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수주량 44.1%·선박 건조량45%, 2000년 이후 1위 지키는 한국…일본 머뭇거리는 사이 과감한 투자로 설계 능력과 시장 적응력 높여
▣ 울산=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제3건조도크, NO.1716, 선주 NYK, 2007년 3월6일 인도 예정’. 선박 건조 현황판을 훑어본 뒤 도크 밑바닥으로 내려가보니 대낮인데도 곳곳에 훤하게 백열 전등을 켠 채 용접 작업이 한창이다. 제3도크는 지상에서 땅속으로 13.3m를 파서 만든 선박 건조시설인데, 배가 워낙 크다 보니 하늘을 온통 가려 도크 안은 어둑어둑했다. 건조 중인 배는 길이 321m, 폭 45.6m, 높이 24.6m로 웬만한 축구장 두세 개 면적에 달한다. 그 위용에 누구라도 압도당할 것만 같다.
“3년 반치 일감 꽉 찼습니다”
1월4일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 제3도크 안에서는 1716번 선박 외에도 1703번, 1753번, 1762번 등 총 6척의 배가 동시에 건조되고 있었다. 길이 640m, 폭 92m에 이르는 제3건조도크는 배들로 꽉 차 있었다. 철판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여기저기서 쾅쾅 요란하고, 작업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힘차게 퍼졌다. 배 앞머리에서는 시퍼런 용접 불꽃이 폭죽처럼 떨어졌다. 몇몇 사람들이 사다리차처럼 생긴 고소차를 탄 채 20여m 높이의 배 위에 매달려 용접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건조 중인 1716번 배는 8100TEU(컨테이너를 세는 단위·20피트짜리 컨테이너 8100개를 실을 수 있음)급 컨테이너선으로 가격은 1억2천만달러에 달한다. 선주는 일본의 해운선사인데,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전세계 조선업을 제패했던 일본이 오히려 한국에 배를 지어달라고 발주한 것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조선업을 본격 시작한 한국 조선소들은 1990년대 말에 일본을 따돌리고 선박 수주량·건조량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100여m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 한눈에 내려다본 조선소는 9개 도크마다 세계 각지에서 주문받아 건조 중인 20여 척의 대형 선박들로 가득 차 있었다. “3년 반치 일감이 꽉 찼습니다. 충분한 조업량이 확보됐기 때문에 올해는 수주 물량 목표를 오히려 지난해보다 축소했어요. 블록(대형 선박은 150∼200개 안팎의, 10여m·40t 정도의 블록들을 탑재·조립해 건조함)들을 쌓아놓을 야드가 좁아서 걱정입니다.” 현대중공업 왕기철 과장의 말이다. 도크뿐 아니라 육상건조 공법(해안가 도크가 아니라 땅 위에서 배를 만들고, 고압의 공기를 뿜어 배를 띄운 뒤 레일을 통해 바다로 진수하는 방식)으로 지상에서도 배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동해 쪽 안벽(앞면이 거의 수직인 벽을 가진 구조물로, 배가 바다에 접안한 상태에서 건조작업이 이뤄짐)에서 건조 중인 선박도 즐비했다.
현대중공업은 2006년에 수주 190억달러, 매출 12조6천억원을 기록했다. 배를 완성해 선주한테 인도한 것만 72척이다. 올해는 수주 181억달러, 매출 15조2천억원이 목표다. 선박은 83척을 건조해 인도할 예정이다. 현대중공업 왕 과장은 “조선소마다 환율과 세계경제 동향에 따른 위험을 감안해 적정한 일감 확보 물량을 2년 반치로 잡고 있는데, 2003년부터 놓치기 싫은 괜찮은 발주 선박들이 많이 나오면서 각 조선소마다 지금은 3년 반치 일감을 확보하고 있다”며 “도크가 꽉 차 있기 때문에 지금은 수익성을 고려해 선별 수주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내 조선소들의 선박 수주량은 2002년 230척에서 2004년 441척으로 대폭 증가했다.
지난해 11월 말을 기준으로 보면, 전세계 선박 수주 잔량은 1억2073만CGT(표준화물선 환산 톤수)인데 이 가운데 37.2%(4740만CGT)를 국내 7개 조선업체들이 점유하고 있다. 2006년 1∼9월까지 한국 조선소들의 총 수주량은 1740만CGT로 전세계 수주량(3950만CGT)의 44.1%를 싹쓸이했고, 전세계 10대 조선소 순위에서도 한국이 1∼5위를 독식하고 있다(표 참조). 전세계 선박 건조량 비중은 한국 45%, 일본 35%, 중국 15% 등으로 국내 조선업계는 2000년 이후 세계 1위 자리를 지키면서 유례없는 호황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 주요 조선소마다 수주 잔량만 100∼200척이고, 2005년 수주 잔량만 해도 980척에 달했다.
몸집은 더 크게, 속도는 더 빠르게
국내 조선소들은 대형 유조선·컨테이너선·LNG(액화천연가스)선을 중심으로 연간 250여 척의 배를 건조하고 있는데, 가격이 비싸고 부가가치가 높은 LNG선(한 척당 약 2억달러)과 1만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한 척당 약 1억5천만달러)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컨테이너선의 경우 큰 배로 한 번에 많은 물동량을 운송하는 것이 작은 배로 여러 번 나눠 운송하는 것보다 훨씬 연료비가 적고 경제적이기 때문에 갈수록 대형화하고 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3500TEU급 컨테이너선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설계능력이 급속히 향상되면서 5천TEU급으로 높아졌다가 8천TEU급으로 다시 뛰었고, 8천TEU급도 엄청 큰 배라고 말하는 사이에 벌써 1만TEU급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현대중공업은 1만TEU급 이상짜리 컨테이너선 24척을 수주해둔 상태인데, 중국으로부터 수주한 1만TEU급 컨테이너선 3척은 스틸 커팅(철판을 잘라 선체 일부의 모양에 맞도록 접고 굽히는 것) 작업에 들어갔다.
특히 2005년에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조선 빅3’가 카타르에서 발주된 44척의 LNG선을 싹쓸이 수주하는 등 한국 조선소들은 컨테이너선과 LNG선 발주를 거의 독식하고 있다. 대형 LNG선의 경우 처음 시작한 1990년대 중반에는 일본의 기술을 도입해 건조했으나, 이제는 일본을 따돌리고 전세계 LNG선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폭발 가능성이 있는 천연가스를 싣고 대양을 건널 수 있는 배를 만드는 건 매우 힘든 일인데, 국내 조선업체들의 기술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우조선해양 안욱현 차장은 “한국 조선소가 만드는 배의 가격이 가장 비싸다”며 “2002년부터 중국을 중심으로 전세계 해상 물동량이 증가하면서 선박 수요가 많아졌고, 또 이중선체 의무화 같은 해양환경 관련 국제 선박규제가 강화되면서 선박이 노후화되기 전이라도 교체해야 할 필요성이 커져 동시다발적으로 선박 발주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당연히 선박 가격도 2004년부터 크게 올랐다.
국내 조선업이 세계 선박시장 1위를 질주하고 있는 비결은 뭘까? 일본은 노동집약적인 조선업종을 ‘지는 산업’으로 보고 선박 종류를 단순화하고 설계를 규격화한 반면, 국내 조선소들은 과감한 투자를 통해 설계 능력을 높여왔다. 특히 시장 적응력을 향상시켜 고객 주문에 맞춰 다양한 선박 형태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왕 과장은 “설계인력만 1300여 명에 이른다”며 “선주의 요구에 따라, 도면을 약간 바꿔 선실을 5층에서 6층으로 만들어주거나 배 앞머리를 더 뾰족하게 만들어주는 등 맞춤형 제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선박 길이가 300m일 경우, 선주들은 설계도면과 실제 건조된 선박의 오차를 5mm도 허용하지 않는데, 과거에는 조립되는 200여 개 블록마다 여분(마진)을 둬서 용접한 뒤에 남은 부분을 잘라내 오차를 줄이는 방식을 썼다. 그러나 10년 전부터는 아예 ‘노 마진’으로 정확하게 블록을 맞추고 있다. 용접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오차조차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기술력이 높아진 것이다.
선박은 몸집이 커질수록 운항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몸집은 더 크게, 속도는 더 빠르게’ 만드는 기술이 핵심이다. 유조선은 기름을 배 안에 한 달 동안 넣어둬도 괜찮지만 컨테이너선은 빵, 바나나, 계란 등 쉽게 상할 수 있는 온갖 물품이 실리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운송해야 한다. 해운 선사들은 인도받은 배의 속도가 당초 계약보다 0.1노트(1노트는 시속 1.85km)만 늦어도 1억원이 넘는 페널티를 매기는 것이 관행이라고 한다. 현대중공업은 파도와 바람의 저항을 최소한으로 줄여 매끈한 선체를 뽑는 설계 기술과 엔진 기술력을 바탕으로 1만TEU급 대형 컨테이너선의 운항 속도를 20노트(시속 약 38km)로 유지하고 있다.
엔진 원천기술도 빠르게 국산화
대우조선해양 안 차장은 “외환위기 이후 몇 개의 조선소가 인수·합병으로 주인이 바뀌거나 그룹에서 계열 분리되면서 이를 계기로 경쟁력이 강화된 점도 있다”고 말했다. 사실 외환위기가 오히려 국내 조선소들이 일본을 앞지르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분석도 있다.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800원대에서 거의 2천원대까지 치솟으면서 100% 수출기업인 조선소마다 뜻하지 않은 환차익으로 배 한 척당 100억원 이상씩 가만히 앉아 벌어들이는 대박을 터뜨렸는데,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꾸준히 투자를 늘려왔다는 것이다. 선박의 ‘심장’인 엔진 제조의 경우 유럽이 원천기술을 독점해왔지만 국내 조선소들이 투자를 통해 빠르게 국산화하고 있고, 배를 신속히 만드는 신공법 향상으로 1997년 172척에 그쳤던 국내 조선소들의 연간 건조량은 2005년에 285척으로 증가했다.
조선업은 수입을 별로 유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수출 품목들과 차별화된다. 설계, 엔진 부품 등 국산화율이 90%를 넘기 때문에 선박 수출액 대부분이 고스란히 무역수지로 남게 되는 것이다. 또 조선소가 잘 돌아가면 철강업계 역시 영업팀이 없어도 될 정도로 호황을 누리게 된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철강을 사겠다는 조선소들이 줄서기 마련이다.
대우조선해양 안 차장은 “사실 2003∼2004년에 수주 물량이 대폭 늘었는데, 건조를 끝내고 인도하는 시점인 2005년에 환율 하락으로 가만히 앉아서 배 한 척당 수억∼수십억원씩 손해를 봤다. 또 수주가 늘어도 선박용 후판(배에 사용되는 두꺼운 철판) 가격이 급등해서 수익은 좋지 못했다”며 “환율은 헤징이 가능하지만 철강 가격은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최근 5년간 이어져온 조선업의 ‘슈퍼 사이클’이 최고점이 임박했다며 올해부터 선박 수주와 가격이 감소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대중공업 왕 과장은 “조선소 경기는 늘 상승 곡선이 아니고 사이클이 있다. 해운선사들이 세계경제 동향 파악에 가장 빠른 편인데, 이들이 공격적으로 나서는 한 조선 경기는 당분간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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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세계 조선통계에 따르면 2005년 연도별 조선 수주량은 한국 1357만CGT(32.4%), 일본 944만CGT(22.6%)이다. 건조량은 한국 1009만CGT(34.8%), 일본 851만CGT(29.4%)이다. 한국 조선업은 1990년대 말에 일본을 따라잡고 갈수록 격차를 벌려놓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조선업 불황으로 일본과 유럽의 조선소는 연쇄 부도를 맞아 설비 축소에 나섰지만, 한국 조선소들은 이때부터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현재 일본과 유럽은 한국이 거의 독식하고 있는 일반 상선은 포기한 채 호화여객선(크루즈) 등 특수선박 중심으로 가고 있다. 이제 한국 조선업의 가장 큰 위협은 중국이다.
중국선박보에 따르면, 중국은 10∼15년 뒤 조선업이 한국에 근접하게 만들고 2015년에는 선박 건조량 2400만DWT(재화중량톤수)로 전세계의 35%를 차지해 한국을 제치고 세계 1위로 도약한다는 청사진을 그려놓고 있다. 중국의 2005년 선박 건조량은 1천만DWT로 전세계 시장의 16%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 내 여러 곳에 건설 중인 대형 조선 기지가 완공되면 건조량이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또 중국은 국내선 발주 물량이 워낙 많고, 선박 수주가격이 싸다는 점 때문에 중국에 발주를 맡기는 해외 해운선사도 많은 편이다. 배를 많이 짓다 보면 품질과 기술력이 높아지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반면 국내 조선업계는 조선소 부지가 좁아 도크 추가 설치 등이 쉽지 않은 형편이다. 조선 전문가들은 “중국 조선소들이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막대한 시설 투자로 건조량을 늘려 국내 조선업계에 위협이 되고 있다”면서 “중국이 빠른 속도로 한국을 쫓아올 수도 있다”고 말한다. 특히 중국 조선소들이 LNG선 건조를 본격화하면서 가격을 후려치기 시작하면 선박 가격이 크게 떨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일본 조선소들은 유럽을 제치고 1965년쯤부터 약 30년간 세계 정상을 누렸는데, 1990년대 말에 세계 1위에 오른 한국은 벌써 중국의 추격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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