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와 브랜드별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밥맛의 차이는 거의 없어… 지역별 품질이 비슷해지면서 브랜드만 내세워서는 승부가 힘든 상황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쌀은 이제 ‘식량’을 넘어 상품 ‘브랜드’화하고 있다. 쌀 브랜드는 전국적으로 무려 1900여 개에 이른다. 쌀 브랜드의 홍수는 무엇보다 지역별로 미곡종합처리장(RPC)을 경쟁적으로 설립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314개의 RPC가 운영되고 있는데, 각 RPC가 쌀 가공법을 달리해 새로운 브랜드를 계속 만들어 내놓고 있다. 한 개의 RPC에서 평균 6개 정도의 쌀 브랜드를 생산한다.
또 농가는 농가대로 품종과 재배법을 달리해 ‘밥맛 좋은 쌀’(?)을 만들면서 브랜드 수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이런 밥맛 경쟁은 생산과 가공 과정의 비용을 증가시켜 쌀값 상승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명품 브랜드 쌀의 수요는 전체 쌀 소비의 2∼5% 정도이지만 가격은 보통 쌀보다 훨씬 비싸고, 1kg에 무려 7800원이나 하는 친환경 쌀도 있다.
브랜드 모르고 먹은 309명 소비자의 대답
과연 브랜드 쌀은 비싼 만큼 밥맛도 좋고 품질도 월등한 것일까? 한국식품연구원이 2004년 국산 7개 브랜드 쌀마다 똑같은 조건에서 밥을 지어 309명의 소비자한테 맛보게 했다. 이때 산지와 품종을 모르는 상태에서, 즉 어떤 브랜드인지 알려주지 않고 품질에 대한 평점과 지불의사 금액을 조사했다. 흥미롭게도 밥맛 평가(최저 1점∼최고 9점까지 9점 척도)에서 평점 차이는 최대 0.6으로 극히 미미했다. 밥맛 평점 차이가 작은 건 소비자들이 인지할 수 있는 만큼 밥맛 차이가 뚜렷하지 않다는 뜻이다. 민간 농업연구소인 GSnJ의 이정환 이사장은 “이 조사 결과는 소비자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밥맛 차이를 달성하는 것이 매우 어려움을 보여준다. 브랜드에 따라 밥맛 차이가 나고, 소비자가 그것을 인지해서 지불의사 가격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환상’일 수 있다”고 말했다. 비싼 브랜드 쌀에 가격 거품이 끼어 있다는 얘기다.
이런 환상에도 불구하고 ‘산지’와 ‘브랜드’에 대한 신뢰는 소비자의 쌀 선택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브랜드를 모르게 한 상태에서 조사한 소비자 지불의사 가격(밥맛을 본 뒤 제시한 지불의사 가격)이 7위(4만4천원/20㎏)에 그쳤던 ‘임금님표 쌀’은 브랜드를 알고 난 뒤에는 4만6천원으로 최고 평가액을 받았다. 반면 밥맛 1위로 평점(6.34)를 받은 ‘서산 STR’ 쌀의 경우 지불의사 가격은 4만5천원으로 3위에 머물렀다. 또 산지와 품종을 알려준 뒤 경기 추청(개량 아키바레)과 강원 오대쌀에 대한 지불의사 가격은 20kg당 2천원 정도 큰 폭으로 상승한 반면, 중국산 품종은 산지가 알려진 뒤 지불의사 가격이 20kg당 -4천원까지 대폭 떨어졌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2005년 조사에서 소비자의 51%는 쌀의 밥맛이 ‘품종’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또 21%는 ‘산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재배·가공 방법에 따라 밥맛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소비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이런 ‘통념’에도 한국식품연구원의 실제 테스트에서는 똑같은 쌀이라도 각각의 소비자들 사이에 밥맛 평가가 크게 엇갈렸다. 어릴 때부터의 식습관에 따라 입맛이 제각각 달라진 것도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국산 쌀 브랜드들 간에 지불의사 가격 최고와 최저치의 차이가 1340원/20㎏으로 3%에 불과했는데, 밥맛에 대한 평점이 1점 상승해도 소비자들의 지불의사 가격은 겨우 2500원/20㎏ 오르는 데 그쳤다. 품종과 산지에 따라 밥맛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밥맛 차이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이에 따라 지불의사 가격도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경기 쌀이 전라 쌀보다 비싼 이유는?
사실 국산 쌀과 미국 칼로스 쌀, 중국 쌀로 금방 밥을 지은 뒤 먹게 하면 소비자들이 국산인지 수입 쌀인지 잘 가려내지 못할 때도 많다. 누구나 압력밥솥으로 밥을 짓기 때문에 밥을 하는 동안 쌀의 이화학적 특성이 변화돼 품질 차이가 유지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이정환 이사장은 “월 200만원 이하 소득자 중 45%가 쌀 구입시 가격을 최우선 요인으로 꼽을 정도로 소비자 선택에 가격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밥맛이 뛰어난 브랜드 쌀 가격이 보통 쌀 가격보다 60% 이상 높아도 사먹겠다는 소비자는 2%에 불과했다”며 “산지를 알려주지 않고 테스트를 해보면 소비자들이 경기 추청벼와 전라도 동진벼를 거의 구분해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저마다 독자적인 쌀 브랜드를 앞세워 ‘밥맛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뜯어보면 실체가 없는 과열 경쟁이라는 얘기다.
생산지 관점에서 볼 때 일종의 브랜드 쌀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강원도 쌀을 보자. 일반적으로 쌀값은 경기·강원도 쌀이 가장 높고 충청도 쌀이 중간 수준이고 전라도 쌀이 가장 낮다. 9월10일 현재 지역별 정곡(도정한 쌀) 가격은 경기 쌀이 15만9천원/80kg으로 가장 높고, 충남이 14만8천원으로 가장 낮다. 경기 이천 쌀, 김포 쌀 등이 비싸게 팔리는 건 그만큼 품질이 탁월해서일까? 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관계자는 “경기 쌀과 남부 지역 등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비교해보면 품질 차이는 거의 없다”며 “경기·강원 쌀이 비싸게 팔리는 건 단순히 산지에 대한 좋은 이미지나 브랜드 파워 때문이다”고 말했다.
사실 쌀이 함유한 수분의 경우 산지와 무관하게 거의 모든 쌀은 일정한 함량을 갖추고 있다. 일정한 수분 함량을 갖추지 못하면 도정 단계부터 문제가 생긴다. 작물과학원 쪽은 “영양 측면에서도 우리나라 쌀 품종 간에, 또 지역별로 특별한 차이가 있다고 발표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경기 쌀은 서울이란 대량 수요처가 있다는 점, 그리고 왕에게 올렸던 진상미라는 이미지 덕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역별 기후 차이가 쌀의 품질 차이를 낳는 것도 아니다. 경기·강원 등 중부 지역은 추석 전에 일찍 수확하는 조생종과 중생종이, 남부 지역은 대개 10월에 수확하는 중만생종 쌀이 주로 재배되고 있다. 이처럼 재배 시기와 수확 시기가 지역별로 다르기 때문에 중부이든 남부 지역이든 벼가 익는 시기와 온도 조건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도정 시설 확대로 지역 격차 해소
지역별로 쌀의 품질 차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농촌진흥청이 보급하고 있는 ‘탑 라이스’(TOP RICE)가 입증해주고 있다. 탑 라이스는 최고의 밥맛을 내는 여러 재배 기술과 RPC의 도정 기술을 하나로 종합해 쌀 재배 매뉴얼을 만들고, 어느 지역에서든 똑같이 이 매뉴얼에 따라 생산·가공한 쌀이다. 지난해 전국 16개 생산단지에서 8개 품종이 ‘탑 라이스’ 브랜드를 달고 생산됐는데, 지역과 품종이 달랐지만 밥맛은 일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밥맛을 좌우하는, 쌀 성분 중 단백질 함량도 6.5% 이하로 똑같았다.
작물과학원 쪽은 “탑 라이스가 보여주듯 산지가 어디이든 적기에 벼를 재배하고 도정까지 제대로 관리만 잘한다면 품질은 똑같다”고 말했다.
농촌경제연구원 김태훈 전문연구원은 “전라도 해남의 ‘한눈에 반할 쌀’이 비싼 값에 팔리는 등 남부 지역 RPC들이 자체 브랜드화해서 성공한 사례가 늘고 있다”며 “예전에는 주로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RPC가 설립됐지만 지금은 남부 지역에도 도정 시설이 확대되면서 품질이 향상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별 품질 차이가 거의 사라지고, 단순히 브랜드 쌀을 내놓는 것만으로 승부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경북도는 햅쌀을 섭씨 5도 이하로 저온 저장한 뒤 당일 주문, 당일 도정, 당일 배달(우유 배달망을 활용)하는, 즉 아침마다 우유처럼 가정에 공급하는 시스템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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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수확기(10∼12월)에 전국 평균 쌀 가격은 산지 정곡 가격으로 14만130원/80kg이었다. 2004년 같은 시기보다 13.6%나 폭락했다. 사상 최대의 폭락이다. 민간 농업연구소인 GSnJ의 이정환 이사장은 “수급상으로 가격 하락 요인이 없었고, 2004년산 쌀의 계절진폭(수확기와 단경기(6∼8월) 간 쌀 가격 차이)이 마이너스여서 쌀 가공·유통업체(RPC)가 수확기에 벼 매입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또 올해부터 수입쌀이 시판되면서 그 불안감으로 매입 수요가 더욱 감소했다”고 말했다. 수확기의 쌀값은 가공·유통업체가 단경기에 판매하기 위해 매입하는 양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 결국 단경기 가격에 대한 기대에 달려 있는데, 주식 선물시장처럼 계절진폭에 따른 불안정성과 위험이 높다.
수급과는 상관없이 산지 쌀값이 폭락했기 때문에 올해 6월부터는 수급을 반영해 쌀값은 다시 폭등했고, 9월10일 현재 쌀 산지 정곡 가격은 15만3천원/80kg으로 올랐다. 그러나 농가는 이미 지난해 말에 판매를 끝낸 뒤다. 농가는 2004년 대비 40kg당 평균 8465원 정도 낮은 가격에 팔았고, 그 결과 농가 쌀 판매수입은 2004년보다 9171억원이나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농가 판매액 손실 중에서 소비자는 가격 하락으로 5549억원의 이득을 봤고, 소매상은 2450억원, 가공·유통업체는 1173억원의 이득을 챙겼다.
이정환 이사장은 “수확기의 산지 쌀 가격은 투기적 요인이 지배하는데, 수확기 이후 쌀 가격이 상승할 것인지 하락할 것인지를 둘러싼 불안감이 시장을 지배한다”며 “그래서 RPC와 생산 농가는 갈등 속에 가격 변동에 따른 위험을 상대방에 전가시키려는 게임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시장불안을 해소하고 생산 농가의 이익을 보호하려면 수확기 거래 제도가 ‘수탁제도’로 바뀌어야 한다. 수탁제도는 수확기에 농가는 가공·유통업체에 판매를 위탁하고, 가공·유통업체는 예상 판매액의 일부를 우선지급금으로 농가에 줘서 농가의 현금 수요를 충족시켜준 뒤 쌀을 판매해 필요한 경비를 공제하고 생산 농가에 차액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박동규 연구위원은 “쌀을 다 팔고 나서 정산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 가격의 70∼80%를 현금으로 농가에 주고 나머지는 팔고 나서 정산하면 된다”며 “단경기 쌀 가격에 대한 위험을 제거하려면 유통업체와의 거래 관행을 매취에서 수탁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면 농가의 수취 가격은 연평균 가격 수준에서 결정되고, 유통업체는 안정된 가공·유통 수수료를 취득하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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