도 등 브릭스 경제가 고성장하면서 신흥 산업국의 석유 소비가 급증하고 있다. 심지어 아프리카 국가들의 석유 수요도 급증하는 등 죽어 있던 개도국 경제가 지난 10여 년 사이에 급성장하고 있다. 중동 정세 불안이라는 정치적 요인이 강했던 1, 2차 오일쇼크 때와 달리 지금은 ‘개도국 경제의 석유 소비 급증’이라는 경제 구조적인 요인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박복영 연구위원은 “석유 가격이 폭등하면 미국(세계 석유 소비량의 25%, 하루 2100만 배럴 소비) 경제가 둔화될 것이고 그러면 석유 수요가 다시 줄어 가격이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일반적인 전망도 하기 통어려운 상태”라며 “중국 등 개도국의 석유 수요가 워낙 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약한 달러, 헤지펀드를 석유시장으로

2002∼2005년에 세계의 석유 소비 증가율은 2.7%로, 1990∼2001년의 1.4%보다 2배로 높아졌다. 2005년 이후 전세계 석유 소비량 증가율은 1%대였으나, 중국은 5∼6%대, 중동은 4%대, 아프리카도 4∼6%대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북미·유럽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석유 소비는 정체된 상태인 반면, 중국·옛 소련·아시아·중동·중남미·아프리카 등 비OECD 국가들은 2004년 이후 해마다 3%대의 석유 소비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중국의 석유 수요는 2004년 하루 640만 배럴에서 올해 750만 배럴, 내년에 800만 배럴로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중국은 에너지 소비효율이 일본에 비해 8∼9배나 낮기 때문에 경제가 성장할수록 석유 소비량이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동안 전세계에 싼 상품을 수출하면서 ‘저물가 수출국’ 역할을 해왔던 중국이 이제는 유가를 끌어올려 ‘인플레이션 수출국’이 되고 있는 양상이다.

흥미로운 건 산유국인 중동 국가들의 석유 수요도 중국 못지않게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속적인 원유 가격 급등으로 2000년 이후 중동 걸프 지역에 유입된 오일머니는 2조달러를 웃돈다. 박복영 연구위원은 “중동 산유국마다 넘쳐나는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자동차 구입도 늘면서 석유 소비가 늘고 이것이 고유가를 초래하는 또 다른 요인”이라며 “중동 지역 인구증가율이 전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동의 하루 석유 소비량은 2004년 570만 배럴에서 2008년에 680만 배럴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시장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미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연간 8천억달러,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6%)에 따른 달러가치 하락도 유가 폭탄의 중요한 요인이다. 미국은 달러를 마구 찍어내 경상수지 적자에 따른 국가파산을 막고 있는데, 이 때문에 달러 인플레이션으로 달러가치가 계속 하락하고 있다. 사실 지난 3∼4년간 달러 약세 속에서 투자자산들이 달러 표시 외화자산(미국 주식과 채권 등)에서 이탈해 원유 등 현물 상품시장으로 옮겨가면서 원유 가격이 뛰었다. 박복영 연구위원은 “달러가치 급락에 따라 헤지펀드들이 개도국의 주식 등 위험자산에서 돈을 빼내 석유 선물시장으로 이동하면서 헤지펀드의 원유 순매수 포지션이 자꾸 쌓이고 있는 중”이라며 “석유시장은 규모가 크지 않아 조그만 자극에도 유가가 크게 출렁거리게 된다”고 말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에 따르면, 10월16일 기준으로 대형 투기자금에 의한 WTI 원유 선물 순매수계약(1계약=1천 배럴) 규모는 8800만 배럴로 일주일 전에 비해 27% 증가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미국의 막대한 무역적자의 뒤편에는 고유가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 즉, 고유가 때문에 석유를 수입하는 미국의 무역 적자가 커지고 중동의 무역 흑자는 급증하는 ‘전세계적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이 달러 약세를 부추기고 달러 약세가 다시 유가를 끌어올리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양상이다. 특히 미국이 자국 상품의 수출을 늘려 무역 적자 폭을 줄이려고 ‘약한 달러’ 정책을 유지하고, 미국 경기 둔화를 막기 위해 추가 금리 인하에 나설 것으로 관측되면서 달러가치는 더욱 하락하고 있다. 달러가치가 계속 하락하면 전세계의 투자자산이 원유 선물시장으로 우르르 몰리면서 유가를 더 끌어올릴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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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의 공급 능력은 어떨까? 아무리 신흥 개도국에서 뜻밖의 석유 수요 증가가 나타나더라도 공급 여력만 충분하다면 유가는 크게 오르기 어렵다. 한국석유공사 구자권 팀장은 “OPEC 산유국에는 개발·생산할 만한 원유 자원 여유가 아직 어느 정도 있으나 비OPEC 산유국들의 생산이 한계에 이르러 석유 공급이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며 “지금은 (석유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OPEC 회원국들이 놀기 좋은 시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IEA의 세계 석유 수급 전망을 보면, 비OPEC 국가들의 석유 공급량은 2004년부터 올해까지 하루 4900만 배럴로 거의 변동이 없다. 비OPEC 산유국의 공급 여력이 제한돼 원유 공급이 빠듯해지면서 OPEC이 굳이 가격 담합을 하지 않더라도 유가는 해마다 오르고 있다.

“더 올려도 되는구나” 중동의 학습

석유를 대신할 만한 대체에너지의 부재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중국·인도 등에서 급증하고 있는 석유 수요처는 다른 연료로 대체가 어려운 수송용이 대부분이다. 1, 2차 오일쇼크 직후에는 발전용 석유 수요를 원자력과 석탄 등으로 대체할 수 있었으나, 자동차 등 수송용 수요는 마땅한 대체연료가 없다. 현재 전세계 석유 수요의 대부분이 수송용이고 발전용은 6∼7%에 불과하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이달석 연구위원은 “말은 무성했지만 수소에너지와 전기자동차 등 신재생에너지가 전체 에너지 소비량에서 담당하는 비중은 현재 미미한 편이고 대중화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며 “지난 몇 년간 유가가 계속 오르는데도 마땅한 석유 대체 연료가 등장하지 못하면서 ‘대체 연료’에 대한 산유국들의 걱정이 과잉 우려였다는 점이 입증됐다”고 말했다. 유가가 아무리 크게 올라도 석유 소비가 둔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인식이 OPEC 산유국 사이에 퍼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난 20여 년간 저유가 시대가 지속됐기 때문에 각국 정부나 민간기업들이 대체에너지 개발·투자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석유 생산 시설에 대한 산유국의 투자도 그동안 부진했다. 한국은행 신원섭 팀장(해외조사실)은 “오랜 저유가 체제 속에서 산유국의 채굴 장비도 노후화됐고,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중동 국가에 오일메이저의 진출이 매우 제한돼 석유시설 투자가 부진했다. 이 때문에 원유 생산 능력이 커지지 못한 점도 있다”고 말했다.

사실 원유 가격이 연일 폭등하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은 ‘학습 효과’라고 할 수 있다. OPEC은 항상 “유가가 적정 가격(세계 경제가 둔화되지 않고 수요가 뒷받침되는 가격 수준)을 넘으면 석유 수요가 급락하고 이에 따라 원유 가격도 추락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박복영 연구위원은 “OPEC의 목표 유가가 4년 전만 해도 배럴당 20달러 정도였는데 매년 10달러 이상씩 올라도 당장 큰일날 것 같았던 세계 경제가 그대로 견디고 버티니까, 이를 깨닫고 계속 유가를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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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계 경제는 지난 4년간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유가 충격을 어떻게 흡수하고 있을까? 우선, 유가가 단기간에 폭등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오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현진 연구위원은 “국제에너지기구(IEA) 회원국들이 90일분 이상 비축유를 보유하고 있는데다 전세계적인 부동산 버블에 의한 자산 효과가 있어서 유가 상승분을 전세계 가계들이 어느 정도 감당하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실질유가도 고려해야 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다른 상품 가격은 많이 올랐지만 상대적으로 유가는 덜 오른 편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세계 경제가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중동산 두바이유 명목가격 임계치를 배럴당 84달러라고 분석했다. 두바이유의 경우 1차 오일쇼크 때인 1974년과 2차 오일쇼크 때인 1980년의 실질 실효가격(물가 수준을 조정한 실질가격과 경제의 석유 의존도를 함께 고려한 가격)과 동일한 수준은 각각 배럴당 84달러(명목가격)와 151달러라는 것이다. 이 수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세계 경제가 지금의 고유가 수준과 어느 정도 공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오일달러로 유럽·미국 알짜 기업 사들여

달러 약세가 고유가 충격을 상쇄해주는 효과도 있다. 우리나라 등 원유 수입국 처지에서 보면, 달러가치 하락 덕분에 달러 베이스로 거래되는 원유를 다소나마 싸게 사오는 효과가 있다. 올 들어 달러 기준으로는 유가가 40% 이상 급등했지만 유로화 기준으로 보면 30% 정도 올랐다.

고유가 지속에 따른 중동 산유국과 다른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도 빚어지고 있다. 중동 국가들은 지난 몇 년간 벌어들인 막대한 오일 달러를 바탕으로 유럽과 미국의 알짜 제조업체와 금융회사들을 잇따라 사들이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 국가들은 “오일머니에 의한 기업 인수·합병을 규제해야 한다”며 중동 국가들과 대립하고 있다. 고유가 시대가 장기화하면서 원유는 갈수록 ‘정치적인 상품’이 되고 있다. 김현진 연구위원은 “고유가 속에 자원 민족주의가 재등장하면서 산유국들이 ‘왜 우리가 다국적 석유 메이저들의 배를 불려주냐’며 광구를 폐쇄하는 등 정치적 갈등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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