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으로 전환시키되 별도 직군을 둬 임금을 차별 적용하는 방안…직무 가치에 대한 판단 기준 애매해서 계속 논란 일어날 가능성도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우리은행이 오는 3월부터 직군제를 기초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기로 발표하면서 직무급 도입을 둘러싼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신세계 이마트도 매장 계산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여성 캐시어들을 올 7월 이전에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할 방침이다.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정규직(이하 ‘전환직’)의 임금 체계로는 직무급을 도입할 예정이다. 열린우리당과 정부는 지난 1월 우리은행과 이마트 등의 정규직 전환 대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직무급 임금체계 확산을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으로 ‘우리은행 모델’(직무급+전환직)을 확산시키겠다는 것인데, 정부가 2월5일 발표한 ‘비전2030 인적자원 활용 2+5 전략’ 역시 임금·고용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 지원’을 내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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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법안 시행 앞두고 문의 봇물
국내 기업에서 직무급 도입 논의가 불붙고 있는 배경에는 오는 7월부터 시행되는 비정규직 관련 법안이 자리잡고 있다.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8조는 ‘기간제 근로자임을 이유로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동종 또는 유사한 업무에 종사하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에 비하여 차별적 처우(임금, 그 밖의 근로 조건 등에서 합리적인 이유가 없이 불리하게 처우하는 것)를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환직의 경우 별도의 직군을 신설하거나 업무를 약간 다르게 구분해, 임금 시스템을 기존 정규직과 다르게 적용하면 차별 금지를 비켜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상당수 국내 기업들은 비정규직 법안이 시행되는 이참에 단일 호봉제를 깨고 직무급으로 임금체계를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김동욱 경제조사팀장은 “비정규직 법안 시행과 우리은행의 정규직화 발표 이후 회원 기업들로부터 직무급 도입에 대한 문의가 크게 늘었다”며 “직무급을 도입할 때 예상되는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묻는 기업도 많다”고 말했다. 노동조합에 대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줄 테니 대신 직무급을 받아라”며 공세를 펴는 기업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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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급은 수행하는 개별 직무의 내용과 특성에 따라 노동 가치가 평가되는 시스템이다. 모든 직무들을 기업 성과에 미치는 상대적 가치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임금이 책정된다. ‘호봉급’이 연공서열, 즉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것이라면 ‘직능급’은 개별 노동자의 인적 속성(학력, 능력 등)을 중시하는 것이고, ‘직무급’은 사람의 속성이 아니라 직무 자체의 가치에 따라 임금이 정해지는 것이다. 과연 직무급은 비정규직 문제의 바람직한 해법이 될 수 있고, 또 차별 금지를 원천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임금체계일까?
국내 기업들은 ‘전환직의 고용은 안정시켜주되 임금은 낮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직무급을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직무급은 직무의 성질에 따라 임금을 차등 지급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어느 직무가 더 가치가 있고 어느 직무가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성패를 좌우한다. 바꿔 말해 ‘직무 평가’가 핵심이고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도대체 뭘 기준으로 ‘적정한’ 임금 수준을 정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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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동일한 가치가 있는 직무인지 여부를 평가하는 기준으로는 기술, 노력, 책임, 작업 조건 등 4가지가 거론된다. 그러나 직무 평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생산직 노동자들까지 직무급을 전면 도입하고 있는 미국 유에스스틸사는 개별 직무마다 평가 기준을 선정하는 데 거의 3년이 걸렸고, 노조와 종업원, 회사 간에 수많은 논의와 연구 조사가 이뤄졌다. 각 직무에 대한 가치 평가는 대부분 노사 합의로 결정된다. 그러나 우리은행은 직무 평가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정규직화 방안부터 발표해버렸다. 아주대 박호환 교수(경영학부)는 “직무급 도입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내부·외부 공정성이다. 은행산업이라면 다른 은행의 동일 직무의 임금 수준과 비교해 공정한지, 또 은행 내부의 직무별로 상대적 가치 평가에서 공정한지가 관건”이라며 “직무급이 도입되더라도 ‘차별’ 여부를 놓고 계속 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은행의 경우 입출금 창구 업무에 전환직을 사용한다면 이 업무에 종사하던 기존 정규직은 모두 대출·심사 등 다른 직무로 내보내야 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종사하는 직무에 대한 노동 가치(임금 수준)가 과연 적정한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불거질 수 있다. 직무급제(또는 직군제) 아래서 입출금 창구에 종사하는 대졸 전환직의 임금이 대출업무를 담당하는 기존 고졸 정규직 임금의 70% 수준이라면 이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한국노동연구원 김동배 연구위원은 “동일한 직무라도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가치 평가가 제각각 다르기 마련이다. 어떤 직무가 기업의 성과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따지고 평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전환직에 대한 직무급 도입은 지속 가능한 해법이 아니라 불완전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임금 격차가 고착화될 수도
국민은행은 225개에 이르는 직무별로 분석을 이미 마쳤다. 또 유사한 직무들을 묶은 ‘직렬’이 50여 개에 이르고, 유사 직렬들을 다시 묶은 몇 개의 ‘직군’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직무 평가(직무별 노동 가치 평가)는 아직 실시하지 못했다. 국민은행 인사 담당자는 “직무 구분을 임금 보상체계에 활용할지, 아니면 단순히 개인 경력 개발관리에 쓸 것인지는 기업이 판단할 문제”라며 “아직 임금 보상체계를 바꾸는 데는 활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직무 평가를 둘러싼 논란과 반발이 거세게 일어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태원유 수석연구원(인사조직실)은 “직무 평가를 외부 컨설팅에 맡길 수 있지만, 직무 평가의 등급을 매기는 건 기업 내부의 합의가 필요하다”며 “직무의 가치를 정하려면 공표된 외부 시장임금률(일자리의 ‘시장 가치’) 자료가 필요한데 우리나라에서는 기준 직무들의 시장임금률 정보가 부족한 상태라서 특정 직무의 임금 수준을 둘러싸고 차별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노동조합이 일단 ‘직무급+전환직’을 받아들인 뒤 나중에 임금 교섭을 통해 기존 정규직과 유사한 수준까지 전환직의 임금을 끌어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직무급제 아래서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지면서 고착화되거나, 전환직 임금이 아예 현재 수준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직무급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기대와 달리, 일자리에 대한 임금 격차가 정당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차별을 둘러싼 논란이 광범위하게 확산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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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순수 직무급 3.7% |
직무급 임금 구조가 확립된 대표적인 국가는 미국이다. 비록 ‘순수 미국식 직무급’과는 큰 차이가 있지만, 국내 기업들도 1990년대 초반 이후 연공서열 임금을 파괴하고 대안적 임금체계로 직무급을 도입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2005년 노동부가 국내 3053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기본급 구성 유형을 보면 ‘순수 호봉급’ 45.4%(1386개), ‘순수 직무급’ 3.7%(114개), ‘순수 직능급’ 3.8%였다. 나머지는 ‘호봉+직무급’(9.8%) 등 호봉급과 직무, 직능급이 서로 결합된 임금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순수 직무급을 도입하고 있는 사업장은 대체로 10개 정도의 직무 등급(직무 평가 점수에 따라 각각 적용되는 임금률 등급)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무 등급별로 단일 임금률이 아니라 최고-최저의 ‘밴드 직무급’을 도입하고 있는 경우도 60%에 달했는데, 중앙값 100을 기준으로 최고-최저의 분포는 대략 80∼120 정도였다.
국내에서 직무급제를 시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삼양사가 꼽힌다. 2002년에 직무급을 도입한 삼양사의 경우 직무 코드만 500여 개(총 임직원 1290명)에 이른다. 500여 개 직무별 평가에 따른 노동 가치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삼양사는 다시 직무들을 15개 안팎의 큰 분류로 나눠 임금을 차등 지급하고 있다. 500여 개의 모든 직무를 평가·관리하기도 벅찰 뿐 아니라 한국의 정서상 아직 직무급을 전면 도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생산직은 T1∼T4, 사무관리직은 P1∼P4, 판매직은 P1∼P3까지, 팀장급은 M1, M2로 직무 등급이 구분된다. 예컨대 사무관리직 전체 일자리를 보면 P1 등급 20%, P2 등급 30%, P3 등급 50%이고 P4 등급은 별도의 단순 업무에 속한다. P1 등급에는 140여 개의 직무가 포함되는 식이다. 삼양사 양재만 HR팀 부장은 “P1 밴드 안에서도 +25%∼-25%까지 급여 차등이 있다”며 “해당 직무를 잘 아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직무평가위원회에서 직무의 난이도 등 7가지 요소를 평가해 직무 가치를 점수화한 뒤 임금 수준을 정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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