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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사회공헌 현장②- 포스코] “제대로 배워서 남 줘야죠”

등록 2007-08-24 00:00 수정 2020-05-03 04:25

포스코의 사회공헌 역사를 만든 고준석 대리 “봉사자 교육 서비스 계획”

대기업 사회공헌 현장 ② 포스코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8월16일 경남 진주의 진주성남병원 2층 휴게실 곳곳에선 이발하는 모습이 여럿 눈에 띄었다. 이발 기계에 머리를 맡긴 쪽은 이 병원에 입원 중인 정신질환자들로 이날 하루 1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발 도구를 잡은 8명 중에는 고준석(44) 포스코 대리(광양제철소 생산기술부 구내운송과)도 끼어 있었다. 고 대리는 “매달 셋쨋주 목요일에 환자분들께 이·미용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며 웃었다.

친목 모임 ‘등불회’부터 시작

고 대리를 비롯해 진주성남병원에서 정기적으로 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포스코 광양제철소 직원과 직원 부인, 지역민들로 이뤄진 봉사단체인 ‘아름다운 손’ 소속이다. 꾸준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이들만 30~40명에 이르는 단체 회원들은 진주성남병원뿐 아니라 경남 하동 우리들병원, 전남 광양의 우리들병원, 광양의 노인전문병원에서도 노인 환자들을 상대로 종이접기 지도, 동화책 읽어주기, 이·미용 서비스, 식사 도우미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고 대리는 평일 봉사 활동의 짬은 교대근무 시간의 틈이나 휴가로 확보한다고 전했다.

고 대리가 참여하고 있는 나눔 활동은 ‘아름다운 손’ 말고도 여럿이다. 광양제철소 생산기술부 직원 250명으로 짜인 ‘프렌즈 봉사단’의 열성적인 참여자이자, 바닷물의 소금 농도에서 이름을 따온 광양 지역 청소년 단체인 ‘3% 봉사단’ 단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고 대리가 펼친 나눔 활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포스코의 사회공헌 활동이 전개되는 초창기 역사와 만나게 된다.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1987년 포스코(당시는 포항종합제철)에 입사한 고 대리의 첫 일터는 포항 공장이었다. 입사 6개월쯤 뒤 그는 직장 동료들에게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을 만들되 이웃도 함께 돌아보자”는 제안을 한다. 그렇게 결성된 게 ‘등불회’였고 지금도 이 모임은 포항 공장에서 이어지고 있다. 초기 등불회에 참여한 이들은 10여 명이고, 모자보호 시설인 경주 애가원의 모자 가정을 돌보는 일을 비롯해 인근 지역 사회와 연대를 맺는 활동을 조용하게 펴나갔다. 기업의 사회공헌 같은 개념이 싹트지 않은 시절이었다. 등불회 결성을 제안한 계기와 배경을 묻자 그는 그냥 웃기만 했다. “뭐, 그냥. 글쎄, 왜 그랬는지는 나도….”

천성이었는지 포항에서 광양으로 터전을 옮긴 1992년 이후에도 그의 나눔 활동은 이어졌다. 나눔 활동에 공부를 병행해 1997년 광양 한려대학에서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자원봉사 활동을 하다 보니 이론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자원봉사 체험 교육 때 좀더 자신감을 갖고 체계적으로 해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고 대리는 8월13일에도 방학을 맞은 지역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지역복지 체험 프로그램 교육을 했다.

그가 광양 지역에서 나눔 활동을 벌이면서 새롭게 만난 이들은 청각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자원봉사는 자연스레 장애인, 특히 청각·언어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을까 해서 나름대로 공부한 수화 실력이 이제는 일반인들에게 수화 교육을 할 수준에 이르렀다. “수화로 대화를 하다 보니 남들보다 그들의 문화와 어려움을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알리고, 도와줄 사람들과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장애인·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외국인 노동자들과 인연을 맺은 건 지역적 특성 때문인 듯했다. 광양 지역에는 외국인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는 초남공단, 옥곡산단이 있어 지역 봉사단체의 활동은 이들과 자연스레 끈이 닿는다.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주목적은 아픔을 같이하고 달래주는 일입니다. 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건 언어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언어 문제는 단지 불편함일 뿐이고, 고향과 조국을 떠나 있는 데 따른 외로움과 그리움이 더 문제라고 느낍니다. 생일 파티를 열어주고, 아플 때 병원에 데려가 주고 하면 굉장한 마음의 치료가 되는 것 같아요. (한국 근무) 기간을 마치고 돌아간 이들 중에는 지금도 연락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고 대리의 봉사 활동은 차츰 지역사회로 퍼져나가고 급기야 회사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2003년 광양제철소 생산기술부 직원들을 포괄하는 ‘프렌즈 봉사단’이 꾸려진 게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고 대리는 프렌즈 봉사단의 창립 멤버이자 총무였다. 전체 회사 차원의 ‘포스코 봉사단’이 꾸려진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포스코 봉사단이란 큰 숲 아래 서울, 포항, 광양 세 군데의 지역협력 봉사단체가 있고, 프렌즈 봉사단은 그 아래 놓여 있는 모습이지만, 숲의 뿌리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파종된 작은 씨앗이었던 셈이다.

고 대리는 “봉사 활동도 같이 하면 공동 상승(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걸 느낀다”며 ‘역기론’을 꺼냈다.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역기는 고작해야 40kg 정도, 두 손으로 들어도 80kg에 지나지 않지만, 두 사람이 맞들면 150kg짜리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부서 차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니 개인적으로는 못했던 일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글 교육을 할 때 교재를 구입하거나, 생일 파티를 열어줄 때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렌즈 봉사단과 상시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가 60명 안팎에 이르게 된 것도 이런 시너지 효과에 힘입은 바다.

고 대리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원봉사 현장에 많이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큰아이가 다섯 살 때쯤인가 뇌성마비 장애인 시설에 데리고 갔더니 뒤로 숨더군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거기 아이들과 친구가 돼 있는 걸 봤습니다. 중3, 중2학년인 두 아들과 다섯 살짜리 딸을 두고 있는데, 다른 집 애들과 달리 장애인들을 꺼리지 않고 재미있게 잘 놉니다.” 자신의 봉사 활동이 자녀 교육으로 이어지는 기대 밖의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돼도 봉사 현장에 따라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자신밖에 모르는 시대에 남과 나누고 베풀 줄 알고, 친구가 어려울 때 가슴 아파할 줄 아는 걸 스스로 터득한 듯해서 고맙고, 때론 감동스럽기까지 합니다. 건강을 염려해 소극적이던 집사람도 봉사 활동을 적극 지원해주고 있고….”

일터와 지역사회를 이어주다

고 대리는 “자원봉사 참여자들의 마음 자세를 새롭게 하는 교육 서비스를 더 많이 펼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점수를 따려고 봉사 현장에 나서는 바람에 퇴색된 나눔 활동의 의미를 교육으로 바로잡고 싶다는 바람이다. 바닷물을 바닷물답게 만드는 3%의 소금물이 되고 싶다는 뜻으로 들렸다. 광양제철소로 들어오는 원료나 자재, 생산 제품들의 흐름을 원활하게 연결해주는 그의 업무처럼, 나눔 활동은 그의 일터와 지역사회를 부드럽게 이어주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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