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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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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생은 꽃놀이패를 쥐었단다

등록 2006-05-12 00:00 수정 2020-05-03 04:24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 매수하며 불거진 ‘시동생의 난’… 현대그룹은 물론 채권단이 곧 매물로 내놓을 현대건설까지 노린 포석인가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정몽준(55) 의원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여섯째 아들로 현대중공업그룹의 최대 주주다. 정 의원은 그룹 지주회사 격인 현대중공업 지분 10.8%를 지렛대 삼아 현대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등 그룹 계열사들을 장악하고 있다.

현 회장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정 의원 손에 쥐어져 있는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그룹의 핵심 계열인 현대상선 최대 주주로 등극한 것은 지난 4월27일. 현대중공업은 이날 현대상선 주식 18.43%를 사들여 현대엘리베이터를 밀어내고 현대상선 1대 주주로 올라섰다. 현대삼호중공업도 같은 날 현대상선 지분 8.25%를 사들임으로써 현대중공업그룹의 상선 지분은 26.68%에 이른다. 현대엘리베이터를 비롯한 기존 대주주의 지분 20.53%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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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그룹의 이번 지분 매입을 두고 현대그룹 쪽에선 ‘시동생의 난’이란 딱지를 붙이고 있다. 정 의원이 형수인 현정은(51) 현대그룹 회장의 경영권을 뺏기 위해 핵심 계열인 현대상선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 회장은 지난 2003년 8월 남편인 정몽헌 회장(정주영 회장의 다섯째 아들) 작고 뒤 그룹 회장에 올라 최대 주주로서 경영권을 행사해왔다. 현 회장은 그룹 경영권을 장악한 직후 시숙부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정주영 회장의 막내 동생) 쪽으로부터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 이른바 ‘숙부의 난’에 시달린 적이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경영권 위협이나 시동생의 난이라는 현대그룹 쪽의 시각을 어불성설로 못박고 있다. 현대상선 주식 취득 때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에 공시한 자료를 통해 취득 목적을 ‘자금운용의 효율성 제고’라고 밝혔고, 언론에 발표한 자료에서도 경영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단순투자’임을 강조했다. 심지어 현대중공업 최대 고객인 현대상선이 외국인에게 넘어갈 위험을 막기 위한 조처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현 회장의 경영권을 뺏기는커녕 되레 외국 자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백기사’라는 설명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이 이번에 취득한 현대상선 지분은 노르웨이 선박회사인 골라LNG 계열의 제버란 트레이딩 등 2개사가 보유하고 있던 물량이다.

김문현 현대중공업 이사는 여기에 제버란 쪽에서 먼저 매각 의사를 타진해왔고, 중공업과 상선의 시너지(상생) 효과를 꾀하고자 제의를 받아들였다는 배경 설명을 보탰다. “중공업은 배를 만드는(조선) 회사이고, 상선은 배를 필요로 하는(해운) 회사다. 조선(현대중공업)과 해운(현대상선)은 전통적으로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고, 상선은 중공업의 제일 큰 고객이기도 하다. 그쪽(상선)에 투자하면 시너지가 배가될 것이다. 일본이 지난 40년 동안 세계 조선시장을 주도한 것은 해운과 조선의 상생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중국도 조선과 해운의 연결 고리를 바탕으로 한국을 쫓아오고 있다.”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현정은 회장 쪽의 비난에 대해 김 이사는 “공정공시 규정이나 내부정보 이용 위반 행위로 여겨질 수 있어 협의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2003년의 ‘숙부의 난’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설명이다. 숙부의 난 때는 KCC 쪽에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사들이면서 현대그룹을 인수한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혔고 지분 매입 과정에서 ‘5%룰’ 등 법규를 위반하지 않았느냐는 설명이 뒤따랐다.

왜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샀을까

그렇다면 현정은 회장 쪽의 ‘적대적 M&A론’은 과도한 의심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까?

현 회장의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 쪽의 해명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 쪽에서 현대상선의 지분 매입 전 사전 협의를 해오지 않은 사실뿐 아니라 매입 가격으로 보더라도 경영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블록세일’(덩어리로 파는) 때는 시가보다 낮은 수준에서 사들이는 게 상식인데, 현대중공업은 오히려 비싸게 샀다는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제버란 보유 현대상선 주식을 시가보다 20%가량 높은 주당 1만8천원에 사들였다. 현대중공업의 상선 지분 매입 때 덧붙은 20% 덤은 ‘경영권’과 연결지어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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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경영권 장악 의도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싸움은 무의미할 수 있다. 현대중공업은 이미 현대그룹의 핵심인 현대상선의 최대 주주로 올라 있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이 때문에 ‘게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 현대중공업에서 상선 지분 취득 때 ‘단순투자 목적’이라고 한 공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지분 취득 목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현행 법규상 지분 취득 목적을 바꿀 경우 5일 동안 추가로 지분을 매입하지 못하고, 그 기간에 의결권을 금지당하는 ‘냉각 기간’만 거치면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정몽준 의원이나 현대중공업 처지로 돌아가보면, 상선 지분은 대단히 매력적인 대상이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현대상선 → 현대증권 → 현대엘리베이터’로 이어지는 현대그룹 순환출자 구조의 특성상 상선만 장악하면 현대그룹 전체를 어렵지 않게 틀어쥘 수 있다. 더욱이 현대상선은 2003년 적자에서 이듬해 흑자로 돌아섰으며 2005년에 매출 4조8천억원, 당기순이익 약 4천억원을 거둘 정도로 탄탄한 실적을 자랑하고 있다. 현대그룹 전체적으로도 2003년 적자 2500억원에서 지난해엔 7800억원 흑자로 돌아섰다. 현대그룹 쪽에서 현정은 회장이 정상화시켜놓은 그룹에 정몽준 의원이 욕심을 내고 있다고 비난하는 게 이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지분 매입은 현대건설의 운명과 연결지어 해석할 때 ‘이중의 포석’을 깐 것으로 풀이된다. 상선의 최대 주주가 됨으로써 ‘현대 가문’의 적통을 이어받은 현대그룹을 쥘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현대 가문의 뿌리인 현대건설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일도 막게 됐다는 점에서다. 지난 2000년 현대그룹 유동성 위기로 채권단 손에 넘어간 현대건설은 곧 M&A 시장에 매물로 나올 예정이며, 현대상선 쪽에서 이를 인수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현대상선이 현대중공업의 우산 아래 들어간 마당에선 상선의 건설 인수는 어려워진 것으로 보이며 설사 인수하더라도 (이미 상선을 장악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정몽준 의원 쪽으로선 나쁠 게 없어 보인다.

경영권 다툼 때 현대건설 압박 가능

또 하나 흥미로운 대목은 현대건설이 현대상선 지분 8.69%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에 벌어질 수 있는 형수와 시동생의 경영권 다툼 때 ‘캐스팅보트’(결정권)가 현대건설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현대중공업의 상선 지분은 현대건설에 최소한 중립은 지키도록 하는 압박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 의원은 상선 지분 매입으로 일종의 ‘꽃놀이패’를 쥔 셈이다.

현 회장의 현대그룹 쪽은 그냥 앉아서 당하지는 않을 태세다. 일전불사 의지를 내비치며 다양한 여론전과 함께 우호 지분 확보에 나서고 있다는 후문이다. 현대건설 인수 등 고비마다 형수와 시동생 사이에 파열음이 터져나올 것임을 예고한다. 그렇지만 현재 확보하고 있는 지분에서 현대그룹 쪽이 열세인데다 자금력으로 보더라도 현대중공업그룹에 밀리는 것으로 파악돼 현 회장 쪽에는 힘겨운 싸움이 될 전망이다. 현 회장의 현대그룹으로선 현대엘리베이터를 통해 상선 지분을 진작 늘려놓지 못한 점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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