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철강사에 한 획을 그은 포스코 파이넥스 공장, 15년에 걸친 연구개발의 성과
▣ 포항=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회사 정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튼 자동차는 10분쯤 더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리로는 6~7km가량 된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거대한 철 구조물 2개가 나란히 들어선 공장 앞의 파란색 안내 팻말에는 ‘파이넥스 1.5Mt 공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현장을 안내해준 포스코 ‘파이넥스 연구개발 추진반’ 소속 연구원으로부터 조금 앞으로 배치된 왼쪽 구조물은 ‘용융로’ 설비, 오른쪽이 ‘유동로’ 설비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유동로 설비 구조물에는 24층까지 엘리베이터가 가동 중이었고, 그 위로 1개층이 더 이어졌다. 용융로 설비 구조물의 크기도 비슷했다. 머릿속에 25층짜리 큰 빌딩 2개를 상상하면, 이 공장 설비의 전체 모습과 흡사할 것 같다.
준공 행사(5월30일)를 치른 지 닷새를 넘긴 6월4일 포스코 파이넥스 공장은 거대한 규모 말고는 웅웅거리는 여느 공장 시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거의 모든 언론에서 ‘세계 철강 기술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찬사가 쏟아진 데 따른 설렘도 이젠 가라앉아 있었다.
값싸고 풍부한 가루 형태 철광석 활용
파이넥스 공장의 내부 가동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용융로 설비에 잇닿아 설치돼 있는 파이넥스 연구개발 추진반 본부 3층에 있는 ‘종합운전실’이다. 포스코 쪽의 양해를 얻어 원격조종실 격인 종합운전실에 들어가봤더니 전면에 모니터 6대가 설치돼 있었다. 이들 모니터는 공장 내부의 움직임을 한눈에 비춰주고 있고, 대여섯 명의 요원들이 이를 지켜보며 분주하게 기계를 조작하고 있었다. 공장 설비를 점검하고 가동하는 거의 모든 작업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본부 건물과 연결된 통로를 따라 용융로 설비 구조물 내부로 들어가봤다. 거대한 화덕 같은 시설 주위에서 네댓 명의 현장 근무자들이 일하는 곳에는 맹렬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도 열기로 후끈거렸다. 불꽃이 튀는 중심부는 작은 태양 같은 게 이글거렸다. 유동로를 거친 철광석이 용융로에 이른 뒤 쇳물로 탄생하는 장면이다. 쇳물이라는데, 액체보다는 꼭 기체 같다는 느낌을 줬다.
파이넥스 공장에서 사용하는 원료는 지름 8mm 이하 가루 형태의(FINE) 철광석(분철광)과 일반 유연탄이다. 이 부분이 일반 용광로 공법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파이넥스’ 공법이라는 이름은 가루 형태라는 뜻의 ‘FINE’에 새로운 공법이라는 뜻의 ‘X’를 합친 것이다. 용광로 공법에선 철광석에서 산소를 떼내는 ‘환원’과 철성분을 녹이는 작업이 용광로에서 한꺼번에 일어나지만, 파이넥스 공법에선 환원 공정은 유동로에서, 철성분을 녹여 쇳물로 뽑아내는 작업은 용융로에서 이뤄진다.
현재 제철 기술을 대표하는 용광로 공법에서는 사전에 일정한 덩어리 형태로 구운 소결광과 코크스(유연탄을 잘 타도록 만든)를 사용해야 한다. 유연탄을 연소시켜 철광석(FeO)을 환원시키기 위해 용광로 밑으로 강한 열풍을 불어넣는데, 가루 형태의 원료를 사용하면 날아가버리거나 연소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용광로 공법에 적합한 덩어리 형태의 괴철광석과 잘 뭉쳐지는 성질이 있는 고점결성 유연탄(Cocking Coal)은 전체 매장량의 15~20%에 지나지 않아 비싸고 고갈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철광석 매장량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지름 8mm 이하 가루 형태의 철광석을 활용할 수 있는 공법의 개발은 세계적인 철강회사들의 숙원사업으로 여겨졌다.
포스코의 파이넥스 공법은 가루 형태의 철광석과 일반 유연탄을 가공 없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세계 처음으로 상용화한 것으로 기록된다.
파이넥스 공법의 강점으로는 가격 경쟁력과 함께 환경 친화성이 꼽힌다. 철광석을 단단한 덩어리로 만드는 소결과, 코크스 공정을 생략하기 때문에 오염물질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포스코가 용광로 공법을 대체할 새 기술을 개발하는 작업에 착수한 건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대 들어 세계 철강업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소결과 코크스 공정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에 대한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위기감이 날로 높아졌다. 설비 노화 단계에 이른 미국, 유럽을 중심으로 ‘철강업은 이제 사양 단계’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용광로 공법에 적합한 고점결성 유연탄의 매장량이 한계에 이르러 곧 고갈 상태에 빠질 것이란 비관적 전망도 업계 전반에 확산됐다.
번번이 깨져나간던 롤러
철강회사들이 바뀌는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새로운 공법의 개발이 당위로 여겨졌다. 당시 박태준 회장 체제였던 포스코(이때 회사 이름은 포항제철)도 바짝 긴장한 채 생존전략 모색에 나섰으며, 1992년 12월1일 ‘뉴프로젝트1 추진본부’를 출범시키게 된다. 이는 훗날 파이넥스 공법의 개발이란 열매를 맺는 씨앗이었다. 당시 추진본부에는 30명 안팎의 연구원들이 조업대비팀·건설팀·연구팀으로 나뉘어 일했으며, 조업대비팀의 5명만 전담, 나머지는 기존 업무를 함께 수행하는 겸임이었다. 전담역 5명 가운데는 파이넥스 공법 개발을 완료하는 시기에 실무 총책임(추진반장)을 맡은 이후근 반장이 포함돼 있었다.
포스코 포항 공장에서 만난 이후근 반장의 얼굴에는 아직도 준공식 때의 흥분이 남아 있는 듯했다. “(기술 개발에 착수하던 초기) 박태준 회장이 ‘일본과 유럽의 기술을 도입해 제1의 제철소가 됐는데, 선진국에서 먼저 기술을 주겠는가?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는 게 필수적이다. 빨리 (기술 개발에) 착수하자’고 했다.” 포스코가 새 기술 개발에 나선 해는 마침 ‘3당 합당’이란 정치적 격변을 겪은 때였다. 박태준 회장이 3당 합당의 한 축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포스코도 일정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기술 개발 초기에 회장직이 황경로, 김만제씨로 잇따라 바뀌면서 추진 동력이 약간 주춤해지기도 했다.
포스코는 1995년까지 파이넥스 설비에서 나타나는 철광석의 특성을 연구한 데 이어 1998년에는 하루 15t 규모의 ‘모델 플랜트’를 건설해 시험 조업을 실시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 뒤 2002년까지 하루 150t 규모의 ‘파일럿 플랜트’를 가동해 경제성을 확인하게 되며, 2003년 5월엔 상용화 단계인 연 60만t 규모의 ‘데모 플랜트’를 가동하기에 이른다.
가장 큰 고비는 파일럿 플랜트에서 데모 플랜트로 넘어가는 단계였다고 이후근 반장은 전했다. 실험실의 ‘장난감 자동차’는 잘 굴러가더라도 똑같은 기술로 구현한 실제 크기의 ‘진짜 자동차’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과 같은 사정이었단다. 문제가 생긴 지점은 유동로에서 가루 형태의 철광석을 700℃ 이상에서 꽉 눌러 덩어리 형태로 만드는 ‘성형철’(HCI·Hot Compacted Iron) 공정이었다. 이 공정에서 분철광에 압력을 가하는 롤러가 열팽창 효과로 번번이 깨져나가 연구진을 괴롭혔다.
실패를 거듭한 파이넥스 연구진은 마침내 성형철 관련 기술에서 최고로 평가받던 독일 회사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협상은 난관에 부닥쳤다. 포스코 쪽의 급한 사정을 알아챘던 것인지, 독일 회사는 엄청나게 높은 기술료를 요구했다. 포스코는 독일 회사의 요구를 거부했고, 파이넥스 기술 개발은 좌초 위기에 빠졌다. 한동안 버티던 포스코는 어쩔 수 없이 항복문서를 쓰다시피 독일 회사에 다시 요청해 기술을 들여온다. 다만, 설비 4개 중 1개는 자체 개발한 것으로 채우기로 했다. 마지막 자존심을 세워달라는 연구진의 호소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근 반장은 “결과적으로 독일 기술로 만든 설비의 효과는 기대치의 50%에 불과했고, 우리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건 1년 가까이 버틸 수 있는 것으로 판명났다”고 말했다. 열팽창 때문에 설비가 깨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싸고 단단한 철을 사용하던 시도를 거꾸로 뒤집어, 싸고 무른 철을 쓴 역발상으로 효과를 거뒀다고 이 반장은 설명했다.
노후 용광로들 차례로 교체할 계획
기술 개발에 착수한 뒤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포스코는 2004년 8월 연산 150만t의 상용화 설비 착공에 나선 지 2년9개월 만에 마침내 완공에 이르렀다. 이후근 반장은 “파이넥스 공법의 완성은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라 1992년부터 지금까지 투입된 600여 명의 기술 및 연구 인력들의 노력의 결과”라고 말했다. 이번에 준공된 파이넥스 공장에서 하루에 뽑아내는 쇳물은 4천t 안팎이며, 데모 플랜트 생산 몫까지 포함하면 6800t에 이른다. 이는 포항제철소 4개 용광로에서 하루에 생산하는 쇳물 2만9천t의 20% 수준이다. 포스코는 현재 진행 중인 인도 지역 제철 프로젝트에 파이넥스 공법을 적용할 예정이며, 2010년께 포항제철소 내 소형의 노후 용광로들을 차례로 교체할 계획이다.
민동준 연세대 교수(금속공학)는 “가루 형태의 철광석과 일반 유연탄을 쓸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공정을 줄였다는 점에서 세계 철강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민 교수는 “고로(용광로) 공법과 비교해 원가는 아직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며 “연산 300만t까지 규모를 키워 확실한 사업 모델을 만드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진단했다. “공정을 단축했지만, ‘로’(유동로·용융로)가 2개이고 내부 공정이 복잡하다는 단점도 있다. 관건은 1970년대에 대거 설치된 전세계 고로(용광로) 설비가 교체기에 들어가는 2015년께부터 포스코가 파이넥스를 활용해 마진 높은 비즈니스로 옮겨갈 수 있을지에 달렸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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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200년 가까이 일관제철소 공정은 소결, 코크스, 용광로, 전로, 조괴, 분괴, 압연 등 크게 7단계의 공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제철업에 일대 혁신이 이뤄진 것은 1960년대 들어서였다. 철광석에서 뽑아낸 쇳물을 연속적으로 주형에 흘려넣어 슬래브(쇠판)를 만드는 ‘연주’ 공정이 독일에서 개발돼, 틀에 부어 일정한 모양을 만드는 ‘조괴’ 공정과, 이 철강 덩어리를 슬래브 모양으로 만드는 ‘분괴’ 공정을 대체함으로써 1개 공정을 단축했다. 그 뒤 40년 동안 일관제철소는 각 공정별 설비 개선과 최적화를 이루는 데 그쳤을 뿐 소결-코크스-용광로-전로-연주-압연의 기본적인 공정은 줄이지 못했다.
포스코의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는 기존 일관제철 공정에서 소결과 코크스 등 철광석과 유연탄을 사전 가공하는 공정을 생략해 6개 공정을 4개 공정으로 단축했다. 세계 철강 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지난 1973년 조업을 개시해 세계 철강업계의 후발주자로 꼽히는 포스코는 네덜란드의 아르셀로미탈, 일본 신일본제철, JFE에 이어 조강생산 능력 4위다. 포스코는 이번 파이넥스 공장 준공과 함께 올해 광양과 포항의 설비 개·보수 투자를 통해 2008년에는 조강 생산량 3400만t으로 세계 2위에 올라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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